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새출발 - (11)
여름 고시엔 그리고 U-18 대회 우승에 달아올랐던 일본 열도, 그 열기는 추계대회로 이어졌다.
다이이치의 첫 상대는 츠치우라 고교, 첫 두 타자를 가볍게 잡아낸 츠치우라의 에이스 카네다 긴지로(2학년)는 끝판 왕을 맞이했다.
‘너만 잡으면 내 명성은 단숨에 올라가겠지.’
고시엔, 세계대회 우승을 동시에 달성한 다카기는 이제 모든 야구소년들의 동경이자 넘어서야 할 목표가 됐다.
꿈의 무대는 아니지만 이렇게 승부를 하게 된 것도 영광, 긴지로는 승부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
‘허튼 짓 하지 마라.’
물론 츠치우라의 포수 미네미 타쿠야는 동의하지 않았다.
다카기를 제외하면 다 고만고만한 다이이치의 타선, 여기서 승부를 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성급한 승부로 경기를 망치고 싶진 않았다.
‘조금 더 뒤로, 아니 더 뒤로’
다카기는 등장만으로 츠치우라 벤치를 흔들었다.
고시엔 진출을 위해 본격적으로 야구를 하는 곳은 웨이트 트레이닝 실을 갖추고 있지만, 그렇게 애를 써도 강한 타구는 거의 안 나온다.
그게 고교야구의 현실, 그런데 저 녀석은 쳤다하면 강한 타구다. 여론의 말대로 규격 외의 파워를 지닌 선수, 츠치우라의 감독은 내야진까지 뒤로 물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극단적이잖아.’
츠치우라의 유격수 이카다 리쿠(3학년)는 이 작전에 동의하지 못했다.
특히 유격수 방면은 느리고 깊숙한 타구가 많이 나오는 편, 이러다 느린 타구가 나오면 누구에게 하소연 할 건가. 벤치 눈치를 살피다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까앙 ~ !!
“정면!! 공이 높게 튀었습니다!! 그 사이 다카기 선수는 1루에!! 첫 타석부터 인상적인 타격을 선보입니다!!”
“지금은 워낙 강한 타구였죠. 일단 막긴 했는데 아 ··· 부상인가요?”
경기 초반부터 사고가 발생했다.
이카다 리쿠는 바운드에 맞춰 글러브를 들어 올렸지만, 타구는 손목을 맞고 높이 튀어 올랐다.
그만큼 빠르고 강했던 타구, 그나마 얼굴이나 눈 부상을 피한 건 다행이지만 츠치우라 선수단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계속할 수 있겠냐?”
“네.”
코치의 물음에 이카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괜히 객기부리다 큰일 날 뻔 했던 순간, 감독 말대로 다카기 타석엔 수비진을 뒤로 물리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 얌전히 있어.’
한편, 첫 대결부터 안타를 허용한 긴지로는 연속 견제로 다카기의 발을 묶었다.
경기 속행을 독촉하는 다이이치 응원단의 야유가 날아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고, 다카기도 끈질기게 베이스에서 멀어졌다.
‘뭐? 내가 다카기 군과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한편, 3루 자유석에 앉은 모토즈미 스즈에는 어느 때보다 열정적인 응원을 보냈다.
넌 다카기 군과 아무 관계도 아무 관계도 아니라니, 키리코의 도발에 자극을 받은 스즈에는 존재감을 어필하기 위해 목이 끊어져라 목소리를 높였다.
“다카기 군 파이팅!!!!”
“어우 ~ 야!!”
“파이티 ~ 잉!!!!”
옆에 앉은 친구가 뭐라고 해도 무시, 다카기도 유독 우렁찬 목소리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그런 여유도 집중력으로 돌렸다.
‘이제 그만 눈앞의 적에 집중하시지?’
견제가 계속되자 다카기는 왼손으로 타석을 가리켰다.
타석에는 모토바시 테츠야(1학년), 선발 출장은 이번이 처음일 정도로 실전경험이 없다.
하지만 감독님이 아무 생각 없이 1학년을 4번 타자에 배치했을까. 그만한 가능성이 있는 녀석, 의심 따윈 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건가?’
모토바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카기는 검증 된 실력자, 같은 1학년이라도 나와는 레벨이 다르다.
