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새출발 - (3)
“미안하지만 너희들 듣기 싫은 소리 좀 할게.”
사나에의 첫 화살은 매니저 군단을 향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야구를 손에 놨지만, 중학교까지 야구부원으로 활약한 사나에는 매니저라는 역할에 사명감을 품었다.
후배 매니저들에게도 같은 각오를 심어주고 싶었지만 그게 강제로 될 일인가. 분위기가 어색해질까봐 그동안 내색은 안 했지만, 야구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래, 부활동은 즐기자고 하는 일이지. 하지만 매니저로서 해야 할 일은 신경 써 줬으면 좋겠어.”
사나에는 그동안 청소할 때가 되면 혼자서 부원실을 정리해 왔다.
어린 아들이 방청소를 해주는 엄마의 노고를 어찌 알겠는가. 아니, 도와주는 건 둘째 치고 무신경한 녀석은 누군가가 내 뒤치다꺼리를 해주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다.
40일 만에 돌아온 야구부, 사나에는 일단 부원실의 청결부터 살폈다.
전혀 관리가 안 된 상태, 그 긴 시간동안 누구도 관심이 없었던 말인가? 야구부에 애정이 있었다면 누가 한 번이라도 살펴봤을 텐데, 솔직히 실망했다.
“여기는 너희들의 보금자리야, 그만한 애정과 관심은 보여줘야지.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니?”
이어지는 질책에 매니저 군단은 고개를 숙였다.
평소 매니저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해주던 선배가 이렇게 무섭게 나올 줄이야, 뭣보다 남자들도 단숨에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갖춘 사람이라 변명이 통할 리 없었다.
“선배, 너무 야단치지 마세요. 저희들 잘못도 있어요.”
이때 다카기가 매니저 군단을 감쌌다.
청소가 누구 한 명의 몫인가. 그런 건 부원들이 조금씩 알아서 했다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다. 이곳은 야구부의 보금자리, 주인인 우리가 관리를 해야지 어떻게 매니저들을 탓하겠는가.
다카기는 이건 모두의 책임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은 왜 반응이 없니?’
사나에는 다른 부원들의 눈치를 살폈다.
다들 잘못한 건 아는지 고개를 들지 못하는데, 일단 총책임자인 요시다 를 다그쳤다.
“너 캡틴이잖아. 후배들이 혼나고 있는데 그렇게 멍하니 있을 거야?”
“아 ··· 아니요.”
요시다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 생각 없이 열고 닫았던 라커에 선배의 노고가 묻어 있었다니,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죄송하지만 그동안 야구부에 너무 무관심 했던 건 아닌가라는 생각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들 뭐 하고 있어. 얼른 청소 시작해.”
“네 ··· ”
이렇게 예정에도 없던 청소가 시작됐다.
하지만 평소 관심도 없던 일, 청소도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헤매는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 야구부의 주인이라는 녀석들이 이 모양이라니, 군기반장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그걸 마른 걸레로 닦으면 어떻게 해! 먼지 다 날리잖아!!”
“아 ··· 그런가요?”
“어휴 ~ 너희들 정말 ··· 젖은 걸레로 먼저 닦고 마른 걸레로 닦아야지.”
사나에는 격한 한숨을 내쉬었다.
청소를 해주는 게 아니라 알아서 하도록 했어야 했는데, 버릇을 잘못 들였다며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봤다.
야구에만 집중하라고 너무 오냐오냐 했던 게 문제, 오늘은 버릇을 고쳐주겠다며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너희들 지금 뭐 하냐?”
이때, 또 한 명의 희생양이 부원실에 입성했다. 때 아닌 대청소,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 다나카 코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 ~ 사나에 네가 웬일이냐?”
“코치님도 얼른 청소하세요.”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온 답은 단호했다.
정말 나도 해야 하는 건가, 다나카 코치는 바쁘게 움직이는 제자들을 지켜보다 슬쩍 그 대열에 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 그리고 사나에는 왜 여기에 있어?”
“설명 드리자면 좀 길어요. 일단 이것부터 끝내고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청소가 우선, 선배의 충고에 느낀 게 많은 다카기는 코치와 나누는 잡담도 최소화했다.
‘어서 오세요.’
부원들은 뒤늦게 입성한 감독에게 환영의 눈빛을 보냈다.
