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68화 (68/361)

68화. 새출발 - (8)

‘우리가 약해졌다고?’

연습경기를 승리로 마무리했지만 다이이치 야구부는 찝찝한 뒷맛을 남겼다. 일개 야구클럽을 상대로 이 정도 밖에 못하다니, 하루의 노고를 씻어내는 샤워실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카기는 가장 먼저 샤워실을 빠져나왔다.

치고 달릴 기회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오늘은 땀을 흘릴 기회도 없었으니 이 자리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공부가 더 쉽지, 그건 나 혼자 잘하면 그만이잖아.’

오늘 다카기는 타석에서 볼넷만 4개를 얻어냈다.

딱히 동료들 탓을 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만 잘해줬어도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뭣보다 경쟁자가 있어야 야구 할 말이 나는데, 만나는 팀마다 다들 겁난다고 도망치기 바쁘니 살짝 권태기가 찾아왔다.

‘오늘은 좀 자극적으로 먹어야겠다.’

그래도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결과는 아쉬웠지만 계속 마음에 두면 나만 손해, 내일도 힘내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카기 군”

이때, 왜소한 그림자가 등뒤에서 다가왔다.

그림자의 주인공은 이나바 키리코, 평소라면 집에 있을 시간이지만 야구부 연습경기를 관람하다 이제야 귀갓길에 올랐다.

“뭐야, 반장 지금 집에 가는 거야?”

“응, 오늘 경기 이겼지? 축하해”

“어, 고마워”

키리코는 나름대로 관심을 표한 거지만 다카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던 경기, 잊기로 했는데 그 기억을 다시 들춰낼 줄이야, 그래도 불편한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얘 나랑 같은 방향이었지’

그렇게 얼마나 같이 걸었을까. 어색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다카기는 끊어진 대화를 이어갔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반장은 왜 다이이치 고교에 지원했어? 뭔가 거시적인 목표가 있었던 거야?”

기습 질문을 받은 키리코는 답을 망설였다.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말에 밀려 여기까지 왔지만 그게 내 진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목표고 자시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 ··· 글쎄, 아직 목표는 없지만 열심히 하다보면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을까?”

“나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다카기도 한때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뭐든 열심히 하면 내가 갈 길은 선택할 수 있겠지, 그래서 운동도 학업도 병행해 왔다.

그렇게 좋아했던 운동인데 지금은 약간 권태기가 왔다. 이 나이에 벌써 권태기라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뭘까?

목표는 자시고 경쟁자가 없는 게 더 암울한 현실, 야구에서 라이벌을 찾긴 어렵고 다른 곳에서 자극제를 찾길 바랐다.

“반장은 교내에서도 성적 톱이지?”

“그 ··· 그냥 평범해.”

“숨길 거 없어. 나도 듣는 귀가 있으니까.”

다카기는 키리코의 우수한 성적에 주목했다.

다이이치 고교는 전체 석차를 공개하지 않지만, 선생님들이 알 게 모르게 정보를 흘리고 다닌다. 여기에 학생들이 주고받는 소문까지 더해지면 키리코의 성적은 대략 짐작이 됐다.

“우리 다음 시험에 한 판 붙자.”

“내 ···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내가 요즘 인생의 권태기라 자극이 필요하거든, 좀 도와 줘”

다카기는 다음 시험에서 승자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자는 제안을 했다. 학업우등생 입장에선 손해 볼 게 없는 승부, 하지만 키리코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얘 나를 경쟁상대로 보는 것 같은데’

이 아이는 뭐든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가.

남자가 승부욕을 불태우는 건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하필이면 그 상대가 나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싫어. 난 너랑 경쟁하는 거 싫단 말이야.”

이렇게까지 마음을 드러냈건만, 둔탱이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럼 백 번 양보해서 선의의 경쟁 어때?”

“몰라, 다시는 나한테 그런 말 하지 마.”

다카기는 키리코를 거듭 설득했다.

자기보다 더 강하고 우수한 상대에게 끌리는 성격, 도전을 받아줄 때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정말 소원 하나 들어줄 거야?”

