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62화 (62/361)

62화. 새출발 - (2)

“쟤 깨워라.”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 평온한 교실, 학구열에 불타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코골이는 선생님의 분노를 자극했다.

범인은 다이이치 야구부의 새로운 캡틴 요시다, 뒤에 앉은 친구가 일어나라고 몇 번 쳐봤지만 반응은 없었다.

“요시다!!”

참다 못 한 선생님의 불호령, 그제야 문제아는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후우 ~ 코치님인 줄 알고 깜짝 놀랐네.”

코치는 무섭고 난 아니라는 건가? 교실이 폭소에 뒤흔들리는 만큼, 선생님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개학한지 얼마나 됐다고 꿈나라야?!!”

“좀 봐주세요. 고시엔 피로가 아직 안 풀렸단 말이에요.”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선생님은 헛소리 하지 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고시엔 끝난 게 언젠데 고시엔 타령이냐?! 그리고 네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아 ~ 너무하시네. 저 지역예선 포함해서 4승했거든요? 학교의 명예를 드높인 학생한테 그런 말은 자제해주세요.”

말끝마다 토를 다는 문제아, 떠들썩한 2학년 B반과 달리 다카기가 있는 1학년 A반은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눈길이 가면 안 되는데 자꾸 가네.’

타카코 선생님은 자기도 모르게 다카기와 눈을 마주쳤다.

여름방학 동안 훈련이다 고시엔이다 세계대회다 쉬지도 못하고 2학기를 맞이했는데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자세, 장난기 넘치던 1학기와 너무 다른 분위기라 괜히 신경이 쓰였다.

‘넌 조금 더 노력해라.’

다카기는 담임선생님이 던진 충고를 지금도 가슴에 담아뒀다.

얼마나 성적이 어중간 했으면 그런 말을 하셨을까. 뭐든 철저하게 하는 성격이라 세계대회 우승에 들 뜰 여유도 없었다.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약간의 긴장감은 몸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전보다 더 멋있어 진 것 같아.’

한편, 이나바 키리코는 선생님의 눈을 피해 짝사랑 상대를 염탐했다.

예전부터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듬직해 보이는지,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거기 학생, 이 문제 한 번 풀어볼까요?”

“네?!!”

이나바 키리코는 어렸을 때부터 똑 부러지는 성격에 수재로 동네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한 눈 팔다 딱 걸린 건 이번이 처음, 너무 당황해서 몸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저 ··· 저기 ··· ”

“잘 모르겠어요?”

“네 ··· ”

타카코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적이 상위 1%안에 드는 아이로 알고 있는데 이 정도 문제를 못 풀겠다니, 그러려니 하고 다카기에게 바통을 넘겼다.

고시엔과 세계대회를 치르느라 선행학습도 못했을 텐데, 잘 따라올 수 있을까?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조금도 막힘없이 내려가는 손, 세계대회 중에도 숙소에 틀어박혀 펜대를 굴린 보람은 있었다.

“정답이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타카고 선생님은 대답 대신 눈웃음을 지었다.

빈 구석이 있어야 인간적인 매력이라도 느낄 텐데,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이 녀석은 빈틈이 거의 없다.

유명인이 됐다고 긴장의 끈을 더 바짝 조이는 건가? 야구부 코치를 맡고 있는 애인의 말에 따르면 훈련 강도도 예전보다 높였다고 하는데, 너무 피곤하게 사는 건 아닌지, 하지만 그렇게 친한 관계도 아니라 이래저래 간섭하기도 뭣했다.

“야, 양심이 있으면 공부는 대충해라.”

수업이 끝나고 다카기는 질투심에 불타는 친구들에 둘러싸였다.

그렇잖아도 요즘 여자애들은 다 이 녀석만 바라본다.

운동, 공부, 외모, 여기에 막대한 집안 배경까지, 너무 이기적인 것 아니냐며 불만을 중얼거렸다.

“그럼 너희들도 운동을 해. 책상 앞에서 연필이나 굴리는데 어떻게 남자의 매력을 어필하냐?”

다카기는 이 와중에도 야구부 홍보에 나섰다.

3학년이 대거 은퇴하면서 40명이 조금 넘던 야구부는 이제 27명으로 줄었다. 전력충원은 둘째 치고 야구부가 유지될 수 있을지도 의문, 하지만 친구들은 난색을 표했다.

“야, 우리 같은 초심자가 이제 와서 노력한다고 너처럼 될 수 있겠냐?”

