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밤하늘에 점 하나를 찍어 봐 - (13)
“움직이지 않습니다. 역시 볼을 보는 눈이 좋네요.”
“이 선수를 보고 있으면 캔자스시티의 조디 웨스트리지가 생각나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편, 미국 중계석은 다카기를 두고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일본은 통산 6번 째 U-18 우승을 노리는 전력, 거기다 지난 대회에서 미국과 붙었던 나라라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경계대상 1호는 다카기 하루요시, 해설위원 팀 러셀은 현역 메이저리거까지 소환해 대화를 이어갔다.
조디 웨스트리지는 만 21세에 풀타임을 소화하며 타율 0.291, 24홈런, 84타점을 올리며 2014시즌 신인왕을 거머쥔 초신성, 여기에 4할을 넘는 출루율을 기록하며 전문가들을 혼란에 몰아넣었다.
출루율이 3할 5푼만 되도 준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신인이 이런 기록을 세운다? 아직 메이저리그를 경험하기엔 시기상조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전문가들은 웨스트리지의 활약에 입을 다물었다.
“변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니다.”
전문가들이 웨스트리지의 실패를 점친 건 특유의 타격 폼 때문이었다.
스탠스가 넓은 만큼 타구에 강한 힘을 실을 수 있지만, 변화구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웨스트리지는 특유의 선구안으로 약점을 극복해 냈다.
물론 변화구 타율(0.259)이 낮았던 건 사실, 그래도 좋은 직구 상대 타율(0.331)과 선구안 덕분에 뚜렷한 단점이 되질 않았다.
타격 자세나 변화구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면 거의 판박이,
물론 메이저리거와 일개 고등학생을 비교하는 건 무리겠지만, 미국 여론이 다카기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까아앙 ~ !!!
“오 ~ 이런 ··· 다시 한 번 좌측으로 타구를 보냅니다!! 다카기 선수의 쓰리 런 홈런!! 오늘은 유달리 별이 많이 뜨는 밤이군요.”
“하하 ~ 그러게 말입니다.”
미국 해설위원들이 농담을 나누는 사이, 다카기는 3루 코치와 격하게 손을 마주쳤다.
스코어를 6대 1로 벌리는 한 방, 주심의 오락가락 판정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던 아카마츠 감독은 환한 미소를 되찾았다.
‘타격을 무슨 자유투처럼 하네.’
자유투도 70%를 넣기 힘든데, 이 녀석은 방망이로 그 확률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고등학생들이 하는 경기라도 놀라운 건 놀라운 일, 오늘 따라 녀석의 뒷모습이 거대해 보였다.
‘나 변화구에 약하다며? 증명은 누가 하나?’
하지만 다카기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본인도 귀가 있으니 전문가들이 하는 말이 안 들릴 리가 없다. 변화구에 약점이 있다고 그렇게 말을 해대는데, 누구도 이를 증명해내질 못했다.
정말 나는 변화구에 약점이 있는 건가? 증명을 해 줘야 할 투수가 얻어터지고 있으니 뭐가 뭔지 감이 안 잡혔다.
‘몰라, 어쨌든 변화구만 노리자. 적어도 여기서 날 상대로 빠른 볼 던질 투수는 없어.’
다카기는 세 번째 타석에서 변화구를 노리고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캐나다의 3번 째 투수, 마이클 켈리오는 초구부터 커브를 구사했지만 다카기는 거기에 맞춰 발을 뻗었다.
까아앙 ~ !!
“Oh No!! He did it again!!!! There are so many stars that we can never know how many are out there”
= 맙소사!! 그가 또 해내는 군요!!!! 하늘에 너무 별이 많아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Would you believe that he was only fifteen years old? I'd like to meet him in California”
= 이 선수가 아직 15살 밖에 안 됐다는 거 믿을 수 있습니까? 난 그를 캘리포니아에서 보고 싶군요.
미쳐 날뛰는 방망이, 미국 중계석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다카기를 웨스트리지에 비교한 팀 러셀은 최고의 찬사를 표했다.
LA가 연고지를 둔 캘리포니아에서 매년 야구 유망주를 테스트 한다. 세계 최대의 공립대학이 있는 곳이라 대학생 수가 압도적이지만, 고등학생, 15세 미만 유소년도 적지 않다.
그만큼 통과하기 어려운 테스트, 하지만 눈에 띌 놈은 띄게 돼 있다.
