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새출발 - (12)
“다카기 선수가 천천히 2루에 안착합니다. 오늘 2안타 경기, 분명 대단하긴 한데 별 감흥이 안 나네요.”
“하하 ~ 그러게 말입니다.”
중계석은 마침 카메라에 잡힌 다카기를 두고 대화를 이어갔다.
3타수 2안타면 제 몫은 다했다고 할 수 있는데, 지난 여름부터 가을까지 일본 열도를 뒤흔든 괴물의 활약은 너무도 강렬했다.
이 정도 활약은 자극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 다카기도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거 되게 신경 쓰이네.’
뒤통수가 근질거렸는지 츠치우라의 선발 긴지로는 2루를 응시했다.
다카기는 발도 빠른 녀석, 지난 고시엔에서도 3루 도루에 홈 스틸까지 해 버린 경력이 있으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주자에 한 눈 팔다 사인을 잠시 놓쳐버렸고 이건 재앙으로 이어졌다.
“아 ~ 지금은 공이 빠졌습니다!! 그 사이 2루 주자는 3루까지!! 다이이치가 무사 주자 3루 기회를 맞이합니다!!”
“지금은 변화구를 요구한 것 같은데 빠른 볼이 들어왔죠. 그래도 멀리 튀진 않았는데, 타쿠야 선수의 플레이가 신속하질 못했습니다.”
츠치우라의 포수 미네미 타쿠야는 씩씩 거리며 마운드로 향했다.
분명 변화구 사인이었는데 들어온 건 빠른 볼,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냐며 긴지로를 몰아세웠다.
“넌 이 상황에서 그런 볼 배합을 하고 싶냐?”
물론 긴지로도 할 말은 있었다.
다카기라면 몰라도 모토바시는 승부를 피할 상대가 아니다. 그런데 초구부터 변화구를 던질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타쿠야의 생각은 달랐다.
무사 주자 2루에서 안타 한 방이면 바로 실점, 1루가 비었으니 신중한 승부를 한다고 나쁠 건 없지 않은가. 그러나 긴지로는 자기 고집만 부렸다.
“아 됐어. 어쨌든 이제 주자 3루니까 변화구 요구하지 마.”
타쿠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보는 눈만 없다면 한 판 치고받았을 텐데, 경기 속행을 요구하는 주심의 지시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욕심 부리지 말자.’
고교 커리어 첫 타점을 눈앞에 둔 모토바시도 떨리는 마음을 붙들었다.
느린 땅볼만 굴려도 득점, 하지만 이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위기 상황에서 투수가 구속을 끌어올리는 건 당연, 실전경험이 부족한 애송이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아차’
타이밍이 전혀 안 맞으면서 헛스윙, 곁눈질로 타자의 눈치를 살피던 타쿠야 포수는 변화구를 요구했다.
빠른 볼 신경 쓰다 변화구에 따라 나오는 건 흔한 패턴, 변화구 요구하지 말라고 씩씩 거리던 긴지로도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낮은 볼 참아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지금은 변화구로 카운트를 잡고 빠른 볼로 승부를 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빠른 볼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또 변화구가 들어올 가능성은 낮아요.”
모토바시는 심호흡으로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음에야말로 빠른 볼이겠지, 하지만 초구에 헛스윙을 했으니 쳐낼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까앙 ~ !!
‘응??’
가볍게 밀어냈는데 생각보다 멀리 가는 타구,
본인이 이뤄낸 결과를 믿기 어려운지 모토바시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3루에서 상황을 살피던 다카기는 태그 업, 경기 시작 1시간 7분 만에 다이이치가 선취점을 냈다.
“잘했다!!”
후루타 감독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제자들을 격려했다.
하지만 모토바시는 뭔가 아쉬운 표정, 벤치에 앉아 손에 남아 있는 찌릿한 전율을 되새겼다.
‘아깝다. 안타가 될 수도 있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야구를 해왔지만 이런 감촉은 처음,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물렁한 연식 야구공을 두들겼다.
경식 야구를 접한 건 올해가 처음, 경험이라고 해봤자 교체 선수로 몇 경기 나선 게 전부다.
오늘은 첫 스타팅 출전, 연이은 범타에 실책까지 저지르면서 어깨가 위축됐지만 고교야구 커리어 첫 타점을 올리면서 자신감을 회복했다.
