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64화 (64/361)

64화. 새출발 - (4)

“너희들 이래가지고 설욕 하겠어?!!”

이곳은 오사카의 야구 명문 히라카시 고교, 3학년들이 은퇴하면서 이곳도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지난 고시엔 지역예선에서 다이이치에게 패한 히라카시는 추계대회에서 치욕을 설욕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하지만 생각만큼 따라와 주질 못하는 부원들, 마음이 다급한 만큼 캡틴의 목소리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난 절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겠어.’

올 여름, 히라카시 야구부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캡틴 히라타니와 이마이의 충돌, 여기에 성적 부진까지 겹치면서 지역예선 탈락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받아들었다.

오사카 최강이라 불리던 우리가 왜 이렇게 몰락한 걸까? 새로운 캡틴이 된 고토부키 세이치(2학년)는 그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했다.

‘따라오지 못하는 놈들은 버려야지’

전(前) 캡틴 히라타니는 권위주의적인 야구부 분위기를 개혁한다며 학부모 협회와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 결과 실력우선주의를 앞세우는 이마이와 대립, 팀 분위기는 엉망이 되고 전력까지 하향평준화 돼 버렸다.

‘이마이 선배가 옳았어, 우린 놀이를 하는 게 아니라고’

고토부키 세이치는 제 2의 이마이가 되는 길을 택했다.

하라타니 선배는 인성도 실력도 나무랄 게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조직을 이끌기엔 부적합 했던 사람, 이마이 선배가 캡틴이 되고 히라타니 선배가 그 곁을 보좌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엉뚱한 길로 접어든 야구부를 바로잡았다.

“나 안 해.”

물론 급진적인 개혁은 저항에 부딪쳤다.

히라타니가 불려 놓은 부원수는 고토부키가 캡틴으로 취임하면서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처음부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부활동, 이런 학생들이 투지와 열정을 강조하는 분위기에 동의할 리 없었다.

‘상관없어. 처음부터 다 허상이었던 거야.’

물론 고토부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다이이치는 50명도 안 되는 부원으로 고시엔 우승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동안 히라카시는 과거의 명성과 머릿수에 의존하고 있었을 뿐, 떠나는 자들에게 미련 두지 않았다.

“또 줄었어?”

“네”

물론 야구부장은 이런 흐름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동안 이사회의 신임을 믿고 감독의 권한까지 침범하며 권위를 누렸지만, 이사회가 또 그러면 재미없을 거라는 경고를 주면서 야구부를 지원하는 입장으로 돌아왔다.

체면을 세우려면 성과를 내야하는데 부원이 절반으로 줄어들 줄이야,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게 아니냐며 아라이 감독과 얼굴을 마주했다.

“본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뿐입니다.”

물론 아라이 감독은 참견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외부의 참견에 시달렸는가.

야구도 모르는 놈이 부장 행세를 하고, 학부모 협회와 연줄이 있는 일개 학생이 팀 정책을 주도하고, 여기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원로들까지, 내색은 안 했지만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지역예선 패배 후 은퇴를 선언했는데, 나는 왜 돌아와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인 건가?

지난날의 아쉬움을 설욕하겠다는 욕심도 있었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제는 누구도 간섭 못 해.’

이사회의 총애를 믿고 까불던 야구부장은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

여기에 애증의 관계였던 히라타니는 은퇴, 원로들은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그라운드를 떠나면서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지역예선 탈락으로 체면은 바닥에 떨어졌지만 덕분에 히라카시 야구부는 새출발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부원이 떨어져 나가도 아라이 감독은 조급해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뭔가 아닌 것 같은데’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영화가 흥행하려면 선역과 악역의 호흡이 중요하다. 어느 한 쪽이 너무 두드러지면 극중 긴장감이 무너지기 마련, 조직을 이끄는 것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악역은 내가 했으면 좋겠는데’

아라이 감독은 자신이 악역이 되고, 고토부키는 팀원들의 존중을 받는 선역이 되길 바랐다.

야구부장 - 학부모 협회 - 원로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감독이 믿음직스럽지 못해 스스로 악역을 자처한 건 아닐까?

녀석의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 날을 잡아 얼굴을 마주했다.

