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55화 (55/361)

55화. 밤하늘에 점 하나를 찍어 봐 - (11)

“2구도 바깥쪽으로 들어갑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역시 경계가 삼엄하네요. 다카기 선수가 두 번째 타석에서 아웃은 됐지만 타구는 꽤 멀리 날아갔거든요. 승부를 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쿠바의 선발 어네스트는 포수 사인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은 원 아웃 주자 1루, 후속타자 기무라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지만 장타력을 갖춘 다카기에 비해 부담이 크지 않다.

유인구에 끌려나오지 않는다면 거를 뿐,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어네스트는 승부를 고집했다.

‘네 자존심 따윌 어디에 쓰겠냐?’

쿠바의 호세 라미레스 감독의 뜻은 확고했다.

점수 차가 넉넉하다면 모를까 지금은 3대 2로 뒤지고 있다. 여기서 한 방 걸렸다간 끝장, 항명은 용납하지 않았다.

‘실투라고 둘러대면 돼.’

하지만 어네스토는 스트라이크를 던졌다. 카운트에 상관없이 칠 수 있는 공은 달려드는 게 다카기의 스타일, 명백한 실수였다.

까아앙 ~ !!

“쳤다!! 계속 가는 타구!! 펜스를 맞고 나옵니다!! 1루 주자는 2루 돌아 3루!! 타자 주자는 2루까지 들어갑니다!! 아 ~ 이건 넘어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요!!”

“3루 코치의 판단이 아쉽네요. 물론 타구가 빠르긴 했지만 돌려보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요.”

2루타가 확정되는 순간, 일본 벤치에선 아쉬움과 환호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게 안 넘어가다니, 아쉬운 마음은 마찬가지지만 아카마츠 감독은 소란스러운 벤치 분위기를 수습했다.

3회 이후 3대 2에서 멈춰버린 스코어, 이제 안타 한방이면 5대 2까지 벌릴 수 있다.

거기다 후속타자 기무라는 작전수행 능력이 뛰어난 편, 상황은 여러모로 일본에게 유리했다.

‘멍청한 녀석’

호세 라미레스 감독은 어네스토를 끌어내렸다.

얌전히 다카기를 걸렀다면 1사 주자 1, 2루에서 병살작전으로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물 건너 간 일, 화를 억누르는 호세 감독의 얼굴은 방송을 타고 세계로 뻗어나갔다.

‘호들갑 떨 상황은 아닌데’

한편, 다카기는 2루에서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지금 상황은 무사 주자 2-3루, 분명 좋은 기회지만 타석에 선 선수가 땅볼 비율이 높은 기무라라는 게 문제, 여기서 쿠바가 1루를 채우고 3번 타자 카와다를 상대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니나 다를까, 바뀐 투수 후안 리오스는 초구부터 한가운데 빠른 볼을 밀어 넣었다.

‘얘기가 다르잖아.’

초구를 지켜보라는 사인을 받은 기무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봐도 지금은 초구를 때렸어야 했는데 왜 감독은 기다리라는 사인을 낸 건지, 아카마츠 감독의 지도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지시가 날아와 신뢰가 흔들렸다.

‘설마 2-3루에서 스퀴즈를 생각하겠어?’

아카마츠 감독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스퀴즈를 성공하려면 절대 안 할 것 같은 분위기를 형성하는 게 중요, 기무라는 장타력이 떨어지지만 작전수행능력이 좋은 선수라 쿠바도 긴장할 거다.

하지만 초구를 지켜봤으니 경계심이 약간 풀렸겠지, 때가 됐다고 판단하자 번트 사인을 내렸다.

까앙 ~

기무라는 지시대로 번트를 댔고, 쿠바 내야진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3루 주자가 홈을 밟았다.

여기에 후속타자 카와다의 추가타가 이어지면서 스코어는 5대 2, 이대로 경기가 기울어지나 싶었지만, 쿠바도 순순히 물러나진 않았다.

까앙 ~ !!

“아 ~ 이 타구는 어디까지, 펜스까지 굴러갑니다. 그 사이 2루 주자는 홈으로 ··· 스코어는 이제 5대 3, 두 점 차로 좁혀집니다.”