“당연하지. 단, 내가 들어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 ··· 좋아.”

이렇게 대결은 성사됐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쪽이 조금 불리한 입장이지만, 남는 시간을 쪼개가며 최선을 다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 자신했다.

“야, 우리 정말 많이 발전하지 않았냐?”

“그런 것 같아. 다음에는 점수 차를 더 좁혀야겠어.”

그 시각, 정문을 빠져나온 도우묘 야구부는 소소한 성과에 들 떠 있었다.

첫 경기에서 14대 1로 졌는데, 오늘은 3대 1로 졌으니 나름대로 선전한 거 아닌가? 버스에 오르는 학생들 얼굴엔 자신감이 드러났다.

“잘난 척 하지마라. 너희는 아직 멀었다.”

이때, 마사시게 감독의 묵직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깼다.

마이타케 말대로 우리가 발전한 게 아니라 다이이치의 전력이 떨어진 것 뿐, 멋대로 착각하지 말라며 분위기를 바로 잡았다.

“감독님, 저희도 언젠간 다이이치를 이기는 날이 오겠죠?”

이때 한 녀석이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헛소리를 늘어놨다.

다이이치를 이끄는 후루타 감독도 현역시절 명성을 날렸지만, 마사시게 감독의 위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훌륭한 감독이 있으니 우리는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겠지?

하지만 되돌아 온 답은 냉정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감독으로 왔다고 너희들이 발전한다는 보장은 없다.”

인간은 정말 자기 편한 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동물이다.

한 사람이 조직을 바꿀 수 있을까. 절대자가 나타나 불리한 상황을 바꿔주길 바라다니, 그런 생각은 자기발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너희들도 오늘 봤을 거다. 다카기가 아무리 뛰어나도 혼자서는 팀을 이끌 수 없어, 언제까지 캡틴이 너희들 뒤치다꺼리 해줄 거란 생각은 버려라. 스스로 발전하지 않으면 이기는 날은 절대 오지 않아.”

그제야 학생들은 착각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다카기는 세계적으로 재능을 인정받은 야구소년, 하지만 동료들이 받쳐주질 못하자 빛을 잃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어떤가.

다카기처럼 대단한 선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근거로 승리를 운운한단 말인가. 누구에게 의지할 게 아니라 나부터 발전해야 팀이 강해지는 법, 일부 선수들에게 의존해선 지역예선 출전은 물론 승리라는 결과도 따라올 리 없었다.

‘너도 이제부터 시작이다. 정신 바짝 차려라.’

이 와중에도 마사시게 감독은 다카기의 입장을 걱정했다.

고시엔 우승에 세계대회 우승까지 했으니, 여론은 이제 다카기가 이끄는 다이이치에 많은 기대를 걸 게 분명하다.

[킨타 마사시게, 30호 홈런 작렬]

[퍼시픽리그 전체 2위, 겁 없는 신인의 맹렬한 진격]

하지만 지옥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마사시게는 어린 나이에 두각을 드러냈고 여론은 나고야 파이터스의 마사시게가 아니라 ‘마사시게의 나고야 파이터스’라는 요상한 문구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내가 못하면 지는 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내가 못해 팀이 지는 것처럼 포장이 됐다.

그런 강박관념과 부담은 성적 부진으로 이어졌고, 마사시게는 데뷔 시즌 31홈런 이후, 2년 동안 32홈런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몰라, 팀 성적이고 자시고 내가 더 급해.’

절치부심하고 맞이한 4번 째 시즌,

마사시게는 타율 0.304, 38홈런, 115타점을 올리며 생애 첫 홈런 - 타점 왕을 석권했다. 다음 시즌도 타율 0.292, 45홈런, 102타점을 기록하며 홈런왕 2연패를 달성, 27살의 청년은 그때부터는 무서울 게 없었다.

나고야 파이터스의 마사시게가 아니라 내가 팀 그 자체가 됐고, 감독은 물론 동료 선배들도 내가 끌어줘야 하는 짐덩이로 여겼다.

