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새출발 - (1)
세계대회 일정을 마무리한 일본 청소년 대표 팀은 하네다 공항에 도착, 수많은 취재진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지난 대회 우승팀 미국을 꺾고 거둔 값진 우승, 스리랑카 - 쿠바 전에서 패배를 당하면서 위기도 많이 겪었지만 여론은 찬사를 보냈다.
“감독님, 일본의 통산 6번 째 우승을 이끄셨는데 지금 소감이 어떠십니까?”
“음 ··· 글쎄요. 솔직히 다시는 지휘봉을 잡고 싶지 않습니다.”
아카마츠 감독의 답변에 기자들은 당황했다.
말이 좋아 우승이지 패배를 겪었을 때 쏟아지는 여론의 비난과 신경을 긁는 기자들의 질문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하루에 2 ~ 3개비 피우던 담배를 2갑이나 태웠고 흰머리도 부쩍 늘었다. 한 달 사이 5년은 늙은 기분, 대표 팀 지휘봉이 부담스럽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다카기의 합류 때문에 유독 극성이 심했던 여론, 박수 칠 때 떠나겠다는 말에 기자들은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시다 선수, 미국 전에서 완봉승을 거두셨는데 혹시 이번 기회에 미국 진출로 방향을 잡으실 겁니까?”
이어지는 선수들을 향한 관심, 다카기의 활약도 대단했지만 이시다의 투구는 미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잘하면 메이저리그로 직행할 수 있는 기회, 하지만 이시다는 기자들의 호들갑에 한발 물러난 입장을 표했다.
“계약제의를 받은 것도 아닌데 제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답은 훗날로 미루겠습니다.”
“그럼 계약제시를 받으면 미국으로 갈 마음은 있으십니까?”
이시다가 기자들의 공세에 시달리는 동안, 다카기는 그 옆에서 눈을 슬쩍 감았다. 카메라 세례에 눈이 부신 것도 있고, 아직 잠이 덜 깬 탓에 정신이 약간 몽롱했다.
“다카기 선수, 이번 대회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셨는데, 혹시 2년 후 열리는 청소년 대회도 출전할 뜻이 있으십니까?”
“ ··· 뭐가요”
잠깐 졸다 깬 탓에 무슨 질문을 받았는지도 이해 불가, 거기다 약간 귀찮다는 목소리에 질문을 던진 기자의 입장만 민망해졌다.
“아니 ··· 다음 대회도 출전하실 생각이 있으신지 ··· ”
“ ······ 아 ~ ~ 내일 일도 모르는데 2년 후를 어떻게 장담하겠습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위에 있던 학생들은 웃음을 꾹 눌렀다.
정말 자기 페이스대로 살아가는 자식, 선수들은 이제 익숙해졌지만 기자들은 급커브를 내달리는 다카기의 페이스를 따라가질 못했다.
“일본 최강의 용병!!”
이때, 기자회견장 근처에 있던 한 팬이 목소리를 높였다. 칭찬인지 욕인지, 하지만 다카기는 관심 없다는 반응을 유지했다.
“이제 다른 선수들한테 질문하시죠.”
“잠깐만요. 방금 일본 최강의 용병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용병은 돈 받고 뛰는 겁니다. 이익과 상황에 따라 소속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거겠죠. 언제 또 일본의 용병 노릇을 또 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분위기, 다카기는 이 틈에 다시 다른 선수에게 바통을 넘겼다.
기자회견도 끝나고 이젠 각자의 길을 갈 시간, 공항을 빠져나온 다카기 앞에 검은 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영길이 먼 길을 다녀온 손자를 위해 보낸 이동수단, 차에서 내린 한 남자가 도련님 손에 들린 짐을 받아드는 사이, 반대편 좌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문을 열어젖혔다.
“도련님, 어디로 모실까요?”
“일단 집으로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다카기는 태연하게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여론에서 용병이니 뭐니 떠들지만 현실은 대그룹의 후계자가 될 몸, 기자들은 시야에서 멀어지는 승용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메이저리그 진출은 훗날로 미루겠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청소년 대표 팀에 참가했던 잭 코틀봇의 행보는 미국을 뒤흔들었다. 계약금 천만 달러를 외치던 유망주가 메이저리그 계약을 포기하다니, 더 놀라운 건 대학 진학도 아니라 일본 프로야구 진출을 선언했다는 거다.
[요코하마 웨일스, 코틀봇과 7년 850만 달러(계약금 100만 달러, 옵션 100만 달러 포함) 계약 체결]
요코하마 구단이 공식 입장을 밝히면서 코틀봇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공식계약이 뜨기 전까지만 해도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코틀봇의 아버지가 계약금을 더 받아내려고 꼼수를 부린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정말 되돌릴 수 없는 일, 기자들은 왜 그래야 했는지 추궁에 나섰다.
