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75화 (75/361)

75화. 새출발 - (15)

‘이대로 끝내는 건 아니지, 난 아직 할 게 있다고’

패배로 몰리는 분위기에서도 히라카시의 캡틴 고토부키는 의욕을 잃지 않았다.

야구부 입부 1년 만에 꿰찬 스타팅 멤버, 반드시 고시엔 무대를 밟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지역예선 첫 경기 만에 무너졌다.

절치부심해서 돌아온 이 자리, 이대로 패하면 다시 도전할 수 있을까. 다음 기회는 없다며 스스로 퇴로를 끊어버렸다.

‘이걸 어떻게 요리하지?’

다이이치의 포수 히라노(2학년)는 곁눈질로 타자의 움직임을 살폈다.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슬라이더를 던질 타이밍이지만 오늘 다카기의 빠른 볼 움직임은 최고조다.

고토부키의 컨택 능력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봤자 단타쟁이일 뿐, 힘으로 눌러버리라는 사인을 보냈다. 빠져 앉았다.

까앙 ~

느리게 굴러가는 땅볼, 모토바시 테츠야(1루수)는 전진 스텝을 밟았지만 타구를 쫓는 다카기를 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달리는 주자, 후진 스텝을 밟는 1루수, 다카기는 송구를 포기했다.

유격수 출신이라 확신이 없는 송구는 지양하는 편, 3점 차 리드도 있고 무리하지 않았다. 문제는 중심 타선, 공격적인 투구는 계속됐다.

까앙 ~ !

“타격!! 내야를 빠져 나갑니다!! 1루 주자는 2루를 지나 3루까지!! 무사 주자 1 - 3루!! 오사카 최강의 명성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글쎄요. 다카기 선수는 조금 신중한 투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히라카시가 한 점 따라붙으면 승패는 장담할 수 없어요.”

상황을 살피던 다이이치의 후루타 감독은 천천히 마운드로 향했다.

처음부터 이 경기의 마무리는 다카기로 정해뒀다. 바꿀 생각은 물론 투구에 간섭할 마음도 없지만, 흐름을 끊어주기 위해 시간을 끌었다.

“떨리냐?”

“아니요.”

혹시나 했는데 망설임 없는 대답, 딱히 할 말도 없고 후루타 감독은 내야수들을 한 자리에 소집했다.

“너희들 기죽을 것 없다. 다 안타 맞은 이 녀석 잘못이지.”

“그래, 너희들한텐 기대도 안 했어. 삼진을 못 잡은 내 잘못이지.”

다카기의 농담에 내야수들은 약간 발끈했다.

미안했던 마음도 사라지게 하는 도발, 하지만 1루수 모토바시는 우릴 다독이기 위한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평소에도 원래 이랬던 녀석, 뭣보다 앞서고 있으니 농담에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조금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하지만 여유도 잠시, 희생플라이가 나오면서 스코어는 6대 4로 좁혀졌다(1사 주자 1루).

다카기는 오늘 경기 전까지 추계대회에서 15와 1/3이닝 무실점 기록을 이어가던 녀석, 원래 불안한 동료라면 실점이 나와도 이렇게까지 불안하진 않았을 거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라 믿었던 선수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다이이치 벤치는 초조함에 둘러싸였다.

‘이거 미안한데, 다들 불안한가?’

고교 통산 첫 실점, 다카기는 외야 분위기를 살폈다.

언제나 믿음을 주는 선수가 되는 게 목표인데, 타카코 선생님이 이끄는 미소녀 응원단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다들 혹시나 하는 불안에 떨고 있는 거겠지, 달래줄 방법은 정해져 있었다.

까앙 ~ !!

“안 돼!!”

초구부터 강한 타구, 모토즈미 스즈에는 흠칫했지만 파울 판정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타자들이 계속 치고 있는데 저렇게 정면에서 달려들어도 되는 걸까? 가끔은 도망쳐도 괜찮을 텐데, 수컷들의 세계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와아아 ~ !!”

2구는 헛스윙, 주변은 환호로 들썩였지만 스즈에는 눈을 뜨지 못했다. 공 하나 하나가 살얼음 판, 다음 공은 제발 도망치라고 애원했다.

