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60화 (60/361)

60화. 밤하늘에 점 하나를 찍어 봐 - (16)

코틀봇은 후속 타자를 잘 처리하며 3회 초 위기를 넘겼지만 비슷한 장면이 5회 초에 연출됐다.

연속 안타를 내 준 다카기와의 승부가 부담스러웠는지 3번 째 승부는 볼넷, 여기에 후속타자 기무라의 희생번트, 3번 타자 카와다의 깊숙한 타구를 유격수가 겨우 막아내면서 코틀봇은 2사 주자 1 - 3루 위기에 몰렸다.

까앙 ~ !!

“타격!! 파울입니다. 후지타 선수가 초구를 노려봤네요.”

“이런 자세는 좋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투수가 승부를 피할 이유가 없거든요, 결과가 어떻든 존에 들어오는 공은 쳐내야 합니다.”

2구도 빠른 볼, 존에서 많이 벗어나면서 포수 미트를 맞고 튀었다.

홈으로 파고들기엔 좁았던 빈 틈, 다카기는 3루를 떠나지 않았다.

“That's a huge missed chance. I would not do such a thing”

= 좋은 기회를 놓치셨군.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이때 미국의 3루수 루이스 돗슨이 다카기를 슬쩍 찔러봤다.

인정하긴 싫지만 얄미울 정도로 야구를 잘 하는 녀석, 영어를 알아들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일단 속을 긁어봤다.

“I guess so, A dummy like you will do that”

= 그렇겠지, 너 같은 바보라면 홈으로 뛰었을 거야.

돗슨은 움찔했다. 이걸 이렇게 받아칠 줄이야, 뭣보다 일본인 치고 발음이 제법 괜찮아서 더 놀랐다.

“What are you so surprised about, Am I not supposed to say in English?(뭘 그렇게 놀래? 난 영어하면 안 되냐?)”

말을 걸면 걸수록 놀라움의 연속, 되로 주고 말로 받은 돗슨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사이 후지타가 중견수 플라이를 치면서 일본의 공격은 종료, 더그아웃에 입성한 루이스 돗슨은 갓 입수한 정보를 동료들에 흘렸다.

“야, 저 자식 영어 할 줄 알아.”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안 뛰었냐고 물었는데, 난 너 같은 멍청이가 아니라고 하더라고”

미국 벤치는 뒤집어 졌다.

강아지가 사람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어쨌든 다카기라는 녀석에게 흥미가 생긴 건 분명했다.

“다음엔 내가 말을 걸어볼까?”

“무슨 말 할 건데?”

“아무 말이나 해보지 뭐.”

동료들이 악의 없이 나누는 말이지만, 코틀봇의 귀엔 거슬렸다.

말을 걸어보다니, 지고 있는데 상대 팀 선수와 농담 따먹기나 할 건가. 뭣보다 다카기가 다음 타석에서도 출루하길 바라는 것 같아 마음에 안 들었다.

“다음엔 내 말 대로 해.”

코틀봇은 자일스 포수는 윽박질렀지만, 돌아온 반응은 비아냥거림이었다.

“네 빠른 볼은 누구도 못 친다며? 이제 와서 생각이 바뀌셨나?”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지 일방적으로 쏘아붙이고 돌아서는 코틀봇, 자일스 포수는 그 뒷모습에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줬다.

내 지시대로 빠른 볼을 던져 위기를 넘기지 않았나. 적반하장도 유분수,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며 불만을 중얼거렸다.

‘방패 뒤에 숨어선 의미가 없어.’

그렇게 경기는 흘러 7회 초 일본의 공격,

아카마츠 감독은 선수들에게 적극적인 타격을 요구했다. 이시다가 미국 타선을 봉쇄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순 없다. 명장이란 치고나갈 때를 알아야 법, 코틀봇은 1회부터 스트라이크 존을 적극 공략하고 있다.

이걸 멍 하니 지쳐보는 건 바보짓,

모가 나오든 도가 나오든 전진을 명했다.

‘누구는 안 치고 싶겠어요.’

하지만 일본 타자들은 좀처럼 전진하지 못했다.

스카우터의 보고에 따르면 코틀봇의 빠른 볼은 수직 무브먼트가 최고 10인치에 달한다.

MLB 선발투수 평균이 대략 10인치 정도, 수직 무브먼트만 따지면 MLB에서도 당장 통할 수 있는 수준이다.

거기다 90마일 중후반을 웃도는 속도까지 갖췄으니 이런 볼을 아무나 칠 수 있을까. 고등학생 레벨에선 따라가는 것도 버거웠다.