“일본에서 먼저 계약을 제시한 겁니까?”
“아니요. 제가 먼저 연락을 했습니다.”
“왜 하필 일본입니까? 혹시 원하는 계약금을 못 받아서 그런 겁니까?”
“그건 절대 아닙니다.”
코틀봇은 적극적인 해명에 나섰다.
인구 3억이 넘는 미국에서 최고 유망주라는 평가를 받은 내가 일본에게 무릎을 꿇다니, 상상도 해 본 적 없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이야, 다카기에게 두들겨 맞은 것도 충격이지만, 미국 타선을 완봉으로 틀어막은 이시다의 투구에 할 말을 일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일본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을 지도 몰라.’
일본에서 뛰다 메이저리그로 진출해 성공한 선수도 제법 있다.
뭣보다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을 맺어도 마이너리그에서 몇 년 고생할 운명 아닌가.
그럴 바엔 수준 있는 일본 리그에서 프로 대접을 받으면서 뛰는 게 낫지 않을까. 뭣보다 일본에서 성공하고 기량을 갈고 닦으면 포스팅 시스템을 거쳐 FA 대박을 노릴 수 있다.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선택, 일본 기자들은 요코하마 구장을 방문한 코틀봇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일본전에서 패전투수가 됐지만 투구 내용은 전반적으로 괜찮았던 편, 뭣보다 미국 최고의 유망주가 메이저리그 계약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왔으니 관심을 받는 건 당연했다.
“코틀봇 선수, 구장을 직접 방문한 소감이 어떠십니까?”
“마음에 듭니다. 시설도 좋고 뭣보다 절 환영해주는 팬들이 있다는 게 제일 기쁩니다. 일본이 왜 야구 강국인지 알겠네요.”
기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정말 메이저리그 구단들을 상대로 콧대를 높인 유망주인가? 다카기의 방망이의 혼쭐이 나고 정신이 번쩍 든 건 아닌지, 하지만 민감한 질문이라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다카기도 요코하마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정확히 말하면 시즈오카 출신입니다.”
“시즈오카? 요코하마하고 어떻게 다른 거죠?”
다카기의 이름이 저 입에서 저절로 나올 줄이야, 코틀봇은 조만간 다카기도 드래프트에 응하는 거냐고 물었지만 통역은 고개를 저었다.
“NPB 드래프트는 신청서를 낸 학생에게만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럼 얼른 내라고 하세요. 전 그 녀석에게 갚아줄 게 있거든요.”
하지만 통역은 그건 무리라며 코틀봇을 다독였다.
다카기는 올해 만으로 15살, 드래프트 신청서를 내려면 앞으로 2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왜 2년을 더 기다려야 하죠? 미국은 15세 이상이면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걸로 아는데요.”
“여긴 일본입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 둔 학생만 드래프트에 지원할 수 있습니다.”
거듭된 설명에 코틀봇은 아쉬움을 표했다.
가능하면 빨리 재대결을 했으면 좋겠는데 2년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대신 기자들을 통해 조만간 다시 붙어보자는 도전장을 전했다.
“뭐래 이 자식은?”
하지만 다카기는 콧방귀를 뀌었다.
프로 진출도, 명문대에 진학해 가업을 잇는 것도 내 자유, 제 까짓게 뭔데 내 미래를 결정하나. 기자들이 보낸 메일에 답장도 주지 않았다.
“우리 하루가 집에 있으니까 분위기가 다르네.”
다카기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또 있었다.
바로 친 어머니, 아침부터 아들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데 간만에 집에 온 거라 어머니의 애정표현을 밀어내기도 뭣했다.
“엄마, 동생은 언제 볼 수 있는 거예요?”
“3개월은 더 기다려야 돼.”
“그런데 엄마 정말 임신한 거 맞아요? 전혀 표가 안 나는데 ··· ”
다카기는 엄마 뱃속에 있는 동생을 애타게 기다렸다. 코하루라고 이름까지 미리 정해놨는데 엄마 몸매는 예전과 다를 게 없으니, 정말 동생이 태어나는 게 맞는지 반신반의했다.
“원래 엄마는 임신해도 배가 잘 안 나오더라.”
“정말요?”
“그래, 너 임신한 것도 6개월 만에 알았어.”
임신하면 바로 표가 나는 줄 알았는데 원래 그런 건가? 동생의 탄생을 애타게 기다리는 오빠는 틈이 날 때마다 곁눈질로 엄마를 살폈다. 그렇게도 동생이 보고 싶을까, 어머니는 아들의 곁으로 쓸쩍 자리를 옮겼다.
