76화. 새출발 - (16)
12월 초, 고교 진학을 앞둔 학생들은 손님 자격으로 다이이치 고교를 방문했다.
매년 이쯤 되면 분주한 나날을 보내지만 올해는 유독 많은 손님, 겨울방학 기간이지만, 선배들은 후배맞이를 위해 하루를 기증했다.
“야구부는 어디에 있나요?”
“저쪽으로 가시면 돼요.”
최근 명성을 떨치고 있는 야구부 방문도 놓칠 수 없는 관광 코스, 하지만 썰렁한 분위기에 입학예정자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어디 갔어요?”
“글쎄요. 방학 중이니까 다들 이곳저곳으로 ··· ”
“아쉽다.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고시엔에 추계대회까지, 야구부는 지난 반 년 동안 여름방학도 제대로 못 즐기고 경기에 매진했다. 겨울방학에 심신을 달래는 건 당연, 손님들은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안내역을 맡은 스즈에는 마침 눈에 보이는 돌멩이를 가볍게 걷어찼다.
정면에서 부딪쳐보기로 했는데 목표물이 5m 이내에만 접근해도 심장이 콩닥콩닥, 아무 진전도 없이 올해가 지나간다고 생각하니 괜히 짜증이 났다.
“우와아 ~ !!”
이때 교내 분위기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지난 10월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2순위 지명을 받은 이시다 토모카츠의 등장, 검증된 루키라고 해도 고졸 선수가 대학생들과 경쟁하는 건 쉽지 않다.
이런 불리한 조건에서 이시다는 계약금만 1억 3천 만 엔을 받는 조건으로 미요시 호크스에 입단, 손님들이 떠들썩한 반응을 보인 건 당연했다.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이시다는 인파를 뚫고 부원실로 향했다.
프로구단과 계약한 기념으로 야구부 동료들과 소소한 연회라도 즐기려고 왔는데, 오늘 학교가 손님맞이로 분주하다는 정보를 미처 숙지하지 못했다.
“우와아아 ~ !!”
“本物(진짜다)!!”
잠시 후, 교내는 더 큰 환호에 휩싸였다.
고시엔 우승, U-18 우승, 추계대회까지 제패한 다카기 하루요시의 등장, TV에서만 봤던 유명인사의 실물을 본 손님들은 흥분의 도가니, 하지만 다카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제 갈 길을 갔다.
‘얘들 다 뭐냐?’
사진을 찍는 행렬이 따라붙었지만 관심 없는 얼굴, 제 갈 길을 간 다카기는 부원실에서 반가운 얼굴을 마주했다.
“선배, 너무 성급하셨던 거 아니에요?”
다카기는 축하인사보다 불길한 서두를 꺼내들었다.
신인 계약금만 1억 3천 만 엔이라니, 분명 좋은 조건이지만 소식을 접한 다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냐?”
“거기가 신인 관리해주는 구단은 아니잖아요.”
미요시 호크스는 오랫동안 선발진 붕괴로 고초를 겪었다.
국내 선수에 용병까지 다 투입해 봤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프런트는 신인 드래프트가 열릴 때마다 투수 확보를 최우선으로 뒀다.
하지만 아무리 투수가 급해도 상위지명권은 그런데 쓰라고 있는 게 아니다. 특정 포지션에 지명권을 남발하면 2군 구조가 기형적으로 바뀌기 마련, 결국 미요시 호크스는 이도 저도 아닌 팀이 됐다.
이런 구단이 고졸 신인을 제대로 관리해 줄 수 있을까. 계약금 많이 줬다고 초반부터 굴리는 건 아닌지, 남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것 같아 입을 다물려고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왔다.
“나도 그건 좀 마음에 걸리더라. 그래서 계약 맺기 전에 그쪽하고 대화를 해봤지.”
“그럼 됐어요.”
다카기는 더는 참견하지 않았다.
그쪽에서 납득할만한 제안을 했으니 선배도 받아들인 거겠지, 걱정 돼서 한 마디 해봤다며 어물쩍 넘겼다.
“너 여기 오래 못 있지?”
“아니요. 5시 표 끊었어요.”
다카기는 오늘 1시,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탈 예정이었다.