“물론 힘들겠지. 하지만 초심자일수록 기량이 빨리 느는 것도 사실이야.”

다카기는 도화지를 예로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해 온 선수가 성공 가능성이 높을까? 오히려 잘못 배운 가르침이 몸에 배면 성장이 멈추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마디로 망친 그림, 다시 그리거나 수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새로 그린다고 내가 이전에 해왔던 방식을 완전히 버릴 수 있을까? 그림을 다시 그려봤자 예전과 다를 게 없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다카기 앞에 앉은 녀석들은 순수 그 자체,

당연히 고정관념에 얽매일 것도 없겠지, 방향만 잘 잡으면 성장 가능성은 충분했다.

“너희들은 지금 도화지 같은 상태야. 뭘 채워 넣느냐에 따라 망작도 예술작품도 될 수 있어,”

“나는 그냥 도화지로 살래, 망작이 되고 싶진 않아.”

하지만 호응을 이끌어 내는 건 쉽지 않았다.

뭐든 처음 하는 일에 두려움을 품지 않는가. 첫 발을 내딛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다카기도 강요는 하지 않았다.

* * *

“모집은 해 봤냐?”

“야, 말도 마. 이 자식 오늘 하루 종일 잠만 잤어.”

방과 후, 야구부는 한자리에 모여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지금 야구부에 필요한 건 사람, 이 인원으론 추계대회를 치르는 것도 어렵다. 내년에 들어오는 신입생에 기대를 걸어봐야 하나.

부원들은 나름대로 홍보에 나섰지만 건진 게 별로 없었다.

“야, 넌 캡틴이라는 자식이 뭐 하는 거냐?”

“아 ~ 시끄러워, 원래 캡틴은 실전에서 강한 거야.”

요시다는 선대 캡틴 이시다에 비해 나사가 일찍 풀리는 편이다.

새로운 캡틴으로서 감독과 동료들에게 믿음을 줘야 할 텐데, 이 녀석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같은 2학년이지만 동료들도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반응이었다.

“안녕하세요.”

“어 ··· 그래”

드디어 등장한 야구부의 실세, 세계대회까지 제패한 녀석이라 선배들도 다카기의 눈치를 살폈다.

“홍보는 해 봤냐?”

“해보긴 했는데 방식이 잘못 된 것 같아요.”

다카기는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그냥 도화지 얘기만 할 것이지, 망작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은 왜 한 건지, 2학년들은 장난 섞인 질타를 퍼부었다.

“야, 너는 왜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냐?”

“홍보는 솔직해야죠. 다 예술작품이 된다고 선전하면 사기꾼 아닌가요.”

생긴 것과 달리 너무 솔직한 녀석, 2학년들도 더는 다그치지 못했다.

“그나저나 추계대회가 걱정이다. 지금 전력으로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뭐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해야죠. 우리가 기반이 튼튼했던 건 아니잖아요.”

다카기의 말에 선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야구 명문고는 야구부가 80 ~ 100명 사이, 다이이치는 그 절반도 못 되는 인원으로 기적을 만들어냈다.

주 전력을 이룬 3학년이 은퇴하면 고전은 당연한 일, 선대 캡틴 이시다도 3년 내내 부원 충원에 애를 먹지 않았는가.

2학년들은 이런 때일수록 캡틴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요시다를 다그쳤다.

“야, 너도 수업시간에 잠만 자지 말고 뭐든 해 봐.”

“다 소용없어. 너희들은 그렇게 눈치가 없냐?”

하지만 요시다는 선을 그었다.

다이이치 야구부는 이번에 다카기 하루요시라는 걸출한 스타를 배출했고, 그만큼 인기도 올라갔다.

이 정도면 알아서 야구부에 지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도 이 지경인데, 홍보를 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선배님이 애를 쓰는 모습을 보여야 1학년들도 보고 느끼는 게 있겠죠.”

그래도 다카기는 캡틴의 등을 떠밀었다.

분명 이번 추계대회는 전력 보강 없이 치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다른 야구부도 마찬가지, 1 ~ 2학년의 성장이 다음 고시엔 성적으로 이어진다는 건 분명하다. 이런 때일수록 캡틴이 모범을 보여야 선수들도 따라오겠지, 핵심을 찔린 요시다는 먼 곳을 바라봤다.