선수 생활 마무리가 좋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겠지,

혹시 그 녀석도 내 전철을 밟는 건 아닐까? 어렸을 때부터 지켜본 녀석이라 자기 자식처럼 신경이 쓰였다.

* * *

‘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구나.’

시험 주간이 다가오면서 다나카 코치의 고민은 깊어졌다.

다이이치 고교의 학기는 1(4 ~ 7월), 2(9 ~ 12월), 3(1 ~ 3월)분기로 나뉘고 당연히 시험도 3번을 치른다.

5월과 10월에 치르는 중간시험 그리고 12월에 치르는 기말 시험, 야구부 발등에 떨어진 건 10월 중간시험이다.

추계대회 준비와 겹치는 기간이라 훈련에 집중하는 만큼 성적에 반동이 오기 마련, 이 고난의 구간을 잘 넘겨야 했다.

“선생님, 여기 지침서요.”

“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날아든 지침서, 학업명문고답게 다이이치는 자율학습을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시험기간의 긴장감을 심어줄 필요는 있겠지,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 한다며 학생들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에엑 ~ 숙제요?!!”

“선생님 너무해요!!”

“이사회 지침대로 하는 것뿐이다.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시험기간에 이게 무슨 만행인가, 학생들은 너무한 거 아니냐며 달려들었다. 그러기에 평소에 예습 복습을 해 둘 것이지, 다나카 코치는 제자들을 딱하게 여겼지만 철저한 경쟁시스템에선 어쩔 수 없었다.

‘우리에게 왜 이런 시련이 ··· ’

다카기가 소속된 A반도 참담한 분위기에 휩쓸렸다.

선생님이 던져 준 숙제 폭탄, 이걸 다 처치해도 시험공부에 투자할 시간은 턱 없이 부족하다.

벼락치기 능력이 아니라 평소의 노력을 테스트하겠다는 이사회의 전략, 다카기는 앓는 소리를 늘어놓는 학우들을 곁눈질로 살폈다.

‘가증스러운 연기하지 마라. 안 속는다.’

여기에 내 밑으로 깔고 갈 녀석은 한 명도 없다.

다이이치 고교는 중학교 시절 공부로 이름 좀 날렸던 학생들의 집합소, 상대를 방심하게 하기 위한 연기도 가려내야 했다.

‘오늘도 일찍 자긴 글렀네.’

클럽 활동에 숙제, 시험공부까지 하다보면 밤 12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다. 거기다 다카기는 타지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입장, 돌봐 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라 끼니도 알아서 챙겨야 한다.

여러모로 불리한 싸움, 하지만 경쟁에 죽고 경쟁에 사는 인생 아닌가.

그까짓 시험, 어디 덤벼 보라며 의욕을 불태웠다.

“코치님, 오늘 훈련 안 하면 안 돼요?”

“차라리 야구부를 그만두지 그러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녀석들은 클럽활동에서 본심을 드러냈다.

시험기간만 되면 급격히 움츠러드는 방과 후 활동, 야구부 사정이라고 다르겠는가. 무단결석한 녀석만 2명, 다나카 코치는 거침없는 가위질로 팀 기강을 바로 잡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여기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너희들 자유다. 학업이 그렇게 부담스럽다면 붙잡지 않겠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분위기,

무단결석한 녀석들이 자동퇴출 당했는데 여기서 어떻게 도망치겠는가. 야구부는 예정대로 훈련을 진행했다.

‘근성 없는 놈들. 그래 가라, 나도 잡을 생각 없으니까.’

다카기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쪽도 야구 권태기가 왔지만 어떻게든 해보겠다며 시험기간 중에도 훈련을 나왔다.

1학년도 이렇게 애를 쓰는데, 2학년이라는 사람이 둘이나 무단결석을 하다니, 처음부터 야구에 대한 애정이 그 정도였다는 뜻 아닌가.

그런 부원은 하루라도 빨리 나가는 게 팀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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