‘안녕, 또 놀러왔다.’

하지만 다카기는 달랐다.

코틀봇의 공은 분명 위력적이지만 개선해야 할 점도 있었다.

수직 움직임에 비해 횡 변화는 그저 그런 수준, 물론 이게 마냥 나쁜 건 아니다.

문제는 빠른 볼을 받쳐줄 수 있는 옵션이 확실하질 않다는 것, 이시다처럼 수준급의 체인지업을 던지는 것도 아니고, 커브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오늘처럼 안 통하는 날은 대안이 없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이시다 선배 공이 더 좋아.’

다카기는 개인적으로 이시다의 투구가 더 까다롭다고 평가했다.

이시다의 최고 구속은 코틀봇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지만, 수준급의 싱커와 체인지업을 갖추고 있다.

미국 타선을 효과적으로 잡아내는 이유, 낮게 제구를 유지하면 타자들은 말려들 수밖에 없다. 투수의 완성도를 따지면 이시다가 한 수 위, 미국 최고 유망주라고 해도 아직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안 통한다니까. 꼭 맞아봐야 알겠어?’

초구부터 커브가 들어오자 다카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빠른 볼이 공략 당하는데 커브가 통할까. 잘못하면 노림수에 걸려들 뿐, 차라리 빠른 볼을 던지라는 눈빛을 보냈다.

“이번에는 빠른 볼, 역시 벗어납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여기서 하나 들어올 것 같은데요. 다카기 선수도 알고 있을 겁니다.”

코틀봇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또 빠른 볼을 던지자니, 오늘 내준 안타 2개가 마음에 걸리고 그렇다고 커브를 던지자니 미동도 없는 상대, 내 뜻대로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결국 자일스 포수 사인에 따랐다.

‘이것도 따라 와?’

몸 쪽으로 파고드는 빠른 볼, 다카기는 커트해 냈다.

그 짧은 순간에 이렇게 대응을 하다니, 자일스 포수는 다카기의 선구안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래도 던져야 돼’

어쨌든 파울은 파울, 자일스는 다시 몸 쪽 승부를 요구했고 코틀봇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세 번째 승부는 결말이 났다.

‘어쩌자고 같은 공을 던지셨나.’

다카기는 몸을 뒤로 젖히며 스윙 각을 만들어냈다.

빠른 공에 대비해 레그 킥은 최소, 앞발은 일찍 열어 자연스러운 몸통회전을 유도했다.

‘말을 걸 기회도 없었네.’

좌측 펜스를 훌쩍 넘어가는 홈런, 미국 내야진은 유유히 베이스를 도는 다카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뭐 저런 자식이 다 있는지, 침묵에 휩싸인 미국 벤치와 달리 중계석은 떠들썩한 소란에 휩싸였다.

“오늘도 밤하늘을 멋지게 장식하는군요!! 다카기 하루요시의 이번 대회 7번 째 홈런입니다!!”

“하늘은 충분히 넓습니다. 앞으로도 부지런히 채워야겠죠.”

“캘리포니아의 밤하늘 말입니까?”

캐스터의 장난 섞인 질문에 해설위원 팀 러셀은 말을 아꼈다.

다카기는 아직 15살, 뭣보다 MLB 사무국은 국제 드래프트를 두고 선수노조와 의견대립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 야구협회의 동의도 얻어야 하고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저 선수의 재능을 하루 빨리 캘리포니아로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저 녀석은 일본이 품을 재능이 아니었어.”

한편, 아카마츠 감독은 동료들과 손을 마주치는 다카기의 뒷모습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표 팀에 승선할 때부터 저 녀석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

날 일본인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면 외국인 용병으로 취급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국적은 둘째 치고 저 정도 재능이 일본 프로야구 레벨에 만족할 수 있을까.

아니, 집안배경이 어마어마한 녀석이라 앞으로 야구를 계속 할지도 의문이었다.

‘손톱 깎을 때가 됐나.’

중계카메라의 관심을 받는 몸이 됐지만, 다카기는 아무 것도 눈치 못 채고 오른손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손톱이 조금만 길어도 바로 잘라내는 성격. 투수가 본업이라면 어느 정도 남겨둬야겠지만, 유격수라 미련 따윈 두지 않았다.

“뭘 그렇게 보냐? 손톱에 뭐 꼈어?”

“오늘따라 제 손이 예뻐 보여서요.”

마이키 선배의 관심에 다카기는 마음에도 없는 농담을 던졌다.

