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밤하늘에 점 하나를 찍어 봐 - (15)
일본 선수들이 몸을 푸는 동안, 미국의 주포 버즈 밀러는 잠시 염탐을 나왔다.
다카기는 지역예선 - 본선을 통틀어 6홈런을 때려낸 요주의 인물이라고 들었는데, 그렇게 위협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화장이라도 하고 나오셨나?”
흰 피부에 유독 붉은 입술, 저런 계집애 같은 얼굴로 야구를 하겠다는 건가. 야구보다는 소꿉장난이 어울리겠다며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저 자식들이 ··· ’
‘그러지 말고 하나 보여주지 그러냐.’
일본 선수단은 다카기가 염탐을 나온 미국 선수들 앞에서 무력시위를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일본 타선의 기둥은 가벼운 스윙을 반복할 뿐, 그나마 하던 훈련도 얼마 못가 그만 뒀다.
“조금 더 하지 그러냐?”
“매일 하는 건데요 뭐”
코치가 발을 붙잡았지만 다카기는 자기 갈 길을 갔다.
고시엔부터 쉴 새 없이 달려온 나날, 학생들은 이미 녹초가 됐다.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훈련을 더 하라는 건지, 차라리 힘을 아껴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홈런 스윙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이어지는 미국 대표 팀의 훈련, 버즈 밀러는 좌측 스탠스에 연달아 장타를 박아 넣었다.
까아앙 ~ !!
“유후 ~ !!”
다시 한 번 강한 타구, 버즈 밀러는 일본 벤치를 향해 괴성을 질러댔다.
고등학생 주제에 저렇게 강한 타구를 날리다니, 일본 측 벤치는 약간 움츠러들었지만 마이키는 코웃음을 쳤다.
“야, 저런 놈들이 꼭 실전에서 못한다. 그리고 괴물이라면 우리 쪽이 한 수 위잖아.”
일본 선수들도 그 말에 동조했다.
캐나다 대륙에 상륙한 다카기라는 일본산 괴물은 파괴행위를 거듭하고 있는 중, 버즈 밀러가 그 녀석보다 낫다는 보장이 있나?
위험도로 치면 이쪽이 한수 위라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자!! 1회 초 일본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다카기 하루요시 선수, 이번 대회에서 타율 0.750, 홈런 6개, 12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시엔에서도 엄청난 활약을 펼쳤지만, 이 정도 장타력을 보여주진 못했거든요. 대회를 치르면서 한 단계 더 성장한 것 같습니다.”
마운드에 오른 잭 코틀봇은 포수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홈런을 6개나 쳐냈지만 절반은 수준 떨어지는 홍콩에게 뺏어낸 거 아닌가, 구위로 찍어 누르겠다며 호기를 부렸다.
까앙 ~ !!
“쳤어?”
초구는 파울, 전광판엔 94마일이 찍혔다.
약간 밀렸지만 반응은 확실, 코틀봇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다카기도 다음 공에 대비했다.
‘조금 앞으로 두자.’
타이밍이 약간 늦었을 뿐, 힘에서 밀린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일본에선 밀어치는 타격을 강조하는 코치들이 많지만 힘이 실린 공은 잡아당기는 게 원칙, 히팅 포인트를 조금 조정했다.
까앙 ~ !!
“우측!! 아 ~ 파울입니다. 다카기 선수가 힘에서 밀리진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 커브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 들어올 때가 됐어요.”
해설위원의 예상과 달리 코틀봇은 3구도 빠른 볼을 택했다.
코틀봇의 커브는 회전이 많이 걸려 바운드가 되면 높이 튀는 경향이 있다. 거기다 포수 마스크를 쓴 자일스는 블로킹 능력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 커브를 마음 놓고 던지긴 어려웠다.
‘괜찮아. 내가 언제부터 커브에 의존했다고’
코틀봇은 지금까지 그 어떤 강적도 빠른 볼로 이겨냈다.
여기서 커브를 던지는 건 상대가 귀찮은 존재라는 걸 인정하는 것,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까앙 ~ !!
“다시 파울!! 점 점 더 안타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듭니다.”
“지금도 93마일인데 따라가죠. 역시 빠른 볼에 강점이 있는 선수입니다.”
