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새출발 - (6)
[그럼, 경기는 언제쯤 가능할까요?]
“글쎄요. 일정을 조정하는 중이라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한편, 다이이치 야구부의 다나카 코치는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예전엔 연습상대를 찾아다니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도전장이 날아온다.
후루타 감독은 계약기간이 정해진 임시교원이지만 다나카 코치는 정식교원, 정규수업에 야구부 지도도 해야 하는데 연습경기 일정까지 일일이 관리하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역시 내가 도와줄까?”
타카코 선생님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기왕 하는 부활동이라면 같이하는 게 좋을 텐데, 적극적인 구애를 펼쳤지만 다나카 코치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시엔 본선 진출하면 야구부는 그만둔다고 했는데, 결국 손에서 놓지 못했다.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 한 것도 부끄러운데 애인의 손까지 빌리고 싶진 않았다.
“참, 내일 연습경기 한다고 했지. 응원해줄까?”
“또 통합얘기 꺼내려고 그러지?”
타카코 선생님은 예전부터 야구부 응원단 창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쪽과 우리는 갈 길이 다른 운명, 야구부는 통합을 정중히 거절했고 지금도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승 한번 했다고 콧대가 너무 높은 거 아냐?”
“언제 콧대를 높였다고 그래.”
다나카 코치는 토라진 애인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슬슬 프러포즈를 해야 되는데, 쓸데없는 말만 오가면서 무드가 잡히질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급함은 더해졌지만 이런 건 타이밍이 중요, 차분하게 기회가 오길 기다렸다.
“자기야, 나 물어볼 거 있어”
“뭔데?”
“다카기 걔 역시 인기 많지?”
왜 화제가 그 녀석 쪽으로 흐르는 건가. 그래도 다나카 코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쳐줬다.
“인기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녀석은 그런 건 신경도 안 써.”
“에이 ~ 거짓말”
타카코 선생님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왜 그렇게 복장이 불량하냐고 트집을 잡았을 때, 다카기는 이래야 여자들이 관심을 준다는 농담으로 받아쳤다. 그런데 관심이 없다니, 믿기 어려웠다.
“거짓말 아니야. 그 자식이 평소 하는 말이 있어.”
“뭐라고 하는데?”
“지금 팔리기엔 자기가 너무 아깝다고 하더라고”
다카기는 평소 부원들과 잡담을 나눌 때, 연애는 전혀 관심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창 주가가 오르고 있는데 누군가에게 팔리는 건 손해 아닌가, 심지어 연애는 내 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린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며 부원들을 세뇌시켰다.
“진짜 그런 말을 했어?”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 봐.”
타카코 선생님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15살이면 한창 이성에 관심 있을 나이 아닌가. 그런데 자기계발이 더 중요하다니, 연애는 가슴으로 하는 거지 등가교환이 그렇게 중요할까.
역시 그 녀석은 특이한 녀석이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 ··· 나는 지금 팔려도 상관없지만 ··· ”
기회를 엿보던 다나카 코치는 슬쩍 속마음을 드러냈다.
물론 타카코 선생님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엔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 * *
“감독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연습경기 당일, 후루타 감독은 사카이 라이노스 홍보팀에 소속된 키타노와 얼굴을 마주했다.
지난 여름, 키타노는 지역예선에 참가하는 야구부를 살펴보라는 상부의 명을 받고 다이이치 고교를 방문했다.
이시다는 예전부터 유명했지만 다카기를 발굴한 건 예상 밖의 수확, 사카이 라이노스는 일찌감치 밑밥 뿌리기에 나섰다.
“오늘도 다카기 선수는 출전하는 겁니까?”
“예,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렇게 되겠지요.”
고등학교 커리어는 공식경기만 집계되는 게 아니다.
연습경기도 기록에 포함되고 프로구단은 이를 토대로 드래프트에서 뽑을 선수를 결정한다. 물론 연습경기 기록은 의미가 없다고 평가하는 스카우터도 있지만, 다카기는 고시엔과 세계대회에서 자신의 기량을 증명했다.
