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새출발 - (10)
추계대회를 앞두고 다이이치 야구부는 마지막 전력 정비에 나섰다.
후루타 감독은 여느 때처럼 훈련에 임하는 선수들을 체크, 그중에서도 유독 바쁘게 움직이는 다카기를 눈여겨봤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포지션을 변경하는 게 좋겠어.’
안타깝지만 큰 체격은 유격수에게 단점이 될 수 있다.
깊숙한 타구를 처리하는데다 턴 동작이 많으니 무릎이나 발목에 무리가 오는 건 당연, 아무리 유연성이 좋아도 인간의 몸은 쓰면 쓸수록 약해지기 마련이다.
다카기의 체격은 키 184cm, 몸무게 80kg, 유격수 치고 상당히 큰 체격이다. 거기다 이건 학기 초에 측정한 수치, 앞으로 더 성장할 몸이 격렬한 동작을 견뎌낼 수 있을까.
부상으로 커리어를 일찍 마감한 후루타 감독은 제자의 미래를 걱정했다.
‘저 녀석이 순순히 받아들일까 모르겠군.’
물론 설득이 쉬울 리 없다.
다카기는 유격수라는 포지션에 상당한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뭣보다 지금 야구부원 중 다카기보다 효율적으로 유격수를 소화할 학생이 없으니 포지션 변경은 팀에 마이너스, 일단 다나카 코치와 의견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감독님, 전국의 어떤 학생을 데려와도 다카기만큼 유격수를 잘 볼 녀석은 없습니다.”
“난 그 녀석이 건강하게 야구를 하길 바라네. 그 정도 재능이 부상으로 무너지는 건 너무 애석하지 않나?”
감독의 염려에 다나카 코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부상을 염려하다니, 거기다 선수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게 지도자의 역할 아닌가.
뭣보다 추계대회를 앞두고 포지션 변경을 운운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카기를 3루로 전환하려면 그만한 대안이 있어야겠죠.”
“생각해 둔 아이들이 있으니 자네가 보고 판단해 주게”
“ ··· 알겠습니다.”
다음 날, 다나카 코치는 수비 훈련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공격력을 보완할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지만 모든 스포츠의 기반은 수비다. 거기다 감독이 다카기의 포지션 변경을 고려하고 있으니, 유격수를 볼 수 있는 자원을 물색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적게는 7개월 길게는 2년 넘게 동고동락한 제자들이다. 이 녀석들의 재능을 코치가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역시 다카기의 빈자리를 채울 학생은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다카기는 평소와 다른 훈련 방식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모든 경기를 유격수로 뛸 순 없는 일, 다른 선수들도 가끔 유격수 훈련을 한다. 하지만 오늘 따라 그 비중이 높은 편, 훈련이 끝나고 감독에게 단독 면담을 요청했다.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감독님은 제가 유격수로 뛰는 게 탐탁지 않으신가요?”
“그런 게 아니다. 다 내 조바심 때문이지”
감독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큰 키와 체격은 유격수 수비에 부담이 된다. 184면 충분히 큰 키, 이쯤에서 성장이 멈추길 바랐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세 또 컸나?’
7월초 까지만 해도 교복 바지는 발목을 가렸다. 하지만 지금은 발목이 슬금슬금 세상 구경을 노리는 중, 성장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파워를 키우려면 체중도 더 늘려야 하는데 언제까지 유격수를 볼 수 있을까. 그 자리에 애정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마냥 나쁘게 생각할 것 없어.’
유격수라는 포지션 때문에 그동안 체중 관리에 신경을 썼지만, 3루수를 본다면 얘기가 다르다.
체중을 불리고 여기서 더 파워가 붙는다면 어떻게 될까, 딱히 나쁘지 않은 방향전환이라고 생각했다.
“감독님이 절 3루수로 기용하시겠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말이냐?”
“네”
이후 다카기는 3루 수비 훈련에 집중, 은사인 마사시게 감독에게도 근황을 전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성급한 판단 아니냐?]
마사시게는 포지션 변경에 의문을 표했다.