카운트는 여전히 노 볼 투 스트라이크, 하지만 궁지에 몰리는 쪽은 코틀봇이었다. 내 공에 이렇게 반응하는 녀석은 처음, 뭣보다 타구 질이 점 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커브’
비장의 무기 커브까지 꺼내들었지만, 다카기는 중심이 무너진 자세에서 커트해 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기까지 하는데, 심리 싸움에서 흔들린 커틀봇은 정면승부를 택했다.
까앙 ~ !!
“다시 파울!! 이제 승부는 5구로 넘어갑니다!!”
“호적수를 만났다 이건가요. 다카기 선수가 경기 중에 저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데, 보는 저도 괜히 즐겁네요.”
5구는 공이 손에서 빠지면 볼, 코틀봇은 혼란에 빠졌다.
내가 던질 수 있는 최고의 공은 다 보여줬다. 그런데 반응이 없다니, 하지만 다카기는 호적수가 또 다른 무기를 보여주길 기대했다.
‘너 메이저리그 최고 유망주라며, 이게 한계라면 조금 실망인데’
6구는 바깥쪽으로 빠지면서 볼,
다카기가 다음 공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동안, 후속타자 기무라는 떨리는 마음을 다스렸다.
경기 시작 전부터 일본은 미국이라는 강적 앞에 겁을 먹었다.
미국 앞에 서면 한 없이 작아지는 일본, 미국이라면 치가 떨려도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낼 순 없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 약자가 강자에게 머리를 숙이는 건 당연한 일, 결국 약자는 자존심을 세울 대체물을 찾기 마련이다.
그게 바로 스포츠, 다카기의 선전은 기무라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까앙 ~ !
“밀어낸 타구!! 우익수가 달려오지만 잡지 못합니다!! 선두타자 안타!! 오늘도 안타를 기록하는 다카기 선수입니다!!”
“지금은 바깥쪽으로 잘 붙였는데 힘으로 밀어냈죠. 정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의미가 있는 결과네요.”
코틀봇은 덤덤한 얼굴로 포수가 던진 공을 받아들었다.
빗맞은 안타라고 깎아내릴 건가 하지만 제구가 된 공이 공략 당했다는 건 사실, 자존심이 강한 코틀봇은 분풀이 대상을 물색했다.
‘Jap 주제에 기어오르지 마라.’
기무라는 초구부터 배트를 휘둘렀지만 허공을 갈랐다.
내 공을 밀어낸 녀석은 저 꼬맹이가 아니다.
그런데 초구부터 겁도 없이 달려들다니, 얼마나 날 만만히 봤으면 저렇게 나오겠는가.
코틀봇은 착각하지 말라며 구위로 찍어 눌렀다.
‘이게 현실인가.’
잠깐 용기를 얻었던 기무라는 곧 현실을 깨달았다.
다운스윙은 간결하게 배트가 돌아 나오지만 스윙거리가 짧은 만큼 힘이 실리기 어렵다. 거기다 기무라는 손목 힘이 약한 편, 타이밍이 맞아도 타구가 앞으로 나가질 않았다.
한마디로 승산 없는 게임, 선수타자가 살아 나갔지만 아카마츠 감독은 무실점으로 마운드를 내려가는 코틀봇의 뒷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1회 말 미국의 반격, 마운드에 오른 이시다는 제구를 낮게 유지했다.
공격은 몰라도 방패는 미국에 밀리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버텨줘야 동료들도 투지를 잃지 않겠지, 의지뿐이라면 무모한 투구가 됐겠지만 실력을 갖춘 에이스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싱커가 상당히 좋군.’
미국 대표 팀의 마크 브라운 감독은 이시다의 기량을 높이 평가했다.
애들은 어른을 따라 하기 마련, 플라이 볼 혁명이 일어나자 학생들은 너도 나도 어퍼 스윙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태계가 어떤 곳인가. 포식자가 이빨을 세우는 만큼 피식자도 대안을 찾기 마련, 투수들이 살 길을 찾으면서 MLB는 2할 초반에 머무는 공갈포가 넘쳐나는 시대가 돼 버렸다.
물론 고등학생 중 수준급 변화구를 던지는 선수가 얼마나 되겠는가.
마크 브라운 감독은 학생들의 방식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시다의 수준 높은 공을 공략하긴 어려울 거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싱커만 던질 줄 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2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버즈 밀러가 타석에 섰다.
연습 타격에서 일본 벤치에 도발을 날렸던 그 녀석, 이시다는 빠른 볼로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싱커는 제구를 잡는 과정에서 얻은 부산물일 뿐, 140km 중반을 넘나드는 빠른 볼은 건재했다.