“우리 하루는 보면 볼수록 남 주기 아까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언젠간 너도 결혼 할 거 아니니, 며느리한테 주기 싫은데 큰일이네.”
이작 15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두고 결혼이라니, 다카기는 서른 넘을 때까지 여자는 안 만난다고 선을 그었다.
“너 정말 그때까지 연애 안 할 거니?”
“남자는 성공이 우선이죠. 연애는 돈 있고 시간이 남아도는 놈들이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럼 우리 하루는 그때까지 엄마 거네?”
내가 괜한 말을 한 건가. 다카기는 엄마의 손길을 부담스럽게 여겼지만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 * *
“오 ~ 저기 온다.”
“어디?”
드디어 시작된 3학기, 다카기는 학우들의 관심을 받으며 교문을 통과했다. 고시엔을 제패했을 때도 학교의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세계대회를 거치면서 드러난 집안 배경 덕분에 이제는 학교의 마스코트나 다름없는 존재로 올라섰다.
[코틀봇의 일본행은 다카기 때문?]
[코틀봇, 기자들을 통해 도전의지 밝혀]
뭣보다 메이저리그 최고 유망주를 일본으로 끌어들이면서 화제성은 최고조, 이러다 다카기가 메이저리그로 직행하면 얼마나 웃길까.
소문이 또 다른 소문을 낳으면서 다카기는 유명세에 시달렸다.
“어이 ~ 월드스타”
“시끄러워”
까칠한 성격도 일품, 친구들이 월드스타라는 별명을 붙여줬지만 돌아온 반응은 시큰둥했다. 가능하면 학창시절은 조용히 보내고 싶었는데 너무 커져버린 스케일, 이 상황이 그리 달갑진 않았다.
오늘은 개학식, 학교에 머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다카기는 바로 야구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감독님, 저 다녀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후루타 감독은 먼 길을 돌아온 제자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겉으론 씩씩한 척 했어도 마음고생이 심했겠지, 앞으로는 편하게 야구를 했으면 하는 마음을 전했다.
마침 다카기 할아버지의 지원금 덕분에 야구부 전용 구장 설립은 순조롭게 진행 중, 전용 구장이 생기면 외부인의 출입도 통제할 수 있고 훈련에만 열중할 수 있겠지.
두 사람의 대화를 주시하던 다나카 코치도 슬쩍 입을 열었다.
“세계를 경험해 본 소감은 어떠냐?”
“뭐 ··· 그냥 그런 것 같아요.”
다카기는 깊은 생각 없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세계의 넓음을 깨닫기 위해 세계대회에 출전했는데 이렇다 할 어려움이 없었다. 궁지를 겪어야 성장을 하는데 그런 게 없었으니, 내가 뭘 얻었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타율 0.778에 홈런만 7개를 퍼부었으니 당연한 일, 앞으로 야구에 집중하려면 뭔가 계기가 필요했다.
“대학생들하고 연습경기를 치러보는 건 어떠냐?”
“대학생이요?”
“그래, 우리도 이제 명성을 얻었으니, 그쪽도 거절하진 않을 거다.”
다나카 코치는 과감한 대안을 제시했다.
다카기는 이제 세계가 주목하는 야구 유망주, 대학생들이라고 그 재능을 무시할 수 있을까. 한판 붙어보자면 거절하진 않겠지만, 일본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대학교는 일본 동쪽에 몰려 있다.
오사카로 초대하는 건 그렇고 우리가 가야할 텐데, 어쨌든 다나카 코치는 조만간 일정을 잡아보겠다는 뜻을 표했다.
“음 ··· 그냥 평소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잠시 생각에 잠긴 다카기는 고개를 저었다.
다이이치 고교가 운동만 전문으로 하는 학교도 아니고, 일본에서 손꼽히는 사립학교 아닌가.
시험기간만 되면 선생님들이 숙제폭탄을 안겨주는데, 평소 공부를 해두지 않으면 숙제만 하다 시험공부는 하나도 못한다.
철저한 경쟁으로 유지되는 시스템, 수업은 2 ~ 3시 사이에 끝나지만 매일 3 ~ 4시간 이상은 집에서 자습을 해야 성적을 유지할 수 있다. 가뜩이나 운동을 병행하느라 시간도 없는데 대학 팀과 연습경기를 하겠다고 그 장거리를 오고 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제가 야구로 진로를 확정한 것도 아니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죠. 그냥 평소대로 할래요.”
다카기는 3학기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생활을 반복했다.
학교와 야구부, 자취방을 오가는 단순한 패턴, 명성도 얻었으니 한 번쯤 일탈을 해 볼만도 한데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