다카기를 캘리포니아에서 만나고 싶다는 게 뭘 의미하겠는가.
팀 러셀은 2년 전만 해도 LA 머린스 인스트럭터로 활동하며 많은 유망주를 발굴해냈다.
그 눈에 띄었다는 건 MLB에 진입할 싹수가 보였다는 것, 고등학생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방심하지 않겠어. 완벽하게 승리한다.’
한편, 마이키의 호투에 다카기의 불방망이가 더해지면서 일본은 9대 1로 앞서갔다.
하지만 앞선 경기에서 쿠바에게 역전패를 당한 아카마츠 감독은 필승조 2명을 불펜에 대기시켰고, 마이키가 연속 안타를 내주자 바로 마운드에 올라갔다.
“이번 이닝만 제가 책임지면 안 될까요?”
하지만 마이키는 강판을 거부했다.
스코어는 9대 1, 점수 차도 넉넉하고 아웃카운트 1개만 잡으면 6회 말을 끝낼 수 있다. 거기다 고교 3년 동안 6이닝 미만을 던진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으니, 지금 내려가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넌 지금까지 충분히 잘 했다. 무리할 이유는 없지 않겠냐?”
“한번만 믿어주세요. 또 맞으면 군말 없이 내려가겠습니다.”
점수 차도 8점이나 되는데 내가 너무 인색한 건가.
결국 아카마츠 감독은 어깨만 몇 번 두들겨 주고 후퇴, 기회를 얻은 마이키는 캡을 고쳐 쓰며 투쟁심을 끌어올렸다.
‘지금 뭔가 대단한 공이 들어간 것 같은데’
마이키는 평소와 다른 직구 움직임에 주목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변형 패스트볼을 좋게 보지 않는다. 불필요한 움직임은 깎고 깎아서 제구에 최적화 시키는데, 결국 제구와 구위를 맞바꾸는 결과가 된다.
마이키도 그동안 바깥쪽 제구를 위해 직구를 깎아냈지만, 오늘 캐나다 타선을 상대하면서 조금씩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슬라이더보다 더 빠르고 덜 꺾이는 궤적, 타자들이 달려들긴 하는데 제대로 치진 못하고 있다. 만만히 보이는 게 내 장점이라더니, 그게 사실이란 말인가?
시노자키 포수의 말이 옳다는 걸 깨달았다.
“됐어!”
3루 방향으로 굴러가는 타구, 카와다가 1루에 송구하면서 마이키는 위기를 넘겼다. 무실점보다 그동안 억눌렀던 내 진짜 모습을 찾은 게 더 큰 수확, 뿌듯한 얼굴로 마운드를 등졌다.
‘조금이라도 좁혀야 한다.’
점수 차는 벌어졌지만 캐나다 선수들은 반격을 이어갔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캐나다 - 일본 - 쿠바가 2승 1패 동률을 이루게 된다. 득실차로 다음 라운드 진출을 가려내는 룰을 고려하면 대패는 치명적, 조금이라도 더 좁히자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꿈도 꾸지 마라.’
물론 일본도 순순히 추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점수를 많이 내야 하는 건 피차일반, 다카기가 이끄는 돌격부대는 필승조의 원호를 받으며 전진을 계속했다.
까앙 ~ !!
“이번에는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이마오카 선수는 오늘 3안타를 기록합니다!!”
“이제 마츠다 선수의 역할이 중요해졌네요. 진루타도 나쁘지 않지만, 다카기 선수 앞에서 1루를 비워둘 이유가 없죠.”
아카마츠 감독은 마츠다에게 살아나갈 것을 주문했다.
희생번트를 대 봤자 캐나다는 3홈런을 친 다카기를 거를 게 분명, 확실히 코너에 몰아넣고 어퍼컷을 날리려면 마츠다가 제 역할을 해줘야 했다.
“Touch!! Touch!!”
초구부터 깊은 공, 마츠다는 몸에 맞았다며 강력히 어필했지만 주심은 수작부리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옷에 스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니라니, 마츠다는 펄쩍 뛰었지만 침착하라는 벤치 사인에 마음을 가라앉혔다.
‘진짜 마음에 안 들어.’
다카기가 홈런 3방을 쳐줘서 다행이지, 오늘 주심은 분명 수작을 부리고 있다.