그런데 감독님은 무슨 생각으로 날 4번에 배치하신 걸까, 기대도 하지 않았던 선발출장,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한 건 둘째 치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공도 잘 보이지 않았다.
‘정신 차리자. 이건 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몰라.’
모토바시는 긴장의 끈을 단단히 조였다. 조금이라도 풀리면 정신이 무너질 것 같지만, 입부 반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의욕이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 법, 평범한 땅볼이 나오면서 다이이치의 1회 초 공격은 소득 없이 끝났다.
‘뭐든 처음이 중요한 거다. 이겨내라’
결과는 아쉬웠지만 후루타 감독은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사람은 뭐든 처음이라는 것에 긴장한다. 하지만 그것도 익숙해지면 일상의 일부가 될 뿐, 어차피 추계대회는 고시엔을 위한 전력 재정비 기간 아닌가.
제자가 결과를 낼 때까지 기다려 줄 여유는 충분했다.
“아 ~ 왜?!!”
소극적인 모토바시에 비해 다카기는 누구보다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
한 경기에서 2 ~ 3안타 치는 건 일상, 두 번째 타석에서도 자신 있게 배트를 휘둘렀지만 좌익수 정면으로 가버렸다.
안타가 됐어야 할 타구가 아웃이 됐으니, 자기도 모르게 불만이 터져나왔다.
‘넌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게 탈이구나.’
후루타 감독은 그런 제자가 마음에 들었다.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으니 저런 행동을 하는 거겠지, 모토바시에게 저 정도 뻔뻔함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오늘 경기에서 조금이나마 자신감을 얻길 바랐다.
“자, 이제 경기는 5회 말 츠치우라의 공격입니다. 선두 타자는 이카다 리쿠, 오늘 첫 타석에선 3루 땅볼로 물러났습니다.”
“양 팀이 간간이 안타는 주고받고 있는데, 아직까지 득점이 없거든요. 그렇다고 이카다 선수가 한 방을 노릴 능력은 안 되고, 역시 차근차근 전진하는 수밖에 없겠죠.”
이카다는 기습번트를 노리고 들어갔다.
하위타선이라 연속 안타는 기대하기 어렵겠지, 뭣보다 본인의 타격이 약한 편이라 정공법보다 꼼수를 앞세웠다.
‘쓸데없는 잔재주를 ··· ’
하지만 다이이치 벤치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이카다는 타격을 할 때 몸이 1루 쪽으로 쏠리는 모습을 보인다.
일단 맞추고 빠른 발을 이용해 내야 안타를 만들어 내는 유형, 당연히 타구 질은 기대하기 어렵고 방향은 유격수 - 3루 방향에 집중된다.
하지만 지금 3루수를 보고 있는 다카기에게 이런 꼼수는 통하지 않는다.
원래 유격수를 봤으니 정면 타구를 처리하는 전진스텝도 훌륭하고, 뭣보다 강한 어깨와 정확한 송구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이런 선수가 버티고 있는 3루에 번트를 대는 건 자살행위, 첫 타석에서 3루 땅볼로 물러난 이카다도 다카기를 은근 의식했다.
‘유격수 쪽으로 굴리자.’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찾아낸 구멍,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비하고 있던 후쿠로(2학년)는 차분하게 타구를 잡아냈다.
‘생각보다 너무 먼데’
문제는 다이렉트 송구를 하기엔 어깨가 약하다는 것, 그래도 연습경기에서 바운드 송구를 잘 처리해 준 모토바시의 능력을 믿었다.
‘아차!! 이게 아닌데’
하지만 모토바시는 그 기대를 저버렸다.
평소 그렇게 잘 해왔는데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건지, 다행히 송구는 글러브를 맞고 베이스 앞에 떨어졌지만 얼굴에 번진 아쉬움을 감출 순 없었다.
공격은 몰라도 수비는 자신 있었는데, 마지막 남은 보루까지 무너지면서 자신감을 상실했다.
‘그 녀석은 유격수로 기용해야 돼’
이때 후루타 감독은 마사시게의 조언을 떠올렸다.
절대 홧김에 다카기를 3루수로 전향시킨 건 아니다. 마사시게를 만나기 전부터 다카기와 충분히 의견을 주고받았고, 뭣보다 녀석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이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다카기를 3루수로 전환하면서 유격수에 구멍이 커진 것도 사실, 후쿠로를 질책하는 건 아니지만 다카기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바운드 송구가 될 일도 없었다.