“실전에서 잘 할 게 ··· 실전에서 ··· ”

캡틴이 되면 좋을 줄 알았는데 뭐가 이렇게 귀찮은 건지, 이시다 선배에게 돌아오라며 매달리고 싶었다.

‘아 ··· 진짜 그렇게 해 볼까?’

이시다는 고시엔이 끝나자마자 야구부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프로에 진출할 생각이 있다면 추계대회를 통해 기량을 유지하는 것도 방법. 그날 밤, 요시다는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돌아오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역시 이번 가을까지는 선배가 중심을 잡아주셔야 될 것 같아요]

“왜? 애들이 잘 통제가 안 되냐?”

[아니 ··· 그건 아닌 데요.]

하지만 이시다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추계대회는 세대교체를 의미하는 자리, 내가 끼면 자라날 싹 하나를 밟는 것 아닌가. 보아하니 당장의 패배가 두려운 모양인데, 이시다는 진심어린 충고를 건넸다.

“너 착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늘 이기는 입장은 아니었잖아.”

다이이치 야구부는 지금까지 무수한 패배를 거듭했다.

언제부터 이기는 경기를 했다고 패배를 염려하는 건가. 며칠 굶어 봐야 한 끼의 소중함을 아는 것처럼, 져 봐야 승리의 기쁨을 알 수 있다.

새로운 캡틴이 됐으니 녀석도 불안했겠지, 그래서 대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불안하면 사나에한테 부탁해 봐, 내가 캡틴이이긴 했지만 실세는 걔였잖아.”

군기반장 매니저를 다시 데려오라니, 뭔가 찝찝했지만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요시다는 그 말에 따랐다.

[싫어]

하지만 사나에의 입장은 단호했다.

매니저 생활은 고시엔 우승으로 마무리하고 이젠 입시준비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가을 대회도 함께 해 달라니, 디저트로 입가심을 했는데 메인요리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이젠 네가 캡틴이잖아. 언제까지 어리광 부릴 거야? 그리고 부탁할 게 있으면 직접 찾아 와, 건방지게 어디서 전화질이야?]

“아 ··· 네 ··· ”

고시엔 우승 후, 사나에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잠시 약점을 드러냈다. 하지만 여장부다운 기세는 건재, 그동안 당하게 있는 요시다는 대선배 앞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야, 네가 가라.”

“제가요?”

“너 사나에 선배하고 친했잖아. 너라면 좀 살갑게 대해주겠지.”

다음 날, 요시다는 다카기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본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다카기는 소소한 선물을 챙겨들고 3학년 교실을 방문했다.

“다들 고생하시는데 이것 좀 드세요.”

“오오 ~ ”

학교를 대표하는 유명인이 간식거리까지 챙겨오다니, 입시준비에 한껏 눌려있던 교실은 간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얘가 왜 왔지?’

물론 사나에는 당황했다.

직접 찾아오라는 말은 물론 장난이었다. 3년 동안 몸담은 야구부를 떠나는 게 쉬운 일인가, 미련 두지 말라고 다소 고압적으로 나갔는데, 요시다도 아니고 다카기가 직접 온 건 의외였다.

“말씀대로 직접 찾아 왔습니다. 음식은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이어지는 다카기의 장난에 사나에는 더 큰 곤경에 빠졌다.

평소 후배들을 얼마나 볶아댔으면 저렇게 깍듯이 고개를 숙일까, 이제 와서 변명을 해봤자 통하지 않았다.

“너 방과 후에 보자.”

“네 ~ 각오하고 있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장난질, 다카기의 계략에 말린 사나에는 40여일 만에 야구부로 돌아왔다.

“너 이리 안 와?!!”

“악!! 왜 때리세요?!!”

“네가 시켜거 한 거잖아!! 안 봐도 뻔해!!”

조리돌림을 당한 건 다카가기 아니라 요시다였다.

예전부터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떠넘기던 녀석, 캡틴이라는 놈이 잘 하는 짓이라며 마구 몰아세웠다.

“이제야 뭔가 채워진 느낌이네요.”

그래도 야구부원들은 이 상황이 마냥 즐거웠다.

3학년들이 떠나고 휑해진 야구부, 앞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 두려웠지만 돌아온 군기반장 덕분에 용기를 되찾았다.

“착각하지 마. 나 돌아온 거 아니야.”

하지만 사나에는 후배들에게 현실을 직시시켰다.

이 자리에 돌아온 건 갈피를 못 잡는 녀석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일 뿐, 이제 와서 은퇴를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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