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새출발 - (14)
‘넘기면 돼’
히라카시의 4번 노토 히라키는 관중석을 노렸다.
상대의 내야수비가 단단해도 넘기면 그만, 마침 앞선 경기에서 홈런을 때려냈고 자신감은 충분했다.
‘승부해라.’
이때 다이이치의 다나카 코치는 도망치지 말라는 사인을 보냈다.
고교야구는 알루미늄 배트를 쓰기 때문에 힘만 좋으면 기술과 상관없이 장타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투수들이 제구에 집중하는 것, 낮은 공을 치려면 어쨌든 어퍼 스윙을 해야 하는데, 프로도 하기 힘든 기술을 학생들이 소화하긴 어렵다.
노토 히라키는 고교야구에서 나름 장타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게 과연 기술적인 장점 덕분일까, 낮은 제구만 유지하면 충분히 잡아낼 수 있는 상대, 코치의 지시대로 노무라(2학년)는 제구에 집중했다.
‘엇?’
낮게 떨어지는 커브, 주심이 스트라이크 콜을 하자 노토 히라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치고는 싶은데 성급히 건드리긴 어려웠던 공, 기선을 제압한 노무라는 바깥쪽 낮은 곳에 빠른 볼을 찔러 넣었다.
볼 판정은 받았지만 타자와 주심 모두 움찔했을 정도로 좋은 공, 분위기가 묘해지자 히라카시 벤치도 바쁘게 움직였다.
생각보다 뛰어난 노무라의 제구, 그렇다고 짧은 스윙을 할 건가.
다이이치 야구부의 장점은 단단한 내야수비와 투수진, 연속안타를 기대하긴 어렵다. 일발 장타에 고토부기의 주력에 기대를 걸어보는 게 현실적, 히라카시의 아라이 감독은 네 스윙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건 아닌 것 같아.’
하지만 노토 히라키는 전략을 수정했다.
감독님의 뜻은 이해했지만, 여기서 영웅 스윙을 하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그에 비해 넓게 열려 있는 내야구멍,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놓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예상했던 땅볼,
유격수 구역까지 침범한 다카기는 특유의 넓은 스텝과 부드러운 손목 스냅으로 타구를 낚아냈다.
히라키는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뛰었지만 결과는 아웃, 결국 히라카시의 1회 말 반격은 득점 없이 끝났다.
‘훈련이라면 누구보다 열심히 했어. 도대체 이유가 뭐지?’
기선 제압에 실패한 히라카시 선수단은 혼란에 휩싸였다.
지금 다이이치의 내야진을 책임지는 선수는 유격수 후쿠로를 제외하면 전부 1학년이다.
야구부 성적에 목숨을 거는 히라카시와 달리 다이이치는 학업을 중시하는 학교, 운동량이라면 당연히 이쪽이 우위다.
머릿수 차이는 말 할 것도 없는데, 지난여름부터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건가. 뭔가 잘못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와아아 ~ !!”
그렇게 경기는 흘러 3회 초 다이이치의 공격,
원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다카기가 타석에 들어서자 관중석은 환호로 들썩거렸다.
등장만으로도 뭔가 해 줄 것 같은 선수, 벤치에 앉은 다이이치 야구부도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존재만으로도 팀원들에게 이 정도 믿음을 주는 선수가 있었나, 지금까지 수많은 학생을 지도한 아라이 감독도 다카기만큼 그라운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선수는 보지 못했다.
‘우리가 지고 있는 원인은 너다.’
아라이 감독은 분위기 반전을 위해 다소 과격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저 녀석의 기를 꺾어놓지 않으면 분위기 반전은 불가능, 여론의 욕을 먹는 건 감수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뒷수습 어떻게 하려고?’
벤치 사인을 받은 카와츠미는 당황했다.
상대는 일본의 U-18 우승을 이끈 슈퍼스타, 이런 선수에게 빈볼을 던지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할 건가. 물론 감독님이 날 지켜주겠지만 사람을 노리고 공을 던지는 건 처음, 여린 마음에 차마 그렇게 할 순 없었다.
‘멍청한 녀석, 넌 그런 배짱도 없는 거냐.’
결과는 볼넷, 아라이 감독은 바로 투수를 교체했다.