며칠 전에 예약까지 해 뒀지만 간만에 얼굴 좀 보자는 선배를 위해 일정을 조정했다. 뒤차 표가 남아 있었던 것도 운명, 시간에 쫓기지 않고 천천히 대화를 나눴다.
“야, 너 지금 드래프트 나오면 얼마나 받을 것 같냐?”
이시다는 다카기를 슬쩍 떠봤다.
내가 계약금만 1억 3천 만 엔을 받았는데, 이 녀석이 시장에 나오면 얼마를 받을까? 돌아온 답은 단호했다.
“그 돈 제가 주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요?”
“그래도 네 기대치가 있을 거 아냐?”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정말 야구선수가 된다면 미국으로 갈 거예요.”
“진심이냐?”
“그 편이 선배 커리어에도 좋을 텐데요? 저 만나면 평균자책점 왕창 깎일 거 아니에요.”
후배의 도발에 이시다는 움찔했다. 역시 건방진 녀석, 자기도 모르게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짜증나는 성격은 여전하구나.”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저처럼 선배 신경써주는 후배가 어디에 있어요?”
“그래, 눈물 나게 고맙다.”
잡담을 주고받는 사이, 반가운 얼굴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모든 부원이 이 자리를 함께하진 못했다.
방학을 맞이해 이미 고향으로 내려간 사람도 있고, 각자의 사정 때문에 불참을 표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매니저 사나에도 그 중 한 명, 울면서 야구부를 뛰쳐나간 이후 한동안 연락이 끊겼는데, 지금 도쿄에 있다며 불참을 통보했다.
“걔 정말 도다이(東大) 붙은 거냐?”
“어, 나중에 우리는 말도 못 걸 정도로 높은 곳에 서 있겠지.”
도쿄대 입학은 나라를 이끌어가는 엘리트가 된다는 뜻,
얼마 전만해도 우리와 동고동락했던 사람인데 눈 깜짝 할 사이 멀리 날아가 버리다니, 부원들은 이제 사나에를 외계인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글쎄요. 저는 가끔 연락 하는데요?”
“네가?”
“네. 와서 연패 좀 끊어달라고 얼마 전에 연락 왔어요.”
이때, 다카기가 문자 하나를 공개 했다.
도쿄대 야구부는 올해도 연패를 거듭하며 76경기 연속 패배라는 전무후무한 불명예 기록을 세웠다.
사나에는 거기서도 야구부 매니저로 활동할 예정, 승리의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다카기 영입을 위해 일찌감치 물밑작업에 나섰다.
“와 ~ 이 정도면 노골적이네.”
“야, 그냥 고백해라. 이젠 숨길 것도 없잖아.”
부원들은 다카기의 등을 떠밀었다.
예전부터 뭔가 수상했던 두 사람의 관계, 이 정도면 사나에도 마음을 드러낸 거 아닌가? 하지만 다카기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사나에 선배한테 아무 감정 없어요.”
“진심이냐?”
“제가 선배하고 친하게 지낸 건 인정해요. 야구에 대한 열정도 진심으로 존경하는데, 그 이상은 아니에요.”
진지한 해명에 부원들은 박장대소했다.
그럼 지금까지 사나에 혼자 헛물을 켰다는 거 아닌가, 짝사랑은 역시 비참한 거라며 낄낄거렸다.
“다들 모였냐?”
“예!!”
때맞춰 등장한 후루타 감독과 다나카 코치, 웃고 떠들던 부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췄다.
“프로 진출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이시다는 감독의 축하 인사에 고개를 숙였다.
내년 2월부터 시작되는 전지훈련 그리고 시범경기, 애석하게도 졸업식에 참석할 여유는 없다. 이미 야구부를 떠난 몸이지만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에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울지 마라. 앞으로 갈 길이 먼데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된다.”
“ ··· 예”
말은 그렇게 했지만 후루타 감독의 마음도 복잡했다.
자식처럼 키운 제자가 그 험난한 길을 가겠다니, 잘 됐으면 하는 마음과 걱정이 교차했다.
“나는 가고 싶어도 못 갔던 길이다. 넌 행운아니까 자신감을 가져라”
다나카 코치도 질투심 섞인 격려를 건넸다.
프로 진출을 위해 대학에서도 야구를 놓지 않았지만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꿈. 그 어려운 일을 제자가 해냈다니, 소식을 듣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코치님이 못 이룬 꿈, 제가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속 긁지 말고 1절만 해라.”