“배트 돌았다는 판정입니다!! 삼진!! 결국 힘으로 이겨냅니다!!”

“다카기 선수의 빠른 볼이 보통 138 ~ 143km 사이에서 형성되는데, 갑자기 구속을 끌어올리니까 대응을 못하네요.”

삼진을 헌납한 쿠로즈미는 고개를 숙인 채 벤치로 향했다.

상대는 사이드 암, 우타자 기준으로 시야에서 멀어지는 궤적을 그리는데 여기에 속도까지 겸비하면 뭘 어쩌라는 건지, 전광판에 찍힌 숫자(149km)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음 타자는 슬라이더만 3개를 던져 삼진 처리(공수교대), 다소 불안했지만 관중들은 겁 없는 1학년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쟤 너무 멋있잖아.’

그건 스즈에도 마찬가지, 가끔 눈물도 흘리고 도망치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건만 다카기는 퇴로를 끊고 위기를 극복해버렸다.

야구팬이 아니더라도 반할 수밖에 없는 장면, 왜 저 아이가 야구부의 기둥인지 이번 투구로 확실히 깨달았다.

‘나도 이젠 정면승부다.’

스즈에도 퇴로를 끊었다.

언젠가는 말을 걸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물쩍거리다 라이벌에게 기회를 주고 말았다. 잘 되든 못 되든 부딪쳐 볼 뿐, 다음 기회라는 어설픈 희망은 치워냈다.

결국 이날 경기는 6대 4 다이이치의 승리로 마무리,

최선을 다했지만 준결승전 벽을 넘지 못한 히라카시 야구부는 울분을 삼키며 대기실로 향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아니 이제 시작일 뿐이지, 울 것 없다.”

아라이 감독은 개인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학생들을 위로했다.

분명 아쉬운 결과지만 지역예선에서 탈락한 지난여름에 비하면 성과는 분명했다.

봄 고시엔까지 남은 시간은 충분, 히라카시 야구부가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를 훔치는 동안, 다카기는 기자들의 질문에 응했다.

“6대 4로 경기가 좁혀졌을 때 떨리진 않으셨습니까?”

“실점보다 관중들이 불안에 떠는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많은 분들에게 믿음을 주는 경기를 하고 싶은데, 오늘은 그게 잘 안 됐거든요. 반성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알면 알수록 매력이 넘치는 소년, 조금이라도 붙잡아두고 싶었다.

“오늘 다이이치가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히라카시의 추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정말 조금이라도 불안한 마음이 없으셨습니까?”

“저는 오히려 즐거웠습니다. 저희를 이기겠다는 간절함이 보였거든요. 발전은 혼자서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가능하면 상대팀들이 더 독기를 품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저도 자극을 받고 더 발전하겠죠.”

언제든지 추격을 뿌리칠 자신이 있다는 건가. 다카기의 인터뷰는 야구팬뿐만 아니라 전국 야구 소년들의 의욕에 불을 지폈다.

* * *

추계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일본 프로야구 12개 구단은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드래프트는 원래 6월 중순에 시작하지만, 올해부터 일정을 조정했다.

졸업시즌을 앞둔 학생이 진로를 두고 고민하는 건 당연, 이른 시기에 열리는 드래프트는 고교 신인의 프로 진출을 가로 막았다.

최근 대학 진학률이 부쩍 높아지면서 NPB 협회도 고민이 많은 게 사실, 팬들 역시 유망주들이 한 살이라도 이른 나이에 프로무대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길 원한다.

거기다 올해 마이키 요시토모, 나이토 젠스케, 이시다 토모카츠, 히라타니 요시오, 후지타 겐고로 등 등 쟁쟁한 고교신인들이 드래프트 자격을 얻으면서, 프로구단은 고교 신인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저희가 첫 번째 지명권을 받는다면 이시다 선수를 지목하겠습니다. 드래프트에 응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렇잖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고시엔 우승, U-18 세계 청소년대회에서 미국 대표 팀을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면서 이시다의 가치는 폭주, 프로야구 12구단 중 무려 7구단이 영입의사를 밝혔다.

