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67화 (67/361)

67화. 새출발 - (7)

도우묘 고교의 선공은 득점 없이 종료, 오늘도 다카기는 돌격대장 역할을 자처했다.

‘폼이 좀 달라졌는데’

즐기자며 모든 걸 내려놨는데 이것도 직업병인가, 사카이 라이노스의 스카우터 호시노 무라시게는 다카기의 자세를 분석했다.

일반적인 거포는 배트가 투수 쪽으로 향한다. 테이크 백을 길게 하면서 스윙 거리를 만들어주는 메커니즘, 당연히 플라이 볼 양산에 유리하다.

다카기도 그동안 배트가 투수 쪽을 향했지만 지금은 배트를 어깨에 눕혔다. 가볍게 치겠다는 건데, 저런 자세로 예전처럼 장타를 뽑아낼 수 있을까?

어린 나이에도 수준급의 타격기술을 보여준 선수가 다소 평범한 폼으로 돌아간 건 조금 아쉬웠다.

‘가볍게 쳐도 괜찮겠어.’

다카기는 아무 생각 없이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그동안 힘을 싣는 타격에 집중했지만, 세계대회를 거치면서 내 파워를 너무 과소평가한 거 아닌가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부족한 파워는 배트스피드와 손목 힘으로 단점을 상쇄하면 그만, 차분하게 초구를 기다렸다.

‘네가 그걸 할 수 있다고? 한번 증명해 봐라.’

도요무 고교의 마사시게 감독은 철저한 바깥 쪽 승부를 지시했다.

다카기가 추구하는 건 전형적인 레벨 스윙,

프로선수를 보면 유독 밀어치는 타구가 많은 선수들이 있다.

해설위원들은 이걸 두고 의도적으로 밀어 쳤다는 말을 하는데 그게 사실일까. 하지만 마사시게 감독의 생각은 좀 달랐다.

‘의도한 게 아니라 메커니즘에 맞는 결과가 나왔을 뿐’

레벨 스윙은 출발이 늦은 만큼 밀어치는 타구가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배트 스피드가 떨어진다면 더욱 그렇겠지, 밀어치는 스윙은 장타 양산에 불리하다. 가끔 엄청난 배트스피드와 손목 힘으로 단점을 상쇄하는 괴물이 있지만 저 녀석이 해낼 수 있을까?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이 정도는 예상했어.’

다카기는 앞발을 단단히 닫아뒀다.

몸쪽 공은 앞발을 일찍 열어줘야 자연스러운 스윙이 나오지만, 바깥쪽 볼은 발을 일찍 풀면 힘을 실어줄 수가 없다.

앞으로 날 상대로 몸 쪽 승부를 걸 투수가 몇이나 될까, 도망치는 패턴은 처음부터 예상했다.

‘너하고 한판 붙는 건 아직 이르지, 난 바보가 아니라고’

마이타케는 배트가 닿지 않을 정도로 먼 곳에 과녁을 뒀다.

한 수 배우자고 왔는데 이런 투구를 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인가.

하지만 저 다카기 하루요시라는 녀석은 규격 외의 실력을 갖췄다.

날고 기는 야구 천재들도 무릎을 꿇었는데, 지금 내 실력으로 저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볼넷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나았다.

“우우 ~ 우 ~ ”

“도망치지 마라!!”

2구도 볼이 되자 다이이치를 응원하는 외야는 떠들썩해졌다.

누가 저런 볼 질이나 보겠다고 여기서 시간을 때우겠는가, 승부 할 마음이 없다면 연습경기고 뭐고 돌아가라는 야유를 퍼부었다.

‘여기서 흔들리면 안 된다.’

마사시게 감독도 마이타케의 전략을 지지했다.

분위기에 욱해서 승부를 거는 선수들이 있는데, 마사시게는 현역 시절 그런 무모한 도전에 철저한 응징을 가해왔다.

스트라이크를 넣는 용기도 중요하지만 상황에 따라 도망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지금의 마이타케라면 도망치는 게 현명했다.

‘끝까지 참아 봐라. 쉽지 않을 걸’

마사시게 감독은 동시에 다카기의 인내심도 시험했다.

본인이 통산 493홈런을 때려낸 거포인데, 도망치는 투구를 얼마나 많이 경험했겠는가. 잘 나갈 때는 28경기 연속 볼넷을 얻어낸 적도 있다.