지금까지 유격수로 잘 뛰던 선수를 부상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3루로 보내다니, 나이가 들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다카기는 한창 재능을 꽃피우고 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게 다카기의 장점, 그걸 죽여가면서 포지션 변경을 해야 하는 건가? 마사시게는 후루타 감독이 제자의 재능을 죽이고 있다며 발끈했다.
‘또 화병이 도지셨나?’
다카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워낙 다혈질인 분이라 가끔 이렇게 목소리가 높아지는데, 오늘 따라 반응이 민감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저씨, 솔직히 저희 감독님 마음에 안 드시죠?”
[뭐? 그게 무슨 소리냐?]
“현역 시절에 사이 안 좋으셨잖아요. 그날 연습경기에서도 별 말씀 안하시고 ··· ”
[ ··· 그렇게 티가 났냐?]
전화통화라 표정은 숨길 수 있지만, 목소리까진 어쩌지 못했다.
학생들 앞에서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인사도 제대로 안 나눴으니, 그날 경기 분위기가 어땠겠는가?
첫 연습경기에서 양 팀은 식사도 함께하며 나름대로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런데 두 번째 연습경기는 뭔가 어색했던 분위기, 마사시게 감독이 기자들을 피하면서 뒤풀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도 계속 교류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다카기는 억지로 화해를 주도할 생각은 없었다.
“저희들 입장에선 두 분이 화해했으면 좋겠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과 친해질 순 없는 일이죠.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 안 맞는 관계가 있잖아요?”
[그 ··· 그래]
친 조카처럼 여기는 제자의 말에 마사시게는 얼굴을 붉혔다.
도우묘 야구부는 미래를 위해서라도 많은 인연을 쌓아둬야 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어떤가, 마사시게는 키타마치 야구부의 코치직 제안을 거절했고 여기에 앙심을 품은 키타마치가 협약을 맺고 있는 다른 야구부에 압력을 넣으면서 연습경기 상대도 구하기 어려운 입장이 됐다.
그런데 겨우 얻은 연습경기 상대와 이런 분위기를 이어가도 되는 건가. 현역시절부터 주변에 적이 많았는데, 이래서야 앞날이 훤히 보였다.
* * *
[시간 있으면 언제 술 한 잔 하겠나?]
어느 날, 후루타 감독은 의문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 인간이 내 휴대폰 번호는 어떻게 알아낸 건지,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일단 대화를 이어갔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할 말이 있어서 그러네. 난 언제든지 괜찮으니, 시간 날 때 전화 주게]
“ ··· 알았네.”
그렇게 끝난 전화통화, 이날 후루타 감독은 여느 때처럼 선수들을 지도했지만 하루 종일 찝찝한 뒷맛에 시달렸다.
현역시절에 갚아주지 못한 치욕을 제자들을 통해 위로 받겠다니, 불순한 의도로 연습경기를 받아들인 것도, 50이 넘은 나이에 그런 속 좁은 생각을 한 것도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들이다.
가능하면 잊으려고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받은 전화 한 통에 하루 일과를 망쳐버렸다.
“감독님, 오늘 술자리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때 범인이 스스로 정체를 드러냈다.
설마 이 녀석이 흑막이었을 줄이야, 후루타 감독은 떨리는 목소리로 추궁에 나섰다.
“너 그 친구랑 아는 사이냐?”
“네, 감독님도 눈치 채신 거 아닌가요?”
마사시게는 현역시절부터 후원자에 대한 감사를 숨기지 않았다.
그 후원자는 고영길, 다카기의 친할아버지 아닌가?
조금만 머리를 굴렸다면 눈치를 챘을 텐데, 후루타 감독은 거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쩐지 뭔가 수상하긴 했어.’
고등학생이 규격 외의 기량을 선보이고 스스로 스윙까지 교정한다는 게 말이 되나. 주위에 야구를 하는 사람이 있었겠지, 후루타 감독도 대략 눈치는 챘지만 그 정체를 이제야 알아챘다.
“네가 그 친구한데 화해니 뭐니 한 거냐?”
“제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두 분을 화해시키겠어요.”
다카기는 그날 마사시가 감독과 나눈 대화를 털어놨다.