이 정도면 억대 계약금도 꿈이 아니겠지,

원치 않은 팀이 지명권을 가져가도 대학에 진학해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되는 거 아닌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신청서 내셨어요?]

“그래, 그렇게 됐다”

이시다는 이 소식을 다카기와 공유했다.

인연이 있는 부원은 얼마든지 있는데, 왜 이 녀석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한 걸까?

잘난 후배가 야구부에 들어오면서 따라잡히면 안 된다는 부담에 시달렸지만, 덕분에 지난 1년 동안 급격한 성장을 이뤄낸 것도 사실, 고마움을 입으로 표현하긴 뭣하고 이렇게라도 마음을 전했다.

[앞서간다고 자랑하지 마세요. 저는 나이가 어려서 드래프트 신청서를 못 내는 것뿐이에요.]

“누가 뭐라고 했냐?”

민감한 반응에 이시다는 코웃음을 쳤다. 마지막까지 선배를 이겨먹으려는 건방진 후배, 그래도 넓은 마음으로 받아줬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신청서를 내셨네요?]

“그게 무슨 소리냐?”

[해외에서 영입 제안 안 왔어요?]

“ ··· 어”

다카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미국 청소년대표팀을 상대로 완봉승을 거둔 투수에게 영입제안이 없었다니, 도대체 메이저리그 구단의 콧대는 얼마나 높은 건가.

언젠가 기회가 되면 꺾어주고 싶다는 야망을 드러냈다.

“너는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자신감 빼면 제가 남는 게 있나요? 어쨌든 선배, 기왕 결심한 길 꼭 성공하세요. 기회가 되면 또 뵐게요.]

“그래 ··· ”

그렇게 끝난 통화, 다카기는 바로 야구부원들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평소 이시다 캡틴은 붙임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부원들에게 근황은 알려야겠고 그나마 제일 만만한 날 택한 거겠지, 동네방네 소문을 퍼트렸다.

[이시다 선배 드래프트 신청서 넣었데요. 다들 응원의 메시지 부탁드립니다.]

문자를 받은 후루타 감독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은 내게 먼저 보고해야 하는 것 아닌가? 3년 동안 애정을 준 감독을 제쳐두고 후배에게 연락을 하다니, 조금 서운했다.

‘이렇게 떠나보내는구나.’

야구부 지휘봉을 잡은 지 올해로 5년,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학생들이 이 손을 거쳐 갔다.

그 중 이시다는 유독 눈에 띄었던 녀석, 다이이치 야구부는 이제 고교야구의 태풍의 눈으로 부상했지만, 이시다가 암흑기를 버텨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영광도 없었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하자.’

후루타 감독은 3년 전만 해도 야구부에 큰 애정이 없었다.

야구를 취미 정도로 여기는 학생들과 학업을 우선하는 교내 분위기에서 엄격한 훈련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달리 불러주는 곳이 있거나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학생들만 적당히 관리하면 돈은 나오지 않는가? 그렇게 2년을 보내다 이시다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저 녀석은 뭘 저렇게 열심히 하지?’

부원들은 이시다를 별종 취급했다.

문제는 감독도 그랬다는 것, 부상 때문에 일찍 커리어를 접긴 했지만 후루타 감독도 선수시절은 누구보다 치열한 나날을 보냈다.

분명 저게 맞는 건데, 2년 동안 안일한 분위기에 휩쓸리면서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절의 열정마저 잃어버렸다.

‘그래 잊고 있었어.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매번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는 팀이지만 이시다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났고, 그 투지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노장의 의욕을 끌어냈다.

여기에 대학시절까지 프로 진출 꿈을 놓지 않았던 다나카 코치의 합류, 이시다를 필두로 한 부원들이 조금씩 성과를 내면서 야구부는 오늘의 영광을 이뤄냈다.

‘내가 야구부를 키웠다고? 아니, 가르침을 받은 건 나지.’

여론은 근본도 없는 야구부를 정상의 자리에 올린 후루타 감독의 지도력을 칭찬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서 소중한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도 적당히 돈만 받으면서 보신주의로 일관했겠지.

무의미한 인생에서 허우적거리던 중년을 구원해준 제자, 품에서 떠나보내는 건 쉽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