세상에 자기 손에 도취된 남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마이키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디 좀 보자, 이게 그렇게 잘난 손이냐?”

“보세요, 아름답지 않나요?”

알면 알수록 웃긴 자식, 평소 다카기와 서먹서먹하게 지내던 동료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야, 너 내년엔 고시엔 나오지 마.”

“왜요?”

“네가 나가면 반칙이지. 얼른 미국 가, 일본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싫은데요.”

더 큰 무대로 나가라는 뜻으로 한 말이지만, 다카기는 거부를 표했다.

용병 선언을 했지만 그건 날 일본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놈들에게 한 방 먹여주는 수단이었다. 일본에 남는 것도 떠나는 것도 내 자유, 은근 청개구리 성격이라 나오지 말라는 장난에 더 발끈했다.

“그럼 미국에서 오라고 해도 안 갈 거냐?”

“돈을 많이 준다면 생각은 해 봐야죠. 코틀봇이 천만 달러 요구하는데 저는 그 이상 받아야하지 않겠어요.”

동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집에 돈도 많은 자식이 무슨 돈을 따지는지, 하지만 다카기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사고 싶은 물건에 합당한 값을 지불하는 건 예의죠. 면세점에서도 제가 그 말 한 것 같은데요.”

메이저리그 구단은 유망주라는 이유로 값을 후려친다. 꿈을 쫓는다며 노예계약에 서명하면 호구가 될 뿐, 그럴 바엔 일본에 남는 게 나았다.

‘돈이 없으면 걸어 다니라고’

다카기는 이후에도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선전했다.

돈도 없는 자식이 스포츠카를 몰겠다며 값을 후려치는 게 상식인가?

돈이 없으면 차를 몰지 말 것이지, 구단 관계자들은 값을 깎는 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능력이 아니라 뻔뻔한 거다.

그런 구단과 계약을 맺어봤자 나중에 불화만 생길 뿐, 돈도 없는 것들은 저리 가라며 손을 휘저었다.

“와아아 ~ !!”

“우리가 이겼다!!”

U-18 결승전은 2대 0,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통산 6번 째 우승, 결승홈런 포함 3안타를 때려낸 다카기의 활약도 대단했지만, 107구를 던지며 미국 타선을 완봉으로 틀어막은 이시다의 역투는 빛 그 자체였다.

오사카에서 C급 취급을 당했던 야구부 에이스가 고시엔 우승에 이어 세계대회까지 제패한 역사적인 사건, 이시다는 이제 마이키를 넘어 일본 최고의 투수 유망주로 올라섰다.

‘이제 시작일 뿐이지, 프로에서 제대로 붙어보자.’

마이키는 이시다의 투구에 자극을 받았다.

이번 대회를 통해 자신의 장단점을 알게 됐고, 나름대로 발전도 이뤄냈다. 라이벌 관계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 금방 따라잡겠다는 각오를 세웠다.

‘아무것도 얻은 게 없어.’

물론 자존심을 구긴 선수도 있었다.

후지타 겐고로는 대표팀 3번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부여받았지만, 끝내 명예회복에 실패했다.

최종 성적은 타율 0.211, 홈런 2개, 4타점, 지역예선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활약은 없었다.

고시엔에서 활약한 내가 세계라는 벽에 가로 막히다니, 그에 비해 다카기는 홈런 7개에 결승타만 4개를 때려냈다. 실력의 차이는 명확, 후지타는 기자들의 질문에 응하는 다카기를 응시했다.

‘이대로 끝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금은 무리지만 언젠가는 넘어서야 할 벽, 다음에는 다를 거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카기 선수, 고시엔 우승에 세계대회 우승까지 이루셨는데, 그 다음 목표는 뭔가요?”

“글쎄요, 이룰 건 다 이뤘으니 이제 은퇴나 할까요?”

기자들은 움찔했다.

상대는 그동안 일본 여론과 대립각을 세웠던 선수, 거기다 굳이 야구를 안 해도 될 몸이라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질 않았다.

“이럴 땐 그냥 웃으면 됩니다. 뭐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다카기가 농담을 하면서 분위기는 풀렸고, 기자들은 질문을 이어갔다.

“대회도 끝났는데 지금 가장 하고 싶으신 게 뭡니까?”

“학교 가야죠. 방학도 다 끝났는데 이제 와서 뭘 하겠습니까.”

현실적인 대답에 기자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집안배경만 걷어내면 여느 학생들과 다를 게 없는 소년, 익명에 숨어 여론전을 벌이는 극성팬들만 치워내면, 다카기와 여론은 불편한 관계를 이어갈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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