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새출발 - (5)
‘그래, 어떤 놈이 보냈는지 한 번 보자.’
어느 날, 고영길은 의문의 편지 한 장을 손에 쥐었다.
회장직을 지냈던 교토본부 야구협회를 통해 입수한 물건, 또 조선인이면 일본에서 꺼지라는 협박인가.
협회 관계자들이 알아서 조치하겠다는 뜻을 전해왔지만 고영길은 사람을 시켜 편지를 가져오게 했다. 그런 하찮은 협박을 한두 번 당해 본 것도 아니고, 편지를 펼치는 손에 망설임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저는 도우묘 고교에 재학 중인 마이타케 카즈노리라고 합니다.]
첫 문구를 읽은 고영길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들썩였다.
나름 자극적인 도발을 기대했건만, 서두가 너무 얌전해서 간만에 기합이 들어간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저는 지금 야구 클럽을 이끌고 있습니다. 인원은 아직 11명이지만 언젠가는 지역예선에 출전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서두, 긴 말을 싫어하는 고영길은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동안 나름 애는 써봤지만, 역시 의지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회장님은 평소 세상에는 투자할 곳이 많지만, 사람에 투자하는 것만큼 값진 것은 없다고 말씀하셨죠? 그럼 저희들에게 투자해주세요.]
경제적 형편이나 이런 저런 이유로 꿈을 접어야 하는 청소년들이 얼마나 많은가,
솔직 담백한 고백은 사라져 가는 꿈을 수없이 되살려낸 늙은 호랑이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지원을 할 순 없는 노릇, 이 세상엔 그럴듯한 사연을 앞세워 돈을 뜯어내는 쓰레기들이 넘쳐난다.
편지를 보낸 소년의 꿈을 향한 열정이 사실인지, 일단 그것부터 확인했다.
“자네가 가서 살펴보게.”
[글쎄요. 아무리 회장님의 말씀이라도 너무 갑작스럽습니다만 ··· ]
“자네 요즘 할 일도 없지 않은가. 쓸 만한 녀석들이면 자네가 좀 도와줘, 지원은 내가 할 테니까.”
고영길은 킨타 마사시게를 소환했다.
마사시게는 U-15 대회를 후쿠시마에서 치르려는 협회와 대립각을 세우다 야구계를 떠났다. 그렇잖아도 그 친구가 실업자가 된 게 마음에 걸렸는데, 이번 기회에 지도자로 새출발을 해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고교야구라 ··· ’
통화를 마친 마사시게는 생각에 잠겼다.
협회와 한 번 싸웠다고 야구에 대한 애정까지 사라졌겠는가. 때에 물든 어른보다는 순수함이 남아 있는 소년들을 상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결심이 서자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자네가 회장님께 편지를 보냈나?]
“예 ··· 그렇습니다.”
통화를 받은 마이타케 카즈노리는 얼어붙었다.
통산 493홈런을 기록하며 프로야구의 한 시대를 이끈 전설과 통화를 나누다니, 너무 놀라서 혀까지 굳어버렸다.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했으면 하는데, 내일 모레 시간 어떤가?]
“예, 저희는 언제든지 괜찮습니다.”
캡틴의 비상호출을 받은 도우묘 고교 야구 클럽은 대책회의를 열었다.
지원 좀 해주셨으면 하고 편지를 보낸 건 사실이지만 킨타 마사시게의 등장은 너무 뜬금없지 않은가. 그래도 가능하면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야, 일단 청소라도 할까?”
“너무 가식적인데,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참신하지 않아?”
“넌 이게 참신해 보이냐?”
먹다 만 과자봉지에 여기저기 널브러진 수건과 옷가지, 여기에 정체불명의 비릿한 냄새까지 풍기는 부원실, 지도교사도 없는 수컷들의 자유공간이라도 이건 너무 심각했다.
이날 도우묘 고교 야구부는 손님맞이 준비로 분주한 하루를 보냈고, 킨타 마사시게는 예고한 시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눈에 봐도 철저한 원칙주의자, 도우묘 야구 부원들은 긴장한 얼굴로 손님을 맞이했다.
“지역예선 출전이 목표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하하 ~ 꿈이 현실적이라 좋군.”
킨타 마사시게는 비현실적인 목표, 장기적인 비전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이란 늘 예상을 빗겨가는 법, 그때그때 맞춰나가는 게 인생 아닌가.