말하지 않아도 왠지 도와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 후루타 감독은 먼지라도 터는 시늉을 하면서 어색한 상황을 모면했다.
* * *
‘왜 아무도 없지?’
그 시각, 전(前) 캡틴 이시다는 텅 빈 그라운드 한가운데에 섰다.
지금은 부원들이 한창 훈련에 열중할 시간이다.
후배의 구원요청을 외면한 게 마음에 걸려 염탐을 왔는데 아무도 없을 줄이야, 그냥 집으로 갈까 했지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여 ~ 웬일이냐?”
이때 익숙한 목소리가 발에 족쇄를 채웠다.
역시 이번에 야구부에서 은퇴한 3학년 쿠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정을 끊었는데 뭔가에 끌리듯 여기까지 흘러오고 말았다.
“너도 요시다한테 부탁받고 온 거냐?”
“아니, 오랜만에 애들 얼굴이나 볼까 해서, 그런데 무슨 부탁을 받았다는 거냐?”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그동안 야구부를 이끌었던 캡틴과 부캡틴의 귀환, 하지만 이들을 반긴 건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는 사악한 눈빛들이었다.
‘아차, 최악의 타이밍이다.’
눈치가 빠른 이시다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봤자 거미줄에 뛰어든 파리 신세, 뭣보다 얼추 다 끝난 것 같은데 뒷정리라도 돕기로 했다.
“아 ~ 난 이제 손님인데 이게 뭐야.”
“네가 무슨 손님이야? 그리고 왜 책임을 나한테 떠넘겨? 너도 찔려서 여기 온 거지?”
사나에의 핀잔에 이시다는 입을 다물었다.
따지고 보면 요시다의 구원요청을 받은 건 이시다 아닌가. 그런데 그 책임을 매니저에게 떠넘겼으니 은근 신경 쓰였던 것도 사실, 청소가 끝날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훈련은커녕 청소로 날려 보낸 하루,
그 힘든 훈련도 매일 반복했는데 이게 뭐라고 앓는 소리가 나오는 건지, 이 힘든 걸 선배는 그동안 혼자서 했다는 건가?
하지만 사나에의 반응은 단호했다.
“한꺼번에 하니까 귀찮고 힘든 거지. 매일 조금씩 해두면 이렇게 안 해도 돼. 그러니까 평소에 하라고, 알았어?”
“네 ··· ”
“자,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훈련 쉬자.”
후루타 감독은 분위기 전환에 나섰다.
어차피 훈련은 물 건너갔고, 반가운 얼굴들과 소소한 연회라도 즐길까 했지만 사나에는 고개를 저었다.
“감독님, 죄송한데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아니 왜? 오랜만에 왔는데 좀 놀다 가라.”
“이제 겨우 정 뗐는데 여기 계속 있으면 심란해요.”
정말 이대로 이별인가, 후배들이 좀 더 있다 가라고 붙잡았지만 사나에의 의지는 확고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제 이곳의 주인은 너희들이야. 그것만 잊지 않는다면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다들 알았지?”
아까 들었던 말의 재방송, 그때는 잔소리로 들렸는데 왜 지금은 가슴에 박히는 걸까. 후배들이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는 동안, 사나에는 그동안 신세를 진 감독과 코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덕분에 많은 추억을 얻었어요.”
“감사하긴 ··· 내가 더 고맙다.”
“코치님도 감사드려요. 여기서 보낸 추억은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너 왜 다시는 안 올 사람처럼 말을 하냐. 생각나면 언제든지 와라.”
사나에는 뭔가에 쫓기듯 발걸음을 돌렸다.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온 눈물,
은퇴할 때도 안 울었는데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건지, 부끄러운 마음에 정문까지 전력 질주로 도망쳤다.
“야!! 거기 안 서?!!”
이시다는 자기도 모르게 그 뒤를 쫓았다.
이 정도면 따라잡아야 하는데 뭐가 저렇게 빠른 건지, 평소 부원들과 함께 뛰며 체력을 단련한 사나에는 좀처럼 추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도 쫓아가야 돼?’
눈 깜짝할 사이 시야에서 사라진 두 사람, 뒤에 남은 부원들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와 ~ 사나에 선배 잘 뛰네요. 아니, 따라가는 사람이 느린 건가?”