오가는 대화 속에서 어색한 분위기는 조금씩 걷혔다. 어느 때보다 완벽했던 야구부의 1년, 갈 사람은 가도 뒤에 남은 자들은 내년을 대비해야 했다.
“감독님, 스카우트 할 학생은 정해두셨어요?”
“글쎄다. 이 친구하고 논의는 해봤는데 쉽지가 않구나.”
후루타 감독은 며칠 전부터 다나카 코치와 의논을 주고받았다.
다이이치는 그동안 특기생 입학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내년부터 손질한 입학규정을 적용하게 됐다. 야구부에 필요한 인재를 데려와야 할 텐데, 야구부를 지원할 행정인력이 편성되지 않아 진전된 게 없다.
스카우트는커녕 다음 해에도 복덩이가 알아서 굴러들어오길 바라야 하는 상황, 하지만 다카기는 그런 시나리오는 바라지 않았다.
“저는 야구 잘 하는 애들 여기 안 왔으면 좋겠어요.”
“왜?”
“걔들은 제 목을 노리게 해야죠. 와도 제가 괴롭혀서 쫓아낼 겁니다.”
후루타 감독은 피식 웃었다.
감독 입장에선 좋은 인력이 하나라도 더 늘어야 편한데, 저 녀석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기계발에 목을 맨다. 그런 면이 마음에 드는 것도 사실, 괜한 시비로 애정을 표했다.
“내 관심이 다른 녀석에게 가는 게 불편하나?”
“감독님, 짝사랑은 그만 하세요. 마음만 아플 뿐입니다.”
부원실은 격한 웃음으로 들썩거렸다.
감독이 애정을 주든 말든 관심이 없다니, 짝사랑은 그만두라는 충고에 후루타 감독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한동안 계속된 대화, 오후 3시 30분이 되자 다카기는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먼저 자리를 비웠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교내에는 많은 학생이 남아있었지만, 다카기는 주위의 시선을 정면으로 관통했다.
바다가 갈라지듯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길이 열렸고,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정문 근처에서 한 소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저 ··· 저기 ··· ”
“네, 무슨 일이시죠?”
소녀의 정체는 모토즈미 스즈에,
겨울방학 중이라 만나는 건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날 기회가 올 줄이야. 고백은 몰라도 말이라도 걸어보자며 달려들었다.
“호 ··· 혹시 야구부 응원단 아세요?”
“네, 타카코 선생님이 지도하는 ··· ”
대화는 여기서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스즈에는 마구잡이로 달려든 것 뿐, 다카기도 처음 보는 소녀에게 이런 저런 말을 걸 만큼 붙임성이 좋지 않았다.
“죄송한데 제가 기차를 타야 되거든요. 다른 용건이 없다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저기 ··· 이나바 키리코 양은 아시죠?”
“네, 같은 반 친구인데요.”
“제가 키리코 양하고 잘 아는 사이거든요. 요즘 다카기 군하고 경쟁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뭐죠?”
잠시 말이 없던 다카기는 약간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키리코 그 녀석이 승전보를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닌 건가. 그렇잖아도 다음 시험은 반드시 이겨주겠다고 벼르고 있는데, 괜한 오기가 끓어올랐다.
“별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저는 이만”
스즈에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스트라이크는 몰라도 볼 판정은 받았어야 했는데 혹시 폭투가 된 건 아닌지, 자책감에 머리를 마구 두들겼다.
그래도 어렵게 찾아온 기회, 다시 한 번 그 뒤를 맹렬히 쫓아갔다.
“저기요!!”
“또 뭐죠?”
“그 경쟁 저도 한 번 해보면 안 되나요?”
상대를 빤히 응시하던 다카기는 다짜고짜 지난 중간시험 테스트 결과를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스즈에는 사실대로 말했고, 다카기는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죄송한데 저보다 약한 상대한테는 관심 없어요. 경쟁 상대가 필요하다면 다른데 알아보세요.”
“아니!! 저기!! 잠깐만요!!”
나보다 약한 상대한테는 관심 없다니, 강한 타입에 끌리는 유형인가.
스즈에를 혼란에 빠트린 다카기는 어느새 시야에서 저만큼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