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새출발 - (13)
추계대회도 어느덧 준결승전에 이르렀다.
이 자리는 고시엔을 위한 세대교체의 장, 하지만 지난여름 다이이치에게 충격의 패배를 당한 히라카시는 이 경기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웃기시네.’
히라카시 팬들은 다이이치의 시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92년 동안 28번이나 고시엔에 진출, 우승 9회 준우승 3회라는 업적을 남긴 우린 안중에도 없는 건가.
고작 1회 우승한 다이이치를 띄워주는 여론이 마음에 안 들었다.
[히라카시? 17년 동안 우승 못했잖아. 이젠 구시대의 허상일 뿐이지]
-> 남은 건 옛 명성뿐, 최근 전적만 따져보면 키타마치가 한 수 위다.
-> 그런데 이번에 키타마치 또 떨어졌던데, 얘들도 이젠 힘이 떨어진 듯
-> 지금은 다이이치가 오사카 최강이다. 뭣보다 다카기가 있잖아.
-> 다카기 뿐일까? 요즘 무서운 애들 많던데
-> 모토바시, 토모사다 다 1학년이다. 여기에 다카기까지, 다이이치는 1학년들이 잘해주고 있다는 게 더 무섭지. 여기에 요시다, 노무라, 후쿠로, 상급생들 전력도 탄탄하다. 당분간 누구도 넘기 어려울 걸?
하지만 여론의 판단은 냉정했다.
고시엔 이후, 다이이치 야구부는 후루타 감독의 지도하에 전력을 잘 정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근본도 없던 야구부를 이렇게 키워 내다니, 기자들은 후루타 감독의 지도력에도 관심을 보였다.
“감독님, 요즘 다이이치가 굉장한 상승세를 타고 있는데 그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음 ··· 글쎄요. 승리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지금 연승을 달리고 있다고 상대를 얕잡아 본다면 패배로 가는 지름길이죠. 경기 전에도 학생들에게 그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게 집중력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후루타 감독의 인터뷰는 자신감과 냉정함이 오묘한 균형을 유지했다.
지휘봉을 잡은 지 5년이 넘었지만 이렇게 좋은 흐름을 탄 건 처음, 하지만 승패가 늘 공존하던 프로의 세계를 경험한 역전의 용사는 자만심을 늘 경계했다.
“히라카시는 절대 약한 팀이 아니다. 지난 지역예선의 승리는 잊어라.”
“예!!”
경기를 앞둔 대기실에서도 정신무장 교육은 계속됐다.
학생들은 형식적인 대답으로 감독의 걱정을 받아넘겼지만, 다카기는 딴생각을 품었다.
‘자신감은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법이지, 지금은 치고 나갈 때야.’
자만과 자신감은 종이 한 장 차이, 한창 기세가 오른 1학년들에게 자만하지 말라는 충고가 먹혀들까.
감독의 눈을 피해 동료들의 자신감을 부추겼다.
“오늘도 한 10대 0으로 밟아주자.”
“야, 너 그런 말 함부로 해도 되는 거냐?”
“못할 것도 없잖아, 우리 마음에도 없는 약한 척은 하지 말자고”
1학년들은 그 흐름에 동참했다. 이미 여론은 다이이치를 오사카, 더 나아가 일본 최강으로 띄워주고 있다. 최강팀에게 필요한 건 겸손이 아니라 자신감, 뭣보다 확실하게 중심을 잡아주는 선수가 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히라카시!! 히라카시!!”
“다이이치!! 다이이치!!”
경기 시작 전부터 양 팀 응원단은 양보 없는 기싸움을 펼쳤다.
오사카 최대 규모의 관현악단을 보유한 히라카시는 경기 전부터 공격적인 응원을 펼쳤고, 이에 맞서는 다이이치의 미소녀 군단도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과시했다.
고시엔 본선에 못지않은 신경전, 분위기에 취한 일반 관중들도 목소리를 높이면서 야마자키 시립 구장은 지진에 맞먹는 격동에 휩싸였다.
“자!! 준결승전!! 다이이치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토모사다 이치로, 이번 대회에서 28타수 9안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두 경기에선 안타가 없었는데, 기세를 타더니 거침이 없죠.”
토모사다는 독특한 자세로 초구를 맞이했다.
무게 중심이 1루로 쏠리는 건 고교야구 선수들의 전형적인 문제점, 토모사다도 다를 게 없었지만 감독의 조언에 따라 자세를 수정했다.
‘나 22번이다.’