이런 집중 견제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인가, 다카기는 앞으로 누구보다 많은 견제를 받겠지, 정말 큰 선수가 되려면 이런 것도 이겨내야 했다.

‘우리는 무시하는 거냐?’

물론 이런 작전은 다이이치 선수단을 자극했다.

중심타선을 책임졌던 3학년들이 대거 은퇴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야구 클럽에게 무시당할 수준인가. 다카기는 피하고 나머지는 그림자 취급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억울하면 쳐 봐, 다카기는 몰라도 너희들한테는 안 져.’

다카기를 볼넷으로 거른 마이타케는 후속 타자 다무라 히로시(1학년)를 2구만에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냈다.

한때, 전문적으로 야구를 배운 녀석들과는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붙어보니 그런 것도 아니다.

정말 잘하는 선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상대할만한 수준, 뭣보다 세대교체에 돌입한 다이이치 야구부는 고시엔 우승을 달성했던 여름과 분명 달라져 있었다.

‘이렇게 쉽게 물러나면 안 되는데’

1회 말 공격이 무력하게 끝나자 후루타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득점이라도 뭔가 의미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다카기의 볼넷을 제외하면 아무 소득도 없었다.

도우묘 야구부를 얕잡아 보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다이이치는 전문 교원의 지도 아래에서 실력을 쌓은 팀 아닌가.

아직 초반이지만 조금 당황스러웠다.

‘너 뭐 하냐?’

이어지는 도우묘 고교의 2회 초 반격, 다무라 히로시(2루수)는 평범한 땅볼을 흘리는 실책을 범했다.

사토 요시시게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하지만 실책을 지켜본 다카기는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였다.

‘됐다.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거든’

감독과 코치가 녀석에게 거는 기대치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미 새가 새끼들에게 공평하게 먹이를 나눠줄 수 있나. 코치도 사람이라 선수에게 동등한 애정을 쏟을 순 없다.

유달리 정이 가는 녀석이 있으면 그렇지 않은 선수도 있는 게 현실, 다나카 코치는 평소 다무라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본인이 부족한 걸 알면 알아서 훈련을 더 하던가, 코치에게 하나라도 더 받아먹겠다는 의지를 보여야하는데, 저런 기량으로 무슨 활약을 하겠나.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 실망할 것도 없었다.

‘으음 ··· 저건 아닌데 ··· ’

후루타 감독도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선수 출신이라고 다무라에게 많은 기대를 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넉 달 동안 다른 녀석들이 부쩍 성장한 반면, 다무라의 성장곡선은 진전이 없다. 그래도 오늘 선발 출장 기회를 줬는데, 이런 식이라면 추계대회에서 기회를 주긴 어려웠다.

‘저리 비켜, 내가 한다.’

다카기는 다무라의 영역까지 간섭하며 타구를 처리했다.

힘이 세고 식욕이 왕성한 새끼가 먹이를 독점하는 건 세상의 이치, 자기 몫을 뺏기고도 어물쩍거리는 녀석은 신경 쓰지 않았다.

‘너는 한자리 할 것 같다.’

이와 반대로 모토바시 테츠오(1학년)에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어깨가 강하다고 다이렉트 송구를 고집하는 유격수가 있는데, 괜히 객기 부리다 악송구 저지르기 딱 좋다.

상황에 따라 바운드 송구가 더 안전한 경우도 있는 법, 다카기는 바운드 송구를 했고 모토바시는 안정적인 포구를 선보였다.

‘이 팀은 앞으로 네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입맛대로 장악해라.’

다나카 코치는 그런 다카기를 가만히 지켜봤다.

전(前) 캡틴 이시다도 따라오지 못하는 동료는 버리고 가는 리더였다.

현 캡틴인 요시다는 그런 냉정한 면이 조금 떨어지는데, 야구만큼은 냉정하게 대하는 다카기가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있다.

1학년이지만 존재감은 3학년 급, 권력은 한 번에 물려주는 것보다 차근차근 절차를 밟는 게 최선 아닌가. 요시다가 물러나면 캡틴이 될 녀석이라 지금부터 조금씩 힘을 실어줬다.

‘그 꼬맹이가 대장이 다 되셨군.’

다카기를 지켜보던 마사시게 감독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기본기도 못 갖췄던 꼬맹이가 야구부를 통솔하는 위치에 올라서다니, 그래도 그만한 자격이 있는 녀석이라 나쁘게 보이진 않았다.