“난 네가 팀원들에게 존중 받는 캡틴이 되길 원한다. 그러니 앞으로 악역은 내게 맡겨줄 수 없겠냐?”

진심이 담긴 말에 고토부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정해진 배역, 이제 와서 선역으로 돌아서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선역 역할은 감독님 몫으로 돌렸다.

“제가 이런 말 한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솔직히 감독님은 모질지 못하시잖아요. 악역이라는 배역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 귀가 아픈 말이구나. 정말 그렇게 생각 하냐?”

“예, 제게 부족한 부분은 감독님이 채워주세요.”

이렇게 히라카시 야구부는 선역과 악역의 역할을 완벽히 구분했다.

당길 땐 당기고 풀어줄 땐 풀어주는 분위기가 확립되면서 급속히 줄던 머릿수도 유지됐고, 그렇게 설욕을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 * *

“하나 더!!”

한편, 다이이치 고교도 왕좌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악역을 자처했던 몸이지만, 군기반장 사나에가 은퇴하면서 다나카 코치는 평소보다 더 엄격하게 학생들을 지도했다.

‘하나 받고 하나 더 가시죠.’

이게 벌 써 몇 번 째 펑고인가.

카운트를 체크하던 매니저도 이젠 집계를 포기할 정도, 하지만 다카기는 조금도 지친 기색 없이 다음 타구를 요구했다.

‘네 재능은 남김없이 이용해주마. 그게 내가 할 일이니까.’

다나카 코치도 그 열정에 응해줬다.

주전과 벤치의 전력 차가 크지 않아야 강팀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건 희대의 개소리다. 이 세상에 그런 팀이 정말 존재할까? 어느 스포츠를 따져 봐도 주전과 벤치의 기량 차는 현격하다.

주전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해 승리를 이끄는 건 지도자의 능력, 투구 수가 70개를 넘기면 근육 조직이 파괴되는 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그럼 70개만 쓰고 강판 시키는 게 감독이 할 일인가?

일부 팬들은 감독의 선수 활용을 두고 혹사다 뭐다 참견을 늘어놓는데, 본인이 지휘봉을 잡아도 다를 거 없다.

다카기는 이제 팀의 핵심 선수, 코치 입장에선 그 재능을 남김없이 이용해야 했다.

‘이건 너무 심하잖아.’

그런 속마음을 알 리 없는 학생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펑고에 겁을 집어 먹었다.

도대체 이게 몇 개째인지, 다무라 히로시는 마른 침을 삼키며 자기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좋아, 여기까지”

“조금 더 해도 되지 않을까요?”

다카기는 아직 만족 못했다는 표정, 그래도 다나카 코치는 저리 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다른 선수도 살펴야지 언제까지 저 녀석만 붙잡고 있을 순 없었다.

‘뭐야, 나는 이걸로 끝?’

겨우 각오를 다졌는데 생각보다 일찍 끝난 훈련, 다무라는 코치의 눈치를 살폈지만 공은 날아오지 않았다.

‘코치님이 너한테 기대하는 게 그 정도라는 뜻이겠지.’

한편, 벤치에 앉은 다카기는 물을 들이키며 훈련을 지켜봤다.

여기서 괴롭힘은 관심의 다른 표현, 훈련이 부족하다 싶으면 코치에게 더 해 달라고 해야 하는데, 다무라 저 녀석은 그런 게 없다.

형제들과의 경쟁에 밀린 새끼는 젖도 못 얻어먹기 마련, 저래서야 성장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감독님도 오늘 저랑 땀 좀 빼시죠.”

다카기의 제안에 후루타 감독은 뜨끔했다.

50이 넘은 내가 이 녀석의 체력과 욕구에 맞춰줄 수 있을까, 그나마 체력이 좋고 젊은 다나카 코치에게 훈련을 위임했지만 언제까지 저 친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순 없겠지.

오랜만에 몸을 풀어보기로 했다.

“뭘 어떻게 하자는 거냐?”

“가볍게 프리배팅이나 하시죠.”

후루타 감독은 도전을 받아들였다.