‘오늘 공 좋은데’
허를 찔린 버즈 밀러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시노자키 포수는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이시다는 고교 3년 동안 호흡을 맞춘 파트너, 이렇게 빠른 볼 구위가 좋은 날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빠른 볼을 아낄 이유가 없겠지, 결정구를 던지기 전에 그럴듯한 밑밥을 뿌려뒀다.
‘춤이나 추고 들어가라.’
결정구는 체인지업, 싱커보다 느리지만 더 떨어지는 궤적에 배트는 허공을 갈랐다. 연습타격에서 보여준 홈런 시위가 무색한 결과, 버즈 밀러는 바닥에 떨어진 헬멧에 괜한 화풀이를 했다.
“다들 걱정할 거 없어. 내가 확실히 막아줄 테니까.”
물론 삼진을 잡아낸 이시다는 의기양양, 에이스가 투구에 확신을 얻으면서 코틀봇의 구위에 눌린 일본 벤치도 용기를 되찾았다.
‘나 또 왔다. 기다렸지?’
3회 초 2아웃, 다카기는 2번 째 타석을 맞이했다.
승패는 이미 뒷전, 호적수를 만났다는 기쁨에 경기 자체를 즐겼다.
“들어왔다는 판정, 오 ~ 지금은 96마일입니다.”
“확실히 다른 선수들을 상대할 때와 구속이 다르죠. 이제는 봐주지 않겠다, 이런 뜻인가요?”
초구를 내줬지만 다카기는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다음 공도 빠른 볼이 들어왔지만 걸러냈고, 차분하게 3구를 기다렸다.
까아앙 ~ !!
“밀어낸 타구!! 계속 뒤로 갑니다!! 어디까지?!! 펜스를 맞고 나옵니다!! 다카기 선수는 1루를 지나 2루까지 들어갑니다!! 아 ~ 2아웃이 이런 타구가 나왔다는 게 조금 아쉽네요.”
“94마일, 이번에도 나쁜 공이 아닌데 밀어내네요. 도대체 손목 힘이 얼마나 강한 겁니까?”
또 한방 먹은 코틀봇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MLB 구단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유망주라 다른 선수들은 라이벌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 공을 이렇게 쉽게 쳐내는 녀석이 일본에 있었다니, 충격이 큰 만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버릇이 재발했다.
“You did it ··· You did it again son of bitch”
= 또 해내셨군. 또 해냈다고 이 빌어먹을 자식아.
오늘 일은 단순한 사고일까.
한 놈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기가 죽을 필요는 없지만 세상에 만약은 없는 법, 저 녀석은 2안타를 때려냈고 그게 현실이다. 다음에는 어떻게 설욕해야 할까, 일단 눈앞에 있는 적에 집중했다.
까앙 ~ !!
코틀봇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무라는 앞선 타석에서 빠른 볼에 전혀 대응을 하지 못했다.
빠른 볼로 누르는 건 당연, 하지만 빗맞은 공이 바운드 되면서 투수키를 넘어갔고, 설상가상 유격수는 킥 볼을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앞 뒤 가릴 게 뭐 있어.’
3루까지 진루한 다카기는 그대로 홈으로 돌진했다.
2아웃이라 모험을 해볼 만한 상황, 과감한 질주는 일본의 선취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더는 빠른 볼만 고집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브라이언 포수는 커브 사인을 보냈다.
‘네가 그걸 잡을 수 있다고?’
하지만 코틀봇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냈다.
주자가 2루에 있으니 폭투가 나온다고 바로 실점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코틀봇은 브라이언의 블로킹 능력을 믿지 못했다.
‘저 자식은 늘 저러네.’
브라이언 포수는 거부 사인에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내가 못미더우면 감독에게 포수를 바꿔달라고 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일본은 빠른 볼 하나로 잡아낼 수 있다고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초반부터 쩔쩔 매는 꼴이란, 같은 팀이지만 평소 하던 짓이 얄미운 놈이라 곱게 볼 수가 없었다.
‘오늘은 그저 운이 없을 뿐이야.’
코틀봇은 계속 빠른 볼을 앞세웠다.
전문가들도 변화구는 몰라도 빠른 볼은 메이저리그에서 당장 통할 수준이라고 평가하지 않았던가. 오늘은 야수 실책에 불운이 약간 겹친 것 뿐, 고집은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