“지금도 바깥쪽인데 잡아당겼거든요. 역시 남미 선수 특유의 유연성과 파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7회 초에 2점 차까지 따라붙은 경기,

낙승을 예상했던 아카마츠 감독은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저 녀석에게 벌써 3안타 째 허용, 신경 쓸 것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일본 벤치는 이내 침묵에 휩싸였다.

까아앙 ~ !!

“이 타구는 멀리 가는데요. 어디까지 가느냐?!! 좌측스탠스를 넘어 갑니다. 조엘 로드리게스의 동점 투런 홈런,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립니다.”

“방심했어요.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놓고 한가운데, 이건 아니죠.”

동점포를 허용한 키요무라는 고개를 숙였다.

동료들이 벌려 놓은 점수를 한 방에 까먹다니, 그것도 혼자 3실점 째라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다.

[춍카기, 오늘 하늘에 별 안 찍냐?]

-> 춍팬한테 뭘 바라냐? 그냥 이대로 져 버리라고

-> 다카기 오늘 2안타에 수비에서도 제 몫 다했다. 그리고 홈런은 키요무라가 맞았는데 왜 다카기를 깎아내리지?

-> 그럼 홈런 치겠다는 말을 하지 말던가. 안타 2개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잘난 척이냐?

한편, 일본의 극성팬들은 화살을 다카기에게 돌렸다.

멕시코 전이 끝나고 그렇게 건방을 떨더니 홈런은 감감 무소식, 다카기의 활약에 대표 팀이 선전을 계속하자 일부 팬들은 자국 대표 팀도 춍팬이라고 깎아내렸다.

타인을 인정하지 못하는 인간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 일부 팬들은 부끄러운 짓이라며 입을 모았지만 분위기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춍팬은 오늘 죽는다!!]

[이 기세로 다음 경기도 지는 거야!! 그리고 대표 팀을 개혁하자!!]

-> 다카기!! 이 벌레들 좀 박멸해 줘!! 제발!!

경기가 6대 5로 뒤집히자 잠잠했던 벌레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이 지고 있는데도 저런 말을 하다니, 다카기가 타석에 들어서자 많은 팬들이 일본의 승리와 벌레박멸을 기원했다.

“아 ~ 다시 볼입니다. 전혀 좋은 공을 안 주는데요.”

“답답하네요. 물론 다카기 선수가 루상에서도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지만, 그래도 뭔가 아쉽습니다.”

카운트가 쓰리 볼이 되자 일본 응원단은 격한 야유를 퍼부었다.

하지만 다카기는 앞선 타석에서 펜스를 직격하는 장타를 날렸다.

거기다 다급한 쪽은 일본, 비겁하다는 욕 좀 들으면 어떤가. 쿠바가 정면승부를 받아줄 이유는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중심타선으로 기용하는 거였는데’

아카마츠 감독은 뒤늦은 후회를 곱씹었다.

오늘 다카기를 3번에 배치하려 했지만, 홈런은 1번이 더 치기 쉽다는 말에 허허하며 웃어넘기지 않았던가. 후속타자들이 뒷수습을 하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무라의 병살타는 희망을 박살내버렸고, 일본 벤치는 9회 초에 1점을 더 내주면서 패배 분위기에 휩싸였다.

물론 오늘 진다고 대회가 끝나는 건 아니다.

그래도 깔끔한 3연승으로 슈퍼라운드에 진출했다면 좋았을 텐데, 경우의 수를 따지자니 체면이 서질 않았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 다들 의미를 모르는 것 같네’

다카기는 음침한 벤치 분위기에 얼굴을 구겼다.

지금 여론은 우승이 아니면 의미 없다는 말로 대표 팀을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타인이 바라보는 시각일 뿐, 선수가 야구를 대하는 시각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왜 여기서 경기를 치르고 있는가. 조국의 체면을 위해?

15 ~ 17살 밖에 안 된 애송이들이 무슨 조국의 체면을 짊어지나. 그건 어른들의 욕심이자 과대망상일 뿐, 다카기는 그런 헛스리에 동의하지 않았다.

‘고시엔이 즐겁니 지금이 즐겁니?’