어깨를 극단적으로 닫아 등번호가 투수에게 보일 정도, 이런 자세는 배트가 스피드가 늦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심이 1루로 쏠리는 문제가 해결됐고, 토모사다는 전보다 강한 타구를 날릴 수 있게 됐다.
“너는 빠른 볼을 노리고 들어가라. 지금 타격에 익숙해지면 변화구도 대응할 수 있을 거다.”
“예”
배트 그립이 마지막까지 뒤에 남아 있는 자세, 변화구가 날아와도 어떻게든 커트해 냈다.
말은 쉽지 오늘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가.
도우묘 고교 야구부와의 연습경기에선 4타석에서 안타 하나 뽑아내지 못했다. 일개 야구부 클럽을 상대로도 이 지경인데, 본선 경기에서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추계대회 첫 2경기에서 8타수 무안타에 그쳤지만, 후루타 감독이 꾸준히 기회를 주면서 토모사다는 실력과 자신감을 겸비하게 됐다.
까앙 ~ !!
“밀어낸 타구, 막았지만 던지기엔 늦었습니다!! 선두타자 출루!! 다이이치가 산뜻한 출발을 알리고 있습니다!!”
“안타가 됐지만 지금은 고토부키 선수가 판단을 잘 했네요.”
해설위원은 히라카시의 캡틴 고토부키의 냉정한 판단을 높이 평가했다.
유격수라는 포지션은 왜 생겼을까, 야구 초창기만해도 유격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공이 물렁거려 타구가 나가지도 않는데, 2루와 3루 사이에 야수를 배치하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야구공이 단단해지면서 2루수는 1루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2루수와 3루수 사이의 거리가 넓어지면서 그 빈 공간을 채워줄 유격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즉, 유격수는 이전보다 강하고 멀리 날아가는 타구를 막기 위해 등장한 포지션, 당연히 막는 게 우선이고 송구는 그 다음이다.
그런데 송구부터 생각하는 유격수들이 있다.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이해조차 못한 초짜들, 당연히 의욕만 앞세운 송구미스와 실책으로 팬들의 뒷목을 잡게 한다.
그에 비해 고토부키는 무리한 송구 따윈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수비 범위가 이 정도라는 걸 보여줬을 뿐, 선두타자가 나갔지만 다이이치도 득점을 장담하긴 일렀다.
“와아아 ~ !!”
“다카기!! 다카기!!”
하지만 다이이치 팬들은 득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2번이 강했다면 후루타 감독도 다카기를 계속 3번에 배치했겠지만, 이번 대회에서 다이이치는 2번 타율이 0.105에 그치고 있다.
다카기에게 찬스를 넘겨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작용한 걸까? 무수한 실험과 실패를 거듭한 후루타 감독은 다카기를 2번에 배치했다.
‘여기로 오면 내가 다 막는다.’
히라카시의 선발 카와츠미(2학년)은 고토부키의 격려를 받았다.
하지만 천재라 불린 히라타니 선배도 넘지 못한 저 괴물을 내가 상대할 수 있을까, 캡틴의 격려도 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까앙 ~ !!
“라인 안쪽에 떨어집니다!! 1루 주자는 2루 돌아 3루!! 우익수가 공을 더듬는 사이 홈으로!! 타자 주자는 2루에 멈춥니다!! 적시 2루타!! 다카기 선수가 다시 한 번 팬들의 기대에 부응합니다!!”
“징크스고 뭐고 없네요. 다이이치가 이번 대회에서 2번 타율이 0.105밖에 안 되는데, 이 선수는 어떤 자리에서도 제 역할을 해냅니다.”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갈채에도 다카기는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 경기를 지배하고 싶은 건 히라카시도 마찬가지, 한 방 맞았다고 도망칠 상대라면 독기를 품지도 않았다.
‘여기서 승기를 잡자.’
후속 타자 모토바시 테츠야의 마음가짐도 다르지 않았다.
상대는 절대 약한 팀이 아니다. 히라타니, 이마이가 은퇴했다고 해도 히라카시는 기숙사까지 두고 전문적인 훈련을 하는 야구 강호,
이런 팀을 상대로 우위를 점한다는 건 우리가 그만큼 강하다는 뜻 아닌가. 강한 상대일수록 초반에 기선을 제압해야 하는 법, 2루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는데 집중했다.
‘이런 쓸모없는 자식’
카와츠미를 향한 고토부키의 시선은 경멸에 가까웠다.
이렇게 중요한 경기에서 선택을 받았다는 건 그만큼 감독의 기대가 크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딴 식으로 경기를 하다니, 하필이면 이때 다카기가 끓는 가슴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너희들이 우릴 이기고 싶어 하는 건 알겠는데, 가능성이라도 있는 놈을 내보내라. 저게 너희들의 최선책이냐?”
