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새출발 - (9)
“이나바 키리코”
“네 ~ ”
10월 시험이라는 태풍이 지나간 교실, 호명을 받은 학생들은 하나 둘 담임선생님 앞으로 향했다.
키리코는 경쟁상대를 의식하며 발걸음을 옮겼고, 아닌 척 했지만 다카기도 긴장된 얼굴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다카기 하루요시”
“예”
성적표를 슬쩍 훑어본 담임선생님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좀 더 노력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성과를 낼 줄이야, 운동을 병행하면서 이런 결과를 냈다는 게 더 기특했다.
‘아 ~ 조금 불안한데’
하지만 다카기의 얼굴엔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지난 시험에 비해 발전한 건 분명한데 이 정도로 경쟁자를 이길 수 있을까, 지면 소원도 하나 들어주기로 했는데 이래저래 피해가 막심했다.
[방과 후 기대할게]
타이밍도 안 좋게 경쟁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네가 날 이겼을 리 없다며 자신감이 대단한데, 다카기는 끓는 속을 겨우 다스렸다.
‘그래도 결과는 마지막까지 가 봐야 아는 법이지. 졌으면 재도전하면 돼’
방과 후, 다카기는 외나무다리에서 진검승부라도 하듯 비장한 얼굴로 성적표를 꺼내들었다.
무슨 애가 이렇게 진지한지, 키리코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뜨악!!”
결과를 확인한 다카기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교내 톱을 달리던 사나에 선배의 성적표를 봤으니 키리코의 저력은 대략 짐작했다. 예상대로 강력했던 경쟁자, 빈볼이라도 맞은 것처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후우 ~ 얘도 만만치가 않네.’
승리는 했지만 키리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종스코어는 반올림해서 98대 93, 크다면 큰 격차라고 할 수 있는데 운동까지 병행하는 아이가 여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
“엄청 잘 봤는데 뭘 그렇게 아쉬워 해?”
“패자한테 쓸데없는 동정은 하지 마. 어쨌든 1패 받고 한판 더 붙어.”
“그 전에 소원부터 들어줘야지. 잊었어?”
잠깐 외면하고 있었던 벌칙, 다카기는 원하는 게 뭐냐며 터프한 목소리를 내질렀다.
분명 승자는 난데 왜 어깨가 움츠러드는 걸까,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에 키리코는 당당히 가슴을 폈다.
“매일 아침 우리 집 앞으로 와.”
“ ··· 그래, 알았어.”
패자가 군말 없이 조건을 수용하자 키리코는 당황했다.
왜 그래야 하냐며 한마디 툭 던져줘야 이 쪽도 작업을 할 것 아닌가. 아직 말 안 끝났다며 돌아서는 패자를 붙잡았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안 물어 봐?”
“이기는 쪽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 내가 따져 묻는다고 뭐가 달라져?”
“아니 뭐 ··· 그런 건 아닌데 ··· ”
“내일 아침에 보자.”
할 말 다한 다카기는 그라운드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정말 승부 외엔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걸까? 승리를 거뒀지만 키리코의 얼굴엔 씁쓸한 마음이 드러났다.
“하나 더!!”
시험은 끝났지만 야구부의 일과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실력을 키우는 비결이라는 게 뭐가 있겠나. 매일하던 연습을 쉬지 않고 반복할 뿐, 야구에 대한 매너리즘을 학업으로 극복한 다카기는 오늘도 열정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우리한테도 관심 좀 줘’
그물망 근처는 오늘도 구경꾼들로 북적거렸다.
인기란 전염되는 것, 학교의 마스코트로 떠오른 다카기는 많은 학우들의 관심에 휩싸였다. 하지만 무심할 정도로 훈련에만 집중하는 녀석, 그런 도도한 태도도 소녀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쟤 오늘도 여기에 있네.’
모토즈미 스즈에도 그 중 한 명, 어떻게 한번 말이라도 걸어볼까 기회만 엿보고 있는데, 오늘 따라 한 아이가 눈에 거슬렸다.
그 정체는 이나바 키리코,
다카기와 같은 반이라고 제법 친하게 지내는 것 같은데, 최근 그라운드 근처를 얼쩡거리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이쯤에서 견제가 들어가는 것도 좋겠지,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너도 야구 좋아하니?”
잘 모르는 사람이 대뜸 말을 걸어오다니, 고양이가 털을 바짝 세우듯 키리코는 경계심을 한껏 드높였다.