나는 왕년에 올스타에도 뽑힌 프로 출신, 고시엔에 세계대회도 제패한 하룻강아지는 지금 무서울 게 없다.

늙었어도 호랑이는 호랑이, 겁 없는 제자에게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의욕을 앞세웠다.

“농담으로 한 말이에요. 괜히 무리하다 다치시는 거 아니에요?”

“사내자식이 이제 와서 무르는 거냐? 이미 늦었다.”

평소 체력 단련도 안 하시는 분이 이러다 다치는 건 아닌지, 다카기는 장난이었다고 말렸지만, 이젠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깡 ~

“어이쿠 ~ 잠깐만”

하지만 후루타 감독은 시작부터 체면을 구겼다. 공을 띄워야 되는데 주구장창 땅볼만 치고 있으니, 제자들 앞에서 고개를 들기 민망했다.

“계속하세요. 홈런 나올 때까지 연습으로 쳐드릴게요.”

다카기는 이 와중에도 감독을 자극했다.

호랑이가 늙었다고 하룻강아지가 짖어대는 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후루타 감독은 왕년의 파워를 어렴풋이 재현해 냈다.

까아앙 ~ !!

“오 ~ 나이스 샷 ~ ”

경쟁자가 막판 스퍼트를 내는데도 여유가 넘치는 하룻강아지,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세월의 벽에 막힌 호랑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대략 30번 정도 휘두른 것 같은데 벌써 지치다니, 나이는 역시 먹고 싶지 않다며 흘러간 세월을 원망했다.

‘저건 아닌데’

다카기는 감독님의 자세를 유심히 살폈다.

힘이 빠지면서 상체만 움직이고 있는데 평소 감독님이 절대 해선 안 되는 스윙이라고 주의를 주던 자세 아닌가. 뭣보다 부상 위험이 높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감독님, 지치신 것 같은데 그 정도로 하시죠.”

“아직 멀었다!!”

오기를 부려봤지만 그물망과 타구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졌고, 후루타 감독은 완전히 뻗어버렸다.

그렇게 애를 썼는데 그물망에 닿은 건 2개 뿐, 지친 몸에 거친 숨을 불어넣었다. 이런 저질 체력으로 그동안 감독 모자를 쓰고 있었다니, 제자들 보기 민망해서 더그아웃으로 숨어버렸다.

‘나 이거 해야 돼?’

이제는 다카기 차례, 감독님을 이겨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안 하려고 했지만 얼른 내 목을 치라는 감독님의 요구에 떠 밀렸다.

최선을 다한 적장은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주는 게 예의, 의미 없이 시간을 끌진 않았다.

까아앙 ~ !!

초구부터 그물망 위를 훌쩍 넘어가는 대형타구, 마침 야구부 훈련을 지켜보던 학생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세계대회를 제패한 야구천재의 실력인가, 홈런타구를 잡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졌다.

까아앙 ~ !!!!

“또 왔다!!”

“이번엔 더 커!!”

“뒤로 가!! 뒤로!!”

홈런 볼 하나 잡겠다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관객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다카기는 손짓으로 저리 가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오히려 늘어나는 관객 수, 학우들의 안전을 위해 배트를 내려놨다.

“너 왜 그만두는 거냐? 지금 날 동정하는 거냐?”

“아니요. 애들 다치잖아요.”

후루타 감독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달린 그물망도 아파트 5 ~ 6층 높이는 된다. 다른 녀석들은 그물망 근처로 타구를 보내기도 버거운데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역시 이 녀석의 파워는 규격 외라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그물망을 좀 더 높여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 후, 후루타 감독은 이사회에 그물망을 높여달라는 제안을 넣었다.

그물망이 낮아 학생들이 마음 놓고 배트를 휘두를 수 없다는 게 이유, 하지만 이사회 관계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있는 그물망도 꽤 높지 않나. 그리고 곧 있으면 야구부 전용 구장도 완성되는데,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이걸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후루타 감독은 며칠 전 찍은 훈련 영상을 이사회에 공개했다.

다카기의 홈런 타구를 잡기 위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학생들, 부상자가 나온 다음에 그물망을 높이면 무슨 의미가 있나.

이사회는 바로 공사에 착수해 그물망을 더욱 높게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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