1학년이 상급생에게 이게 무슨 말버릇인가, 그래도 고토부키는 화를 억눌렀다. 승부의 세계에 위아래가 어디에 있나. 말려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철저히 무시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무시당했지만 다카기는 나름 만족했다.
냉정을 유지한다는 건 발악할 의지가 살아있다는 뜻, 상대가 승부를 포기한 게임은 이쪽도 바라지 않았다.
카와츠미는 결국 한 점을 더 내주고 1회 초를 마무리, 승리를 외치던 응원석은 물론 반격을 준비하는 히라카시 벤치도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너하곤 말도 섞기 싫어.’
고토부기 세이치는 카와츠미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승리를 위해 악역을 자처했다 해도 너무 극단적인 행동, 눈치를 살피던 아라이 감독은 분위기를 수습했다.
“아직 1회다. 기죽지 말고 차근차근 풀어나가자.”
“예!!”
1회 말 히라카시의 반격, 우에노 료스케(2학년)가 다이이치의 마운드를 책임졌다.
에이스 요시다를 매일 굴릴 순 없는 노릇, 후루타 감독은 우에노 - 하네다 - 다카기가 각자 3이닝을 책임지는 방책을 들고 나왔다.
다카기는 이번 추계대회에서 15와 1/3이닝 동안 삼진 24개를 뺏어냈다.
계투로 나왔다고 쳐도 비상식적인 탈삼진율, 그만큼 슬라이더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경기 중반까지 리드를 지키면 다이이치의 승리는 거의 확실, 전문가들도 비슷한 전망을 내놨다.
‘3 ~ 4점 이내로 막자.’
우에노 료스케는 내야진을 믿었다.
다카기의 포지션 변경은 정말 다이이치 내야진에 구멍을 낸 걸까. 여론의 염려와 달리 현실은 정반대였다.
미국이나 남미에선 3 - 유 방향에 강한 타구가 집중되기 마련, 당연히 3루수의 스텝은 좌우로 움직인다.
하지만 번트와 밀어치는 타구가 많은 아시아 야구에서 3루수는 전진스텝이 요구된다. 다카기는 원래 유격수 출신이라 전진스텝이 좋은 편, 여기에 강한 어깨와 큰 손까지 갖춰 맨손 캐치도 곧잘 해냈다.
넓은 수비 범위는 덤, 여차하면 유격수 수비 범위까지 커버할 수 있는 선수라 다이이치의 내야진은 고시엔 우승을 차지했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자, 1회 말 히라카시의 반격입니다. 선두타자는 우치카와, 이번 추계대회에서 타율 0.353, 홈런 없이 3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히라카시 타선에 좌타자가 6명이거든요. 특히 우치카와 선수는 밀어치는 타격에 능한 선순데, 다이이치의 두터운 내야진을 뚫어낼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네요.”
까앙 ~ !
“초구 타격!! 하지만 3루수 정면입니다!! 다카기 선수의 좋은 수비!!”
“말씀드리자마자 이러네요. 지금도 좋은 타구였는데, 힘이 부족해요.”
해설위원은 히라카시 야구부를 동정했다.
히라카시는 누구보다 기본에 충실한 야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저 단단한 방어막을 뚫어내려면 강한 타구를 날려야 하는데, 그런 타격을 할 수 있는 선수가 고교야구에 몇 명이나 되겠나.
다카기가 생태계를 파괴하는 변종괴물일 뿐, 아라이 감독의 방식이 잘못됐다고 할 순 없었다.
깡 ~
“다시 밀어 친 타구! 이번에도 걸립니다!! 1루에서 아웃, 순식간에 2아웃입니다.”
“여유가 있네요. 지금도 한 박자 늦게 던지잖아요.”
다카기의 시간 차 송구는 히라카시 벤치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번엔 글러브를 맞고 나왔는데 저렇게 여유 있는 송구가 가능하다니, 좌타자들이 밀어치는 타격에 부담을 느낀 건 당연했다.
까앙 ~ !!
그래도 캡틴이라고 고토부키 세이치는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구멍이 넓은 2루 방향을 노렸고 결과는 유격수 옆을 빠져나가는 안타, 유격수 후쿠로가 도루에 대비해 2루로 자리를 옮기면서 다이이치의 내야구멍은 더욱 넓어졌다.
‘놓치지 않겠다.’
다카기는 나름대로 덫을 펼쳤다.
히라카시 타자들이 노리는 구멍이 뻔히 보이는데, 그냥 두고 볼 바보가 어디에 있나.
어디 도망쳐 보라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