이때 다카기가 툭 던진 한마디가 분위기를 바꿨다.
하긴, 이시다 캡틴은 주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체력이 좋아 장거리 달리기에서 단점이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 그리고 누가 감히 캡틴을 앞지르겠는가? 다카기와 요시다가 하극상을 벌이기 전까지 그 어느 누구도 이시다의 주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다 지나간 일, 요시다는 뭔가 결심했는지 감독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희 운동장이라도 몇 바퀴 뛰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후루타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늘 훈련은 물 건너갔고, 체력이라도 단련하겠다는 제자들의 의지를 막을 이유는 없었다.
“다들 알겠지만, 난 이시다 선배보다 빠르다. 알아서 잘 따라와.”
달리기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는 요시다는 동료들에게 엄포를 늘어놨다.
선대 캡틴 이시다도 그랬지만, 다이이치 야구부는 뒤처지는 녀석을 끌고 가는 분위기가 아니다. 인원이 적은 만큼 소수정예로 밀고 가는 팀, 다들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알아서 잘 따라오시길’
이날도 다카기는 요시다와 레이스를 벌였다.
상대는 캡틴이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캡틴이라면 후배에게 뒤처지지 말라는 뜻으로 하극상을 반복했다.
‘절대 지지 않아. 이제는 내가 캡틴이라고’
잘난 후배를 둔 덕분에 요시다도 승부욕을 불태웠다. 천성이 자만하기 쉬워 누군가 자극을 주지 않으면 발전하기 어려운 유형, 추계대회에서 캡틴의 위엄을 세우겠다는 야망을 가슴에 품었다.
“너는 왜 안 뛰냐?”
“저 은퇴했잖아요. 그건 그렇고 이 자리에 있으니까 느낌이 새롭네요.”
한편, 쿠로다는 다나카 코치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지난 3년 동안 나도 저 녀석들처럼 죽기 살기로 뛰었는데, 지켜보는 입장이 되니 뭔가 어색했다.
“너 대학에 가도 야구 계속 할 거냐?”
“솔직히 모르겠어요.”
쿠로다는 얼마 전 호세이 대학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호세이는 일본 대학리그 최다 우승을 차지한 절대강자, 쿠로다는 평소 학업도 우수했고 이번 고시엔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좋은 제의를 받는 건 당연, 하지만 자신의 실력에 확신이 없었다.
“사내 녀석이 왜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해?”
“솔직히 그렇잖아요. 동료들 도움이 없었다면 제가 그런 활약을 할 수 있었겠어요?”
쿠로다는 이번 고시엔에서 최다 타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게 내 재능 덕분이었을까? 8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한 다카기와 캡틴 이시다가 밥상을 차려주지 못했다면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다나카 코치는 지나친 생각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정말 재능이 없다면 감독님이 널 3번에 배치하지도 않았을 거다. 사람에겐 다 자기만의 역할이 있는 거야. 넌 그동안 제 몫을 다 해냈어,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괜찮아.”
“그런 건가요?”
“그래, 다카기 저 녀석 좀 봐라. 얄미울 정도로 뻔뻔하잖아. 저 정도는 아니더라도 자신감을 가져라.”
기어이 캡틴을 이겨 먹는 건방진 녀석,
쿠로다는 그동안 부 캡틴으로 활동했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지나치게 외향적인 다카기와 잘 어울리지 못했다.
저 어린 나이에 팀 분위기를 주도하다니, 성격 차이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진 못했지만 그 실력과 리더십을 인정한 것도 사실이다.
‘나도 저렇게 팀을 이끌 수 있을까?’
대학에 진학하면 새로운 환경 또 다른 동료들과 마주하겠지.
소심했던 주인공이 인생 역전을 이뤄내는 스토리는 남의 이야기인가? 잠깐이지만 쿠로다는 그게 나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었다.
“코치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만간 또 뵐게요.”
“그래, 어느 길을 가든 응원한다. 넌 내 제자니까”
제자라는 말이 오늘따라 왜 이리 가슴을 뒤흔드는 걸까, 평소 감정 표현이 거의 없던 쿠로다지만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코치님도 타카코 선생님하고 잘 해보세요. 나중에 결혼하실 때 저 부르는 거 잊으시면 안 돼요.”
다나카 코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부끄럽게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말 대신 제자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