1실점을 하긴 했지만 2회 만에 선발 투수를 내릴 줄이야, 중계석 마이크를 잡은 해설위원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는 동안 카와츠미는 고개를 숙인 채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야구를 정말 사랑하지만 히라카시 유니폼을 입은 게 후회되는 건 이번이 처음, 빈볼 사인을 거부한 게 질책성 교체로 이어질 일인가.
여름까지 야구를 할 원동력을 잃어버렸다.
‘나라도 정신 차리자.’
급격히 흔들리는 팀 분위기, 이 와중에도 히라카시의 포수는 곁눈질로 1루를 살폈다.
타석에 선 모토바시는 우타, 시야가 열려 있어 1루 주자의 움직임은 훤히 보인다. 거기다 마운드에 오른 니시가타는 좌투, 다카기의 발이 아무리 빨라도 대놓고 2루를 노리기는 어렵다.
지금은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할 때, 다카기도 이렇다 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안 뛰냐?”
1루수 노토 히라키는 다카기의 속을 긁었다. 제 딴엔 상대의 속을 긁겠다고 한 말이겠지만, 돌아온 답에 뒤통수를 강타 당했다.
“너 고시엔 몇 경기 나가봤냐? 세계대회는 경험해 봤어?”
“ ········· ”
“아무 것도 모르면 조용히 있어. 난 너 같은 초심자하고 놀아줄 레벨이 아니야.”
히라키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2학년이 1학년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가, 그래도 야구 경험이라면 이 녀석이 선구자, 애송이 취급을 당해도 할 말이 없어.
‘포구가 좀 불안정한데’
이 와중에도 다카기는 포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니시가타는 분명 씩씩한 투구를 하고 있다.
하지만 히라타니처럼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는 폼이라, 주자가 있는 상황이라면 포수는 폭투에 대비해야 한다.
그렇다면 도루에 대한 경계심은 상대적으로 낮아지겠지, 리드 폭을 넓게 벌리진 않았지만 만일의 상황에는 대비했다.
“떨어지는 볼! 막아냅니다!!”
“지금은 위험했네요. 포수 앞에 떨어졌기에 다행이지, 지금 1루 주자는 여차하면 뛰려고 했어요.”
허겁지겁 공을 잡은 이시하라 포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때론 빠른 볼 보다 스핀이 많이 걸린 변화구가 폭투가 될 위험이 더 높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 옆으로 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이러면 빠른 볼 던져야 되는데’
주자가 안 뛸 거라고 믿고 던진 결정구가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이야,
모토바시가 유인구를 골라내면서 히라카시의 선택폭은 더욱 좁아졌다.
까앙 ~ !!
“자 ··· 이 타구는 우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1루 주자는 2루를 지나 3루까지!! 1사 주자 1 - 3루!! 다이이치가 달아날 기회를 잡습니다!!”
“히라카시는 뭔가 안 풀리네요. 지금까지 딱히 두드러진 실책은 없는데, 다이이치가 모든 면에서 한 발 더 앞서나가는 느낌입니다.”
해설위원의 지적대로 히라카시는 점점 궁지에 몰렸다.
지금까지 실수가 없는데도 리드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건, 실력에서 밀리고 있다는 뜻 아닌가.
운이 없을 뿐이라는 혼잣말도 도움이 안 되는 상황, 평소 자신감이 넘치던 니시가타도 이런 분위기에서 냉정을 유지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가라.’
벼랑 끝에서도 아라이 감독은 정면승부를 철회하지 않았다. 땅볼 하나면 병살, 니시카타의 투구스타일은 땅볼 유도에 적합하지 않지만, 몸 쪽으로 붙여 땅볼을 유도하는 볼 배합을 지시했다.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네.’
후루타 감독은 타석에 선 후쿠로에게 기다리라는 사인을 보냈다.
저렇게 공을 위에서 찍어 내리는 투수는 좌우 제구가 어렵다. 안 되는 걸 억지로 하게 하다니, 얼마나 다급했으면 저런 작전을 구사할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니시카타는 초구부터 몸 쪽 공을 박아 넣었다.
‘기다려라’
후쿠로는 감독의 지시대로 2구도 기다렸다.
이번엔 낮게 깔리는 볼, 다행히 빠지진 않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가는 히라카시 벤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번에도 낮게 들어옵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지금 후쿠로 선수는 칠 마음이 없는 것 같은데, 과감하게 넣어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아직 볼 카운트에 여유가 있어요.”