“네”
“그럼 우리 부에 들어올래? 화장하는 법도 배우고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어, 뭣보다 야구부 응원도 할 수 있고”
“아니요. 저는 부활동에 관심이 없어서 ··· ”
“글쎄 한 번 와 보라니까. 그럼 생각이 달라질 거야.”
하지만 키리코는 좀처럼 낚이지 않았다.
우리 부에 들어오라는 그럴듯한 이유로 은밀한 곳으로 유도해 위협을 가 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직구를 날렸다.
“너 혹시 다카기 군에 관심 있니?”
“그걸 제가 왜 말해야 하죠? 당신이 다카기 군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예상 밖의 반격에 스즈에는 움찔했다.
몸은 왜소한데 생각보다 강력한 저항, 뭣보다 다카기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 가슴에 박혔다.
“그 ··· 그런 너는 무슨 관계라도 있어?”
“네, 저는 다카기 군과 경쟁하는 사이에요.”
이건 또 무슨 소린지, 키리코는 혼란에 빠진 적진에 다시 강력한 일격을 날렸다.
“죄송하지만 저한테 관심 주지 마세요. 저는 다카기 군과 경! 쟁! 하는 사이라 당신과 말을 섞을 만큼 한가하지 않아요.”
쉴 새 없이 날아든 연타, 그 기세에 눌린 스즈에는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조그만 게 뭐가 저렇게 독한지, 내가 찜한 남자는 뺏길 수 없다는 생물학적 본능인가. 두 소녀는 그렇게 거리를 뒀지만 때때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신경전을 이어갔다.
* * *
“키리코, 학교 안 가니?”
“마중 올 사람이 있어요.”
다음 날 아침, 등교 준비를 마친 키리코는 현관 앞에서 다카기를 기다렸다.
정말 오는 걸까? 괜히 나 때문에 먼 길을 돌아오는 건 아닌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그런 조건을 걸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괜히 미안했다.
“누가 마중을 온다는 거니? 호호 ~ 혹시 남자친구?”
“아 ··· 아니에요.”
이때 초인종이 모녀의 대화를 끊었다.
깜짝 놀란 키리코는 엄마 등 뒤로 피신, 수상한 냄새를 맡은 어머니는 현관문 앞에 섰다.
“누구세요?”
“저는 다이이치 고교에 재학 중인 다카기 하루요시라고 합니다. 이나바 상은 아직 등교 준비 안 됐나요?”
설마 했는데 진짜였다니, 딸이 열지 말라고 매달렸지만 어머니는 힘으로 저항을 떨쳐냈다. 문 틈 사이로 나타난 그림자는 훤칠한 키에 선이 또렷한 미소년, 거기다 워낙 유명한 아이라 한 눈에 알아봤다.
“어머나 ~ 이게 무슨 일이니,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아니, 저희 지금 학교가야 되는데요.”
“어 ··· 어머나 ··· 그랬죠?”
어머니는 자꾸 등 뒤로 숨는 딸을 밖으로 밀어냈고, 창문을 통해 멀어지는 뒷모습을 염탐했다
설마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던 소년이 우리 딸을 마중 나오다니, 마음 같아선 따라가고 싶었지만 뒷이야기는 나중에 듣기로 했다.
“정말로 왔네?”
“당연하지. 안 올 줄 알았어?”
한편, 곁눈질로 다카기를 살피던 키리코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꿈길을 걷는 것처럼 마음이 붕 떠올랐다.
“그런데 왜 집으로 오라고 한 거야?”
이제 와서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답을 망설이던 키리코는 그럴듯한 방패막이를 내세웠다.
“개가 무서워서 ··· ”
“개?”
“요즘 들개가 많잖아. 혼자 가면 무서워”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처에 개가 많은 건 사실, 여자애가 등굣길에 공격을 받은 사건도 있고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그럼 내가 앞으로 계속 마중 나와야겠네?”
“귀찮게 하는 거 아냐?”
“패자는 승자의 말에 따라야지. 아침 운동도 되고 좋지 뭐”
키리코는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런 꿈만 같은 일이 앞으로 매일 반복되다니,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만세삼창이라도 했을 거다.
“대신, 다음 시험에 내가 이기면 경호는 취소 할 거야.”