서로 안 맞는 관계도 있는 법이라니, 이건 화해가 아니라 대립을 방관한 것 아닌가. 다카기를 추궁하는 건 어리석었다.
“그래서, 나가실 건가요?”
거듭되는 제자의 요구, 후루타 감독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고민을 많이 했지만 도우묘 야구부는 앞으로도 인연을 이어갈 관계, 일단 만나서 그날 나누지 못한 대화를 주고받기로 했다.
“크흠 ~ ”
“으음 ~ ”
숨이 막힐 정도로 어색한 분위기,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살피던 마시시게 감독이 먼저 입을 열었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니, 이제 지난날은 잊는 게 어떻겠나?”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아닌가?”
후루타 감독은 약간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신인왕 3위에 오르며 한껏 날갯짓을 하던 유망주는 부상이라는 악재를 만났다. 그래도 프로에 남아 선수경력을 이어갔는데, 저 마사시게라는 놈은 지나친 견제에 불만을 품고 몸통박치기를 해버렸다.
가뜩이나 부상에 민감한 선수에게 이게 할 짓인가? 거기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지난 일은 잊자는 말을 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네도 나한테 위협구 던졌잖아? 그건 생각 안 하나?”
“난 투수에게 몸 쪽 공을 요구했을 뿐이야. 자네가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 것뿐이지.”
“민감? 난 그때 이틀 동안 몸에 맞는 볼을 4개나 맞았어. 그중 하나는 머리였고!!”
“다시 말하지만 난 몸 쪽을 요구했을 뿐이야.”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하면서 분위기는 더 어색해졌다.
역시 다카기 말대로 절대 이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게 있는가. 옛 일을 들춰봤자 싸움만 날 것 같고, 마사시게 감독은 화제를 돌렸다.
“우리의 관계는 학생들과 아무 관련 없는 일이야. 다른 건 몰라도 앞으로 연습경기는 계속 했으면 좋겠네.”
“그건 나도 찬성이네. 우리 학생들도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건 다른 얘긴데 ··· 다카기를 3루로 옮길 생각인가?”
후루타 감독은 발끈했다.
우리 선수는 내가 알아서 하는데 이건 명백한 내정간섭 아닌가? 하지만 마사시게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 녀석은 내가 10살 때부터 지켜봤어. 고영길 회장님도 잘 봐달라며 몇 번이나 부탁하셨고”
“그래서, 그 녀석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건가?”
“지금 그런 걸 따지자는 게 아니잖나.”
마사시게는 유격수야말로 다카기가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자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부상 때문에 일찍 커리어를 마감한 후루타 감독은 그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못했다.
“덩치가 있다고 유격수를 보면 안 되나? 메이저리그에도 대형 유격수는 얼마든지 있어. 자네는 그 녀석의 재능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군.”
“다카기의 재능은 내가 더 잘 알아. 그 녀석은 3루로 돌릴 거네.”
3루로 돌리면 수비 부담도 줄어들고 장타에 더 집중할 수 있지 않나. 옛일은 그렇다 쳐도 내가 지도하는 선수의 앞날까지 간섭하는 건 용납하기 어려웠다.
‘이거 말려야 되는 거 아냐?’
술집 주인은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술이 한두 잔씩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 분위기가 점 점 험악해지고 있는데, 이러다 멱살잡이라도 하는 건 아닌지, 거기다 상대는 왕년에 운동 깨나 한 사람들 아닌가.
소란이 벌어져도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됐어!! 역시 자네하고 나는 안 맞아!!”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몸싸움까지 가진 않았지만, 끝내 20년 넘게 쌓인 앙금은 풀리지 않았다.
제자를 아끼는 마음은 같은데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니, 자식의 앞날을 두고 대립하는 부부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절대 유격수로 돌려보내진 않겠어. 이건 내 생각이 맞아.’
그날 이후, 후루타 감독은 다카기를 3루수로 키우는 일에 집중했다.
다른 학생들은 다나카 코치에게 일임, 직접 배트를 잡고 펑고를 쳐주며 자신의 모든 지식과 애정을 쏟아 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