니시카타는 4구를 한 가운데에 집어넣었다(2볼 2스트라이크).
한시도 긴장을 놓칠 수 없는 줄타기, 한동안 잠잠했던 히라카시 응원석이 들썩이자 다이이치 응원단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왜 볼이야?!!”
“심판 파이팅 ~ !!”
“정확한 판정이에요!!”
5구가 볼 판정을 받자 히라카시 응원석에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이에 맞서는 다이이치의 미소녀 군단은 환호를 보내면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지만, 보호마스크 뒤에 숨은 심판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까앙 ~ !
“타격!! 유격수 잡아서 홈으로!! 아 ~ 이게 뭔가요.”
“글쎄요. 일단 고토부키 선수가 홈 승부를 택했는데 ··· 최악의 결과가 되고 말았네요.”
뒤로 빠진 송구, 주심의 세이프 선언, 그 사이 한 베이스 씩 차지한 주자들, 최악의 상황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히라카시 응원석은 침묵에 휩싸였다.
‘무너졌군.’
세이프 판정을 받은 다카기는 사건현장을 뒤로 하고 벤치로 향했다.
3회까진 팽팽한 경기를 했는데, 순식간에 무너져버린 지역 라이벌, 특히 히라카시의 캡틴 고토부기가 강한 승부욕을 보였기에 좋은 경기가 될 것 같다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 캡틴이 대형 실책을 저질렀으니 다른 선수들도 영향을 받겠지, 아직 이닝은 많이 남아 있지만 대등한 승부가 될 거란 기대는 물 건너갔다.
‘내가 왜 그랬지.’
한편 고토부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누가 봐도 홈 승부는 늦었는데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빠진 송구를 잡겠다고 몸을 날린 포수가 땅바닥을 치며 울분을 토하는 모습에 죄책감은 더욱 깊어졌다.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 따라갈 수 있어.”
최악의 상황이 나왔지만 아라이 감독은 선수들을 독려했다.
다행히 니시가타는 후속타자를 잘 처리하면서 위기를 넘겼고, 히라카시는 3회 말 공격에서 선두타자 이시하라의 2루타를 시작으로 추격의 무드를 형성했다.
‘다행이군. 아직 싸울 기운이 남아 있어서’
이 와중에도 다카기는 미소를 지었다.
히라카시는 지난 지역예선에서 맞붙었지만 지금처럼 절박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이이치는 당연히 잡고 간다고 생각했을 텐데 히라타니의 부상에 경기가 꼬이면서 허망하게 무너졌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겠는가.
오늘도 초반부터 경기가 꼬이면서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을까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며 피식거렸다.
‘생태계는 균형이 중요한 법이지. 너희들도 얼른 강해지라고’
다카기는 다이이치가 오사카의 패권을 쥐락펴락 하는 시나리오는 바라지 않았다.
포식자가 강한 이빨을 장착하면 먹잇감들도 살아남는 길을 찾는 법, 그렇게 생물은 서로 먹고 먹히며 진화했다.
그렇게 서로 자극하면서 발전하는 것 아니겠나? 쉽게 살점을 내주는 먹잇감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까앙 ~ !!
“이번에는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히라카시가 첫 득점을 올립니다!!”
“반격의 신호탄인가요? 뭔가 흐름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이이치도 순순히 추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발 쫓아오면 한발 도망치며 격차를 유지, 6회까지 이런 흐름이 반복되면서 스코어는 6대 3,
7회가 되자 후루타 감독은 예정대로 다카기를 마운드에 올렸다.
이번 대회에서 15와 1/3이닝 동안 한 점도 내주지 않은 철벽, 다카기는 6회까지 마운드를 지킨 우에노 - 노무라와 차원이 다른 구위를 선보였다.
“들어왔다는 판정입니다!! 삼진!! 오늘 2안타를 치고 있는 이시하라를 삼구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지금은 슬라이더를 생각한 것 같은데, 바로 승부가 들어왔죠. 이렇게 되면 히라카시 선수들은 배트가 안 나올 수가 없어요.”
빠른 볼을 결정구로 활용하면서 다카기는 슬라이더 위력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제구가 되는 파워 피처가 슬라이더를 장착하면 어떻게 되는지, 히라카시 야구부는 그 절망적인 위용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