‘아니, 내가 누굴 평가할 자격이 있나.’

프로시절, 마사시게 감독도 팀의 주축 선수로서 동료들을 장악하기 위해 나름대로 방책을 강구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 강약조절에 실패하면서 동료들에게 외면 받는 존재가 돼버렸다.

이런 내가 학생들을 지도하고 다카기의 통솔력을 평가할 자격이 있을까. 누굴 평가할 자격이 못 되니 그저 조용히 경기를 관망했다.

‘이번엔 도망 못 칠 거다.’

경기는 어느새 3회 말에 접어들었다.

현재 상황은 1아웃 주자 1루, 구경꾼들은 두 번째 타석을 맞이하는 다카기를 향해 홈런을 연호했다.

“뭐야?!! 저 자식 또 도망치잖아!!”

하지만 환호는 곧 야유로 바뀌었다. 주자가 있는데도 볼 질이라니, 지켜보는 입장에선 울화통이 터졌다.

“다음 타자가 만만하니까 저러는 거 아냐?”

“그러게, 저런 자식을 왜 선발로 내보내는 거야?”

관중들은 이제 마이타케가 아니라 후속 타자 다무라 히로시를 원망했다. 얼마나 만만해 보였으면 투수가 저런 짓을 할까, 자존심이 있다면 한 건 해보라며 야유와 환호가 뒤섞인 응원을 보냈다.

‘내가 이런 대우 받으려고 야구부에 들어왔나.’

외야를 바라보던 다무라는 자괴심을 느꼈다.

야구부 분위기는 예전부터 엄격했지만, 최근 들어 더욱 타이트해졌다.

범인은 다카기 하루요시, 가끔 장난도 치지만 훈련이나 실전이 시작되면 사람이 바뀐다.

나와 같은 1학년이 팀 분위기를 주도하다니,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유독 튀는 녀석이라 질투가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거야? 다카기도 너와 같은 1학년이야, 따라갈 생각을 해야지.”

그렇다고 야구부를 떠날 건가.

지금은 은퇴했지만, 사나에 선배는 부족한 후배에게 늘 용기를 심어줬다. 그 성의를 봐서라도 여기서 도망치는 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 ~ 뭐야!!”

“칠 생각은 있는 거야?!!”

하지만 다무라는 초구를 멍하니 흘려보냈다.

애가 타는 관중들이 원망을 퍼붓는 이때, 중립을 지키던 응원단이 고개를 들었다.

“다무라 파이팅!!”

“차분하게 해!! 급하게 할 것 없어!!”

타카코 선생님이 이끄는 미소녀 군단은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모교의 승리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은데 한 선수만 콕 집어 야유를 하다니, 한결같은 응원으로 야유를 덮어버렸다.

‘이런 때 여자애들은 상냥해서 좋네.’

다카기도 잠시나마 투쟁심을 내려놨다.

조직이 계속 강강강으로 움직일 순 없는 법, 가끔은 부드러운 윤활유도 필요하다.

지금 그 역할을 해주는 건 응원단, 그래도 한 번 박힌 미운털은 간단히 뽑히지 않았다.

매니저들도 무보수로 일하는데 응원단이 지원금을 받는 게 옳은 일인가, 지금은 이사회가 매니저들의 처우를 개선했지만, 한 번 박힌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지금처럼 어색한 동거로 충분해.’

응원이 하고 싶다면 하면 될 거 아닌가.

굳이 야구부와 통합을 하는 건 무리수, 다른 부원들 생각도 마찬가지라 입장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그 녀석의 빈자리가 이렇게 클 줄이야.’

하지만 후속타자들이 아웃되면서 다이이치는 또 득점에 실패했다.

득점권 찬스를 살려주던 쿠로다의 빈자리가 이렇게 컸다니, 대체자가 없다는 현실에 후루타 감독의 생각은 복잡해졌다.

이날 경기는 4대 1, 다이이치의 승리로 끝났지만 맥이 끊기는 공격력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좋은 게임이었네. 자네들 예전보다 실력이 늘었군.”

“글쎄요. 저희들이 강해진 게 아니라 다이이치의 실력이 떨어진 것 아닐까요?”

경기가 끝난 후, 후루타 감독은 역투를 펼친 마아타케를 칭찬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가슴을 후벼 파는 독설, 틀린 말도 아니라 후루타 감독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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