내친 김에 안타도 쳐봤으면 좋겠는데, 결과를 내면서 타석에 대한 부담감은 의욕으로 바뀌었다.
‘너는 안 뺀다.’
경기는 흘러 8회 말, 다이이치는 아슬아슬한 리드(1대 0)를 지켜냈다.
흐름상 오늘은 많은 점수를 기대하기 어려운 경기, 후루타 감독은 7회까지 버텨준 요시다를 내리고 다카기를 마운드에 올렸다.
3루가 비었으니 내야진 개편이 불가피한 상황, 그래도 모토바시는 1루에 놔뒀다. 한창 의욕이 올랐을 텐데 여기서 빼면 얼마나 실망이 클까,
섣부른 교체는 하지 않았다.
깡 ~ !
“타격!! 1루수 잡아서 베이스 터치합니다. 원 아웃! 다카기 선수가 첫 타자를 공 두개로 처리합니다.”
“타격에 가려서 그렇지, 피칭도 수준급이죠. 지난 고시엔에서도 계투로 나와서 단 한 점도 내주질 않았습니다.”
다카기는 스트라이크 존을 적극 공략하며 맞춰 잡는 투구를 했다.
투구 폼은 사이드 암, 횡적 움직임에만 의존했다면 타자들이 쉽게 쳐냈겠지만 마지막에 가라앉는 궤적 덕분에 정타는 나오지 않았다.
‘굳이 팔각도를 바꿔가며 던질 필요는 없다.’
다카기는 코치의 조언대로 무리하게 투구에 변화를 주진 않았다.
빠른 볼을 더 빠르게 던지겠다고 팔을 올려봤자 무브먼트는 그만큼 떨어지기 마련, 뭣보다 그런 식으로 투구를 하면 부상을 당하기 쉽다.
구속은 지금처럼 139 ~ 144km 사이에서 형성되면 충분, 사이드 암이 이 정도면 프로 뺨치는 수준 아닌가. 다나카 코치는 빠른 볼보다 슬라이더를 갈고 닦으라는 조언을 건넸다.
‘다 내 귀한 새끼들인데, 깨물어서 안 아픈 구종 없다고’
다카기는 이번 가을부터 체인지업을 최소화했다.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고시엔에서 많은 재미를 봤지만, 다나카 코치는 이런 투구가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계투로 나올 건데 굳이 그걸 던져야겠냐?”
다카기는 앞으로 선발보다 계투로 투입될 예정이다.
계투는 탈삼진률을 높이는 게 유리, 사이드 암 투수가 삼진을 잡겠다면 슬라이더로 충분한데 체인지업을 던질 이유가 있을까?
뭣보다 다카기의 체인지업은 떨어지는 폭이 크다. 위기 상황에 투입됐다가 폭투가 나오면 재앙, 포구 능력이 좋은 시노자키가 있었다면 던지게 놔뒀겠지만, 재정비에 돌입한 다이이치는 선수진이 대폭 개편됐다.
투구 폼에 어울리고 배우기도 쉬운 슬라이더를 연마하는 게 훨씬 유리, 다나카 코치의 판단은 멋지게 맞아떨어졌다.
“스윙!! 헛칩니다.”
“지금 슬라이더는 우타자 입장에선 당황스럽겠네요. 꺾이는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츠치우라 타자들은 패스트볼, 슬라이더 조합에 나가떨어졌다.
슬라이더는 횡 변화를 강조하는 변화구지만 떨어지는 움직임도 적지 않다. 스플리터가 등장하면서 한때 슬라이더의 자리를 위협하기도 했지만, 떨어지기만 하는 단순한 궤적은 금세 약점을 드러냈다.
왜 슬라이더가 오랫동안 투수들에게 사랑을 받았겠는가. 다카기는 그 이유를 결과로 증명했다.
‘이거 슬라이더 맞아?’
츠치우라 벤치는 급히 좌타자 오노 센이치를 투입했다.
사이드 암 투수가 좌타자에게 약점을 보이는 건 상식, 뭣보다 우투수가 던지는 슬라이더는 우타자를 잡아내는 최종병기다.
하지만 다카기의 슬라이더는 좌타자 발등으로 떨어지는 궤적을 그렸다. 이런 무브먼트에 좌우 놀이를 하는 건 무의미, 대타 투입은 4구 삼진으로 막을 내렸다.