일개 야구 동아리가 고시엔 우승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앞세웠다면 비웃었겠지만, 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학생들이 나쁘게 보이진 않았다.
“연습경기 경험은 있나?”
“예, 한 경기 뿐이지만요.”
“결과는 어땠나?”
“14대 1로 졌습니다!!”
뭐 자랑할 일이라고 자랑스럽게 목소리를 높이는 건지, 그래도 마사시게는 녀석들이 마음에 들었다.
운동을 하는 녀석들이 패배를 당연하게 여겨선 안 되지만, 지금은 지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된다.
열악한 상황에서 대패도 해보고 어떻게든 길을 찾겠다며 발버둥치는 게 우선, 회장님께 도움을 청한 것도 기특하게 받아들였다.
“혹시 지금 부원 모집하고 있나?”
“예, 얼마 전에 한 명 또 받았습니다.”
“그럼 나도 끼워주게”
부원실은 발칵 뒤집어졌다.
나도 끼워달라니 이게 뭘 뜻하겠는가.
명문 야구부를 지휘할 사람이 이런 근본도 없는 야구 동아리 지휘봉을 잡겠다니, 마이타케는 정말 그렇게 해주실 거냐며 거듭 되물었다.
“남자가 한입으로 두말하면 안 되지, 앞으로 자네들과 함께하겠네.”
“ ··· 감독님!!”
마이타케와 부원들은 마사시게 목에 족쇄를 채웠다.
감독이라고 불렀으니 이제 와서 도망쳐 봤자 본인만 망신, 마사시게의 등장은 그동안 야구부에 조금도 관심이 없던 도우묘 고교 이사회를 뒤흔들었다.
“정말 여기로 오시는 겁니까?”
“예, 학생들 지도하려면 여기 교원으로 등록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당연하지요. 환영합니다.”
이사회는 지금이라도 지원금을 대겠다며 뒷북을 쳤다.
회장님에게 지원금을 받아도 되지만 언제까지 그 분 신세를 질 순 없겠지, 마사시게는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나도 달라져야겠어.’
마사시게는 자존심이 강하고 굽힐 줄 모르는 성격 때문에 현역 시절 주변 사람들과 불화가 잦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493홈런을 때린 전설, 프로야구 협회 위원이라는 영광도 이제는 옛말, 지금은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저씨에 실업자일 뿐이다.
이런 나를 흔쾌히 감독으로 받아준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조금은 달라져야 했다.
“도우묘 야구부?!! 아니, 거긴 또 어디야?!!”
마사시게의 행보는 키타마치 고교를 발칵 뒤집어 놨다.
키타마치는 히라카시와 함께 오사카를 대표하는 야구 명문, 하지만 지난 고시엔에서 예선 탈락 고배를 마시면서 대대적인 개혁에 돌입했다.
목표는 타도 다이이치, 일단 유능한 타격코치를 모셔오는 일에 집중했다.
현역시절 나고야의 곰이라 불리며 호쾌한 장타를 뽐낸 마사시게가 그 대안이었는데, 우릴 버리고 이름도 없는 야구 동아리 지휘봉을 잡다니, 너무 당황스러웠다.
“아니, 위원님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분명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생각해본다고 했지 받아들인다는 말은 한 적 없습니다.]
“아니 ···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 ”
[관심 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자리가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런 초라한 야구 동아리보다 못하다는 건가, 키타마치 야구부 부장은 바로 보복에 나섰다.
야구부 명문답게 키타마치는 오사카 일대의 야구부와 연습경기 협약을 맺었다.
마사시게가 지휘봉을 잡는다고 동아리가 하루아침에 수준 있는 팀으로 바뀌나? 뭣보다 지역예선 통과를 노리는 A ~ C급 야구부는 수준 있는 연습상대를 원한다.
동아리 따윈 상대해봤자 몸 풀기도 안 되겠지, 여기에 키타마치 야구부의 압력까지 더해지면 도우묘 야구부가 연습상대를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여간 어른들이 더 유치하군.’
마사시게는 키타마치 야구부의 행보에 분노했다.
코치직을 수락한 것도 아니고 생각해보겠다고 답을 한 게 전부다. 그리고 어딜 가든 내 자유인데 그런 이유로 연습경기를 방해하려 하다니, 야구 명문이라고 잘난 척 하는 건가.