하지만 다카기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이건 계약의 이행일 뿐, 계약이 지속되길 원하는 키리코도 절대 지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짐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두 사람은 인적이 뜸한 학교 정문에 도착, 교실로 향하던 키리코는 저쪽으로 멀어지는 다카기를 붙잡았다.
“어디 가? 경호하기로 했으면 마지막까지 책임을 져야지.”
“학교에서 무슨 경호를 해? 내 책임은 여기까지야.”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리는 불량 경호원, 아직 시간도 이르고 키리코는 그 뒤를 쫓아갔다. 예상대로 행선지는 야구부원실, 책가방을 내려놓은 다카기는 청소도구를 집어 들었다.
“야구부의 주인은 너희들이야, 앞으로도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줬으면 좋겠어.”
다카기는 은퇴한 사나에 선배의 충고를 잊지 않았다.
세상에 자기 가게를 학대하는 사장이 어디 있나, 청결한 사업장은 주인의 기본자세, 잠깐 권태기가 왔지만 야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나도 도와야 되나?’
키리코는 문 밖에서 다카기의 눈치를 살폈다. 야구부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청소는 내 관할 밖, 그렇다고 우두커니 서 있기도 뭣했다.
“오늘 청소 당번이야?”
“여긴 내 구역인데 당번이 어디 있어. 시간 있으면 하는 거지”
정말 바보 같을 정도로 성실한 아이, 이런 정신상태로 뭘 못할까? 키리코는 다카기가 공부도 운동도 완벽하게 해내는 비결을 조금이나마 알아챘다.
“뭐하고 있어? 여긴 내구역이라니까. 얼른 교실로 가”
“나도 도와줄까?”
키리코가 청소도우미를 자처했지만 다카기는 고개를 저었다. 야구부에 소속된 매니저라면 모를까,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야구부에 함부로 들일 순 없었다.
“아무도 없잖아. 잠깐 들어가는 건데 뭐 어때”
“안 되는 건 안 돼. 야구부원 외엔 출입금지야.”
청소 도와주겠다는데 비싸게 구는 경호원,
키리코는 내친 김에 야구부에 들어갈까 했지만 그 결심은 스스로 철회했다. 관심이 있는 건 다카기지 야구가 아니다. 뭣보다 부활동을 병행하면서 계약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한 번이라도 패하면 경호는 그 날로 끝, 모험을 하고 싶진 않았다.
“와 ~ 진짜 너무한다. 어떻게 한 명도 안 오냐?”
청소를 마친 다카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나에 선배가 그렇게 충고를 했는데 적어도 며칠은 약빨이 가야 되는 거 아닌가? 그날 이후 남몰래 걸레질을 하고 있지만, 이 시간에 얼굴을 마주한 부원은 한 명도 없다.
오늘 한소리 해야 하는 건지, 키리코는 어린애처럼 투덜거리는 경호원에게 뼈아픈 일격을 날렸다.
“너 혹시 누가 알아주길 바라고 청소하는 거야?”
“그건 아닌데”
“지금 네 행동이 그렇게 보여. 기왕 할 거면 은덕을 쌓는다는 마음으로 해야지.”
“쳇, 네 ~ 네 ~ ”
부원도 아닌 녀석에게 이런 잔소리를 듣다니, 뒷정리를 마친 다카기는 경쟁자를 뒤로 한 채 교실로 향했다.
“혹시 야구부에 매니저 필요해? 필요하면 내가 해줄 수도 있는데”
뒤따라 붙는 키리코의 목소리, 다카기는 그럴 거 없다며 철벽을 쳤다.
“지금 야구부에 매니저만 3명이야. 반장이 들어올 자리는 없어.”
“3명 있으면 뭐해? 아무도 청소 안 도와주잖아.”
“자꾸 아픈데 찌르지 마”
“아프라고 찌르는 거야.”
다카기는 순간 욱했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냥 갈 길 갔지만 놀리는데 맛이 들린 키리코는 계속 경호원을 괴롭혔다.
‘내가 언제 이렇게 바뀐 거지?’
키리코는 어렸을 때부터 소심한 성격 때문에 친구가 별로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괴롭힘에 시달렸다. 우수한 성적에 얌전한 성격, 선생님들이 딱 좋아할 우등생 아닌가. 문제는 생각 없는 담임선생님이 대놓고 키리코와 불량학생을 비교하면서 괴롭힘이 시작됐다는 거다.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서 인간관계도 단절,
그런데 여기서 만난 인연이 성격까지 바꿔버릴 줄이야, 뭔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