이카다는 그 구멍을 절묘하게 노렸을 뿐, 물론 알고도 당한 다이이치 입장에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조금 심심하긴 하네.’
한편, 다카기는 3루에 슬슬 싫증을 느꼈다.
고교야구에서 강한 타구가 얼마나 나오겠는가. 츠치우라는 효고 현에서 제법 이름이 난 야구부지만, 다카기의 흥미를 유발할 타구를 만들어내진 못했다.
‘더 강하게 들어오라고, 그 길쭉한 건 폼으로 들고 있냐?’
방망이를 짧게 쥐고 깔짝대기만 하니 받아주는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 좀 더 강하게 들어오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상대는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 밖에 없어.’
츠치우라의 8번 무라사키는 얼굴을 홈 플레이트에 붙인 채, 방망이를 극단적으로 눕힌 자세로 파울을 얻어내는 전략을 구사했다.
살아남기 위해 본인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거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카기는 불만을 중얼거렸다.
“누군 저렇게 할 줄 몰라서 안 하나?”
마침 귀를 세우고 있던 3루심이 그 불만을 접수했다.
확실히 조금 문제가 있는 자세, 하지만 주심이 제재를 가하지 않고 있으니 일단 지켜봤다.
‘더는 안 되겠군.’
다이이치의 후루타 감독은 벤치를 박차고 나왔다.
원칙적으로 고교야구에서 항의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상대 타자의 스트라이크 존 침범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일, 뭣보다 위기 상황에서 분위기를 한 번 끊어주겠다는 의도도 적용됐다.
츠치우라의 사나다 감독과 3루심까지 현장으로 달려가면서 경기는 잠시 중단, 다카기는 팔짱을 낀 채 경기재개를 기다렸다.
“자네 또 그러면 아웃 처리 할 거야.”
주심은 무라사키에게 경고를 줬다.
스트라이크 존 침범에 대한 제재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파울을 양산하는 타격은 쓰리번트 아웃처리 할 수 있다는 규정을 적용했다.
당연히 무라사키는 반발, 사나다 감독도 격한 불만을 표출했다.
“첫 타석에선 아무 말도 안 하더니 왜 이러는 겁니까?!!”
“안타가 아니라 파울만 치고 있잖아요.”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파울 치면 안 된다는 규정이라도 있어요?!!”
“네 있습니다. 찾아보세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츠치우라의 감독은 다이이치가 고시엔 우승 팀이라고 밀어주는 거냐며 발끈했다.
주심이 퇴장조치를 하면서 츠치우라의 기세는 한 풀 꺾였고, 자기 타격을 못하게 된 무라사키는 어정쩡한 자세에서 5구를 타격, 투수 앞 땅볼이 병살타로 이어지면서 다이이치는 위기를 넘겼다.
‘진짜 대놓고 다이이치 밀어주는 거냐?’
츠치우라 야구부는 주심에게 적대심을 품었다.
하필 그 타이밍에 말 같지도 않은 규정을 들이미는 이유가 뭔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음모가 쏟아져 나왔다.
“야, 다카기 저 자식이 배후 아냐?”
다카기의 할아버지는 고영길, 일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부에 한때 교토본부 야구협회 회장까지 지낸 인물이다.
손자가 고시엔 우승, 일본의 U-18 우승까지 일궈냈는데,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말고’ 식의 궤변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타격은 이렇게 하는 거다.’
하지만 다카기는 실력으로 적진의 야유를 틀어막았다.
6회 초, 세 번째 타석에서 몸 쪽 높은 공을 받아 쳐 좌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만들어 냈고, 츠치우라의 2루수 무라사키는 착잡한 심정으로 베이스 옆에 자리를 잡았다.
확실히 지금 타격 폼은 아마추어에서도 안 통할 기술이다.
체중이 1루로 쏠려 있으니 강한 타구를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이런 선수를 어느 구단이 눈 여겨 보겠는가.
그에 비해 다카기는 무게중심의 전진과 레벨스윙으로 기술적인 장타를 만들어 낸다.
전문가들이 관심을 주는 건 당연한 일, 이런 선수를 앞에 두고 할아버지가 배후에 있느니 어쩌니 입을 놀리면 추해지는 건 어느 쪽일까. 아직도 주심의 판정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지만 일단 접어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