안 가길 잘했다며 보란 듯이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저희 다이이치 야구부와 연습경기 협약 맺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감독님이 허락하신다면 제가 추진해보겠습니다.”
하지만 도우쿄 고교 야구부는 대안이 있었다.
설마 그날 맺은 인연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마이타케는 다이이치와의 연습게임을 제안했지만 마사시게는 대답을 망설였다.
‘설마 악연이 이렇게 이어질 줄은 ··· ’
현역시절, 킨타 마사시게는 덴카쿠 호크스(現 요코하마 웨일스)를 상대로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다.
통산 타율이 0.281인데 덴카쿠만 만나면 0.322로 뛰어올랐고 무려 49홈런을 빼앗아냈다.
상대 입장에선 거의 저승사자, 뭣보다 당시 덴카쿠 호크스의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던 선수는 현재 다이이치 야구부의 감독을 맡고 있는 후루타 오기야스였다.
‘넌 확실히 밟아놔야겠다.’
마사시게에게 거듭 당한 덴카쿠 호크스는 도망치는 승부와 위협구를 적절히 섞어가며 마사시게를 견제했다.
물론 이런 리드는 타자의 심기를 건드리기 마련, 집중 견제에 짜증이 난 마사시게는 어느 날 홈 승부를 가장한 몸통박치기를 해버렸다.
부상 경력 때문에 기량이 하락한 후루타 오기야스는 불필요한 충돌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지면서 두 사람의 악연은 시작됐다.
젊은 시절, 승부욕을 불태우다 벌어진 일이지만 그날의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거기다 감독 대 감독으로 만나게 됐으니 이런 악연은 또 없었다.
“감독님?”
“응? 지금 뭐라고 했나.”
“연습경기 추진해도 되겠습니까?”
“뭐 ··· 권유는 해 보게.”
감독의 허락을 구한 마이타케는 다이이치에 연습게임을 제안했다.
지난번엔 14대 1 완패했지만, 도우묘 고교 야구부도 그동안 나름대로 연습에 열을 올리며 실력을 키웠다.
이번에는 조금이라도 격차를 좁혀야겠지, 마사시게 감독의 염려와 달리 다이이치는 흔쾌히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번엔 자네가 도망 다녀야 할 걸?’
현역 시절, 후루타 감독은 마사시게를 상대로 도망치는 리드를 하다 겁쟁이라는 모욕을 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후루타 감독은 인고의 세월 끝에 다이이치 야구부를 일본 정상에 올려놨다. 그에 비해 상대는 이제 막 지휘봉을 잡은 초짜 감독, 야구부 전력도 비교대상이 못 된다.
겁쟁이라는 모욕을 되갚아줄 절호의 기회, 물론 학생들은 그런 고리타분한 배경 따윈 알지도 못했다.
‘아저씨를 몇 년 만에 뵙는 거지?’
다카기는 마사시게 감독과의 만남을 내심 기대했다.
집안 사정 때문에 야구를 포기할 뻔 했던 소년의 꿈을 현실로 이뤄준 사람이 누구인가. 마사시게는 고영길에게 받은 은혜를 손자에게 갚았다.
“감독이 투구 폼을 바꾸라고 했다고?”
[네. 아저씨는 그게 옳다고 생각하세요?]
“미친 소리!! 그거 어떤 놈이야?!!”
중학교 시절, 다카기는 감독으로부터 투구 폼을 교정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하지만 유격수는 사이드 암으로 투구를 하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폼, 이걸 억지로 교정하면 나중에 송구를 할 때도 문제가 발생한다.
마사시게는 감독이 뭐라고 해도 지금 폼을 유지하라고 했고, 이후 다카기는 감독과 사소한 마찰을 일으켰다.
‘아저씨 말이 무조건 맞는 건 아니겠지만, 나도 이게 편해.’
사이드 암으로 던지는 게 제일 편한데 왜 폼을 교정해야 하는가.
감독이 압력을 넣든 말든 소신을 지켰고, 이후에도 궁금한 게 있으면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어 발전 방향을 두고 토론을 이어갔다.
상대는 내게 프로 레벨의 야구지식과 기술을 전파해준 은인, 다카기는 이번 연습경기에서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발전했다는 걸 보여주면 아저씨도 뿌듯해 하시겠지,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