차이가 좁혀지면 더 노골적인 장난질이 시작되겠지, 마츠다는 반드시 살아나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찍기 타법이다.’
마츠다는 달려 나가면서 배트로 공을 찍어 눌렀다.
다카기를 상대하긴 부담스럽고 병살은 잡고 싶고, 눈앞에 떨어진 타구에 캐나다 선수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분명 병살을 위해 2루 송구를 하겠지.
무모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마츠다는 1루 주자 이마오카와 자신의 빠른 발에 도박을 걸었다.
“2루 송구 높았습니다!! 2루에서 세이프!! 1루에도 던지지 못합니다!! 1사 주자 1, 2루에서 다시 다카기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지금은 일본에 운이 따랐네요. 여기서 다카기 선수가 확실하게 쐐기타를 박아야 합니다.”
1루에 안착한 마츠다는 벤치를 향해 V 사인을 날렸다.
상대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 주고 이득을 챙기다니, 다카기처럼 호쾌한 장타를 날린 건 아니지만 당당히 가슴을 폈다.
‘한 번 놀아보자. 별 기대는 안 하지만’
다시 찾아온 득점권 기회, 다카기는 이번에도 변화구를 노렸다.
하지만 캐나다 벤치는 망설임 없이 고의사구를 지시, 4연타석 홈런을 기대하던 일본 팬들이 격한 야유를 퍼부었지만 다카기는 덤덤한 얼굴로 1루를 밟았다.
이날 일본은 캐나다를 12대 1로 완파하며 슈퍼라운드 진출을 확정지었고, 3홈런 게임을 펼친 다카기는 기자들의 관심에 둘러싸였다.
“다카기 선수, 오늘은 밤하늘이 꽉 채워진 느낌입니까?”
한 기자의 질문에 다카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내가 한 말인데 왜 몸에 닭살이 돋는 걸까. 그렇다고 되돌릴 순 없는 일, 더 큰 허풍으로 민망함을 덮었다.
“글쎄요. 밤하늘이 홈런 몇 개로 채워질 만큼 좁진 않은 것 같은데요. 앞으로도 더 채워나갈 생각입니다.”
“오 ~ 무서워라. 앞으로 일본을 상대할 팀은 긴장해야겠군요.”
기자의 맞장구에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기자들을 마주할 때와는 다른 느낌, 뭔가 유쾌하고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카기 선수, 미츠히데가 아니라 히데요시가 되셨군요.”
아니나 다를까, 일본 기자들은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를 지껄였다.
하긴 이 경기를 앞두고 텐노잔이니 뭐니 했으니 당연하겠지, 다카기는 불쾌한 심정을 드러냈다.
“전 히데요시 안 좋아합니다. 그런 비유는 자제해주셨으면 합니다.”
폭탄발언에 기자들은 조용해졌다.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인기인으로 잊을 만 하면 드라마에 등장하는 위인이 싫다니? 그 이유가 궁금했다.
“왜 히데요시를 안 좋아하시죠?”
“주가(主家)를 괴뢰로 만들고 일본의 주인 행세를 하더니, 정적 앞에선 벌벌 떨면서 여동생과 어머니를 인질로 보낸 인간 아닙니까. 거기다 친아들이 귀엽다고 자기 손으로 세운 후계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집안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그런 자가 무슨 천하인입니까?”
연이은 폭탄 발언에 기자들은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드라마에서도 히데요시의 말년은 거의 언급하질 않는다. 그만큼 실책과 오판이 많았던 말년, 기세를 탄 다카기는 쐐기를 박았다.
“차라리 우리 할아버지가 훨씬 낫죠. 오랫동안 사업에 도움을 준 스미다 그룹이 어려울 때 의리를 지키셨고, 집안 단속도 철저히 하는 분이니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절 그런 시대의 패배자와 비교하지 마세요. 상당히 불쾌합니다.”
다카기의 인터뷰는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다.
역시 자이니치라 히데요시를 싫어하는 거 아니냐며 버럭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며 긍정하는 여론도 있었다.
‘이 녀석아 ··· ’
한편, 고영길은 손자의 폭로에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얌전히 넘어가도 될 일에 왜 불을 붙인 건지. 한창 혈기왕성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복잡했다.
자랑스럽긴 한데 한편으론 걱정도 되는 게 사실, 그저 소란이 더 확대되지 않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