북적이는 손님은 다카기가 받는 관심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증거, 프로구단 관계자에 기자들까지 몰려오면서 다이이치 고교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왔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도우묘 고교 야구부, 기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정문으로 몰려갔다.
다른 자리도 많은데 명성도 없는 야구부 동아리를 책임지다니, 협회를 탈퇴했다고 막 나가는 건가. 기자들은 왜 도우모 고교를 택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마시시게는 쏟아지는 질문에 손을 저었다.
“오늘은 경기를 하러 온 것뿐입니다.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마사시게는 끝내 기자들을 외면했다.
현역시절부터 언론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을 한 것도 아니라, 쏟아지는 관심이 약간 불쾌하게 다가왔다.
‘많은 게 변했구나.’
그 사이, 도우묘 고교 야구부원들은 다이이치 야구부의 달라진 위상을 눈에 담아뒀다.
첫 연습경기 때도 제법 많은 기자들이 이곳을 찾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에 학교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릴 안내하는데 예전에는 볼 수 없던 광경이다.
‘집에 가고 싶어’
‘난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때는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에서 편하게 경기를 치렀는데, 급기야 현실에서 도망치는 부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너희들 갑자기 왜 그래? 우리 전에도 한 번 붙어봤잖아.”
대기실에 입성한 마이타케 카즈노리는 부원들을 다독였다.
감독님 말대로 패배를 두려워하는 건 의미가 없다. 지금은 경기를 치르며 기량을 가다듬는 게 최선, 뭣보다 지역예선에선 이보다 더 많은 인파 속에서 경기를 치러야 한다.
겨우 이 정도로 위축되면 무슨 재주로 지역예선에 참가할 수 있을까. 눈치를 살피던 한 부원이 슬쩍 입을 열었다.
“역시 지금 다이이치와 붙는 건 너무 성급하지 않을까?”
뭐든 순서라는 게 있는데 다짜고짜 최종보스와 맞붙다니, 다른 야구부가 연습경기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머리를 숙였다면 어떻게든 됐을 거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런 말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인가, 마이타케는 단호한 목소리로 부원들을 다그쳤다.
“경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패배를 생각하면 어쩌자는 거야?”
“아니 ··· 그건 아니지만 ··· ”
“우리 여기 놀러온 거 아니야. 뭘 얻어가야 할지 그것만 생각해”
다른 건 몰라도 야구만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캡틴, 오합지졸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감독의 말에 집중했다.
“이건 내 감독 데뷔전이다. 기왕이면 나도 이기고 싶지만, 지금 너희들에게 승리를 기대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 캡틴 말대로 뭘 얻어가야 할지 그것만 생각해라.”
학생들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
처음부터 승리를 기대하지 않았다니, 하지만 그게 우리의 현 주소 아닌가. 야구를 즐기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동아리 활동이지만 이제는 팀 컬러가 바뀌고 있다.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될 뿐, 흐트러진 정신 상태를 바로 세웠다.
* * *
“야, 너 오늘 연습경기 있는 거 아니냐?”
“안 도망치니까 걱정하지 마.”
떠들썩한 바깥 분위기와 달리 오늘도 평온한 교실, 다카기는 청소에 집중했다.
경기와 청소는 별개의 문제, 경기가 있다며 먼저 가버리면 친구들이 이해해 줄까? 조금 유명해졌다고 민폐 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다카기 군, 여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먼저 가 봐.”
“날 매너 없는 놈으로 만들지 말라고”
이나바 키리코가 슬쩍 등을 밀어줬지만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멋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 뒷정리가 끝나자 키리코는 귀가도 미루고 그라운드로 향했다. 야구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석처럼 끌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히이익 ~ 이게 다 뭐야?’