‘저 녀석은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
퇴장당한 감독을 대신해 츠치우라의 지휘봉을 잡은 오노다 코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대로 연구를 하고 나왔는데, 몇 달 사이 저 녀석의 투구 패턴은 완전히 달라졌다.
저렇게 위력적인 슬라이더를 그 짧은 기간에 익혔다는 건가.
아니, 아마 처음부터 던질 줄 알았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야구가 저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거라면 지금까지 피땀을 흘린 제자들의 노고는 뭐가 되나, 이닝을 마무리하고 마운드를 내려가는 승자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결과에 비해 다카기의 표정은 덤덤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쓸 수 있는 체인지업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후루타 감독도 얼마 전까진 다카기를 에이스로 키울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맞춰 잡는 투구에 유리한 체인지업을 연마하도록 내버려뒀지만, 육성 방향이 계투로 바뀌면서 체인지업도 빛을 잃었다.
진화가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 이뤄질 순 없는 법, 때론 후퇴도 하고 방향도 바꿀 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한 다카기는 변화를 받아들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래도 난 두들기는 게 좋아.’
9회 초, 다이이치의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 다카기는 네 번째 타석을 맞이했다.
투수도 재미가 없는 건 아닌데 역시 마음이 가는 건 타격, 선수층이 얇은 야구부 사정 때문에 투수도 겸하고 있지만 전력만 갖춰지면 이쪽에 집중하고 싶었다.
“다시 바깥쪽,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츠치우라도 성급하게 승부를 걸긴 어렵겠죠. 다카기 선수의 구위를 봤을 때 여기서 한 방 나오면 츠치우라는 정말 어려워집니다.”
까앙 ~ !!
“3구 타격!! 멀리 가지만 우익수 정면입니다. 다카기 선수의 4번 째 타석은 범타로 막을 내립니다.”
“4타수 2안타면 잘했는데, 역시 뭔가 아쉽네요. 제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건가요?”
종착점을 확인한 다카기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바뀐 투구 패턴은 나름 성과가 있었는데 힘을 빼고 치는 타격은 아직 미완성, 다음 기회를 기약했다.
그건 후속타자 모토바시 테츠야도 마찬가지, 2구를 힘껏 잡아당겼지만 유격수 땅볼이 되면서 고교 커리어 첫 안타는 다음 기회로 미뤘다.
이날 경기는 다이이치의 1대 0 승리로 끝났고, 기자들은 투타에서 활약한 다카기를 집중 조명했다.
“다카기 선수, 투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하셨는데, 오늘 결과에 만족하십니까?”
“만족할 부분도 있었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제가 보기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신 것 같은데 ··· ”
“제가 부족하다고 느꼈다면 그런 거죠. 뭣보다 현재에 만족하면 성장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보다는 더 나은 내일이 돼야겠죠.”
질문을 던진 기자는 입을 다물었다.
고시엔에 세계대회까지 거머쥔 선수가 이런 말을 하다니, 어린 선수지만 경외심마저 들었다.
“지금 본인에게 가장 부족한 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저는 이기는 경기보다 지는 경기를 더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무서울 정도로 이기는 경기만 반복하고 있죠, 저도 그렇지만 지금 부원들은 지는 분위기에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다이이치는 지난여름 고시엔부터 19연승(연습경기 포함)을 달리고 있다.
미끄러져도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출발할 수 있을까. 중학교 시절, 누구보다 많은 패배를 경험했기에 다카기는 패배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저희들에게 부족한 건 승리를 향한 욕망입니다. 더 욕심쟁이가 돼야 하는데, 요즘 계속 이기다보니 독기가 많이 빠진 것 같네요. 더욱 완벽한 승리를 위해 앞으로 더욱 독해지겠습니다.”
그 독기가 팀원들에게도 전염된 걸까.
다이이치는 다음 경기에서 10대 2, 대승을 거뒀다.
다카기는 5타석 3타수 2안타(2타점), 2볼넷을 기록하며 타선을 이끌었고, 모토바시 테츠야는 고교 커리어 첫 안타 포함 2안타 4타점을 올리며 타선의 기둥으로 떠올랐다.
3학년들이 대거 은퇴한 다이이치의 상승세가 한 풀 꺾일 거라 예상했던 전문가들은 입을 다물었고, 여론도 새 시대의 도래를 의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