재학생에 외부에서 온 손님까지 뒤섞이면서, 그물망 밖은 발 디딜 틈 하나 없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구경은커녕 귀갓길도 만만찮은 상황, 그 자리에서 폴짝 뛰어봤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교실에선 보일 거야.’
키리코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거리, 그래도 마음만은 그 곁에 있다는 혼잣말을 위안으로 삼았다.
“와아아 ~ !!”
한편, 지각생은 관객의 환호를 받으며 그라운드에 입성했다.
오늘은 왜 안보이나 했는데 역시 주인공은 늦게 등장한다는 건가, 하지만 후루타 감독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주축 선수가 소식이 없으니, 사람을 보내 찾아볼까 했는데 제 시간에 나타난 건 다행이었다.
“너 뭐하다가 이제 오는 거냐?”
“오늘 청소당번이라 늦는다고 어제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 ··· 아, 그랬었냐?”
벌써부터 정신이 오락가락하다니, 후루타 감독은 얼른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라며 민망한 상황을 어물쩍 넘겼다.
‘거짓말인데’
다카기는 감독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혀를 비쭉 내밀었다.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깜빡한 건 이쪽, 그래도 뻔뻔할 정도로 태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너 몸 안 풀고 경기해도 되냐?”
“지금부터 하면 되요.”
다나카 코치의 애정 어린 참견도 여유롭게 받아넘겼다.
연습경기가 있는 날에 체력훈련은 생략하는 게 다이이치 야구부의 루틴, 수비 - 타격 훈련은 매일 하던 것 아닌가.
몸 풀기는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끝냈다.
‘저 녀석이 유격수를 보다니, 그땐 상상도 못했는데’
한편, 도우묘 고교의 마사시게 감독은 다카기를 예의주시했다.
4년 전만 해도, 다카기는 정면타구 처리에 애를 먹었다. 그래서 일반적인 유격수 위치보다 뒤에 자리를 잡곤 했는데, 이건 기본기도 없는 애송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랬던 아이가 고시엔을 제패하고 세계가 주목하는 유망주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화살처럼 지나간 세월을 실감했다.
‘이젠 두려울 게 없어.’
1회 초 도우묘 고교의 선공으로 시작된 경기,
초구부터 유격수 땅볼이 나왔지만 다카기는 당황하지 않고 깔끔한 수비를 선보였다. 지금도 정면으로 오는 느린 타구는 약간 껄끄럽지만, 올챙이 시절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이뤄냈다.
‘도망치면 안 돼. 이럴수록 더 치고 나가야 된다고’
불규칙 바운드가 무섭다고 뒤로 물러나면 어쩌자는 건가.
늦게 잡고 빠르게 송구하면 된다?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약점을 커버하는 프로 선수들도 있다. 하지만 늦게 잡은 만큼 시간에 쫓기는 게 현실, 급한 송구는 결국 실책으로 이어진다.
‘빠르게 잡고 여유 있게 던진다.’
수비를 두고 고민하던 중학교 시절의 다카기는 이 방식으로 약점을 이겨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타구를 향해 돌격, 어깨는 강한 편이라 송구가 약간 늦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한때 외야로 자리를 옮기라는 굴욕적인 제안도 받았지만 이제 누가 감히 그런 말을 하겠는가, 자신감은 얼굴과 행동으로 드러났다.
‘내가 딱히 할 게 없는데’
사카이 라이노스 구단에서 온 스카우터는 어떻게든 흠집을 내보려 했다.
하지만 저런 플레이를 앞에 두고 평가를 내리는 건 어리석은 짓, 관객이 된 마음으로 유망주의 활약을 감상했다.
“호시노 씨, 왜 아무것도 안 적으시는 겁니까?”
“적을 게 뭐가 있겠나. 자네도 그냥 즐기라고”
“하지만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 ”
“그냥 본대로 보고하게.”
선수평가에 누구보다 엄격한 호시노 씨가 이런 평가를 내리다니, 키타노는 말없이 그 옆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