누군가 그렇게 물어보면 망설임 없이 고시엔을 택했을 거다.

그건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겠지, 즐겁지 않은 야구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학생은 돈을 받는 프로가 아니고, 국가의 체면을 짊어질 의무도 없다.

책임질 게 없는데 왜 다들 얼굴이 굳은 건지, 다카기는 야구를 즐길 마음이 없다면 이 곳에 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날 경기는 7대 5 쿠바의 승리로 마무리, 1승 1패가 된 일본은 캐나다 전에 운명을 걸어야 하는 입장이 됐다.

[아케치인가 도요토미인가, 운명의 텐노잔 내일 오후 7시]

일본여론은 대표 팀을 향한 여론전은 한층 더 강화했다.

텐노잔 전투는 천하인 자리를 두고 아케치 미츠히데와 하시바 히데요시가 충돌한 격전, 일본에선 중요한 승부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봤자 시대의 패배자들일 뿐이지’

하지만 다카기는 어느 쪽도 될 생각이 없었다.

주군을 살해한 아케치 미츠히데의 반란은 3일 천하로 종료, 히데요시가 이룩한 정권은 10년도 못 가 이에야스에게 무너졌다.

패배자들 간의 개싸움을 여기에 같다 붙이다니, 굉장히 불쾌했다.

‘아케치, 도요토미, 어느 쪽이든 내가 갈 길이 아니야.’

그래도 이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각오는 가슴에 새겼다. 고시엔에서도 그 정도 각오는 품지 않았던가, 경기를 치르는 자세는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었다.

* * *

‘이제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

한편, 결전을 앞둔 아카마츠 감독은 타선을 두고 머리를 쥐어짜냈다.

5대 2로 앞서가던 경기를 7대 5로 말아먹다니, 문제는 타선이 아니라 미숙한 불펜운영 아니었을까?

하지만 다카기에 의존하고 있는 타선도 불안요소라는 건 틀림없었다.

‘3번? 아니야, 한 타석이라도 더 설 수 있는 1번이 더 나을지도’

그 녀석의 기량을 최대한 끌어내는 자리는 어딜까, 고생은 했지만 머리를 굴린 보람은 있었다.

‘의외로 궁합이 맞을 지도 몰라.’

아카마츠 감독의 결심은 3번으로 기울어졌다.

다이이치 야구부의 후루타 감독은 다카기를 1번에 배치해 고시엔에서 재미를 봤다. 아카마츠 감독도 그 전략을 벤치마킹, 다카기는 맹활약으로 기대에 부응했다.

하지만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나오는 장타는 이제 의미가 없다.

몇 몇을 제외하면 허수아비가 된 일본 타선, 장작이 얼마나 쌓일지는 모르겠지만 다카기의 한방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잠깐, 그 녀석은 1번에 꽤 애착이 있는 것 같은데’

일방통보로 녀석의 투지를 끌어올릴 수 있을까, 아카마츠 감독은 고심 끝에 다카기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였다.

“내 생각은 이런데, 자네 뜻은 어떤가?”

“지금 상황에선 제가 한 타석이라도 더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솔직한 말에 아카마츠 감독은 쓴 웃음을 지었다.

다른 선수들이 얼마나 못 해주면 이런 말이 나오겠는가.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네 앞에 타격감이 좋은 선수들을 배치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제가 보기엔 그게 그거 같은데요.”

장작이 쌓인다는 보장도 없고, 뭣보다 내가 3번을 쳐도 후속 타자들의 뒷받침이 안 되면 의미가 없다.

타순을 조정해 봤자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 그래도 다카기는 감독의 입장을 배려했다.

“감독님의 마음은 저도 이해합니다. 저희는 아직 어리지만, 감독님은 어른이니 책임질 게 많으시겠죠.”

“그럼 받아들이는 건가?”

“그건 이거하고 별개의 문제죠.”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화술에 아카마츠 감독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많은 학생들을 지도해 봤지만 이런 녀석은 처음, 일단 다카기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감독님이 저하고 이렇게 독대하는 거, 저 왕따 시키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다른 선수는 타선 조정할 때 동의 구하셨어요? 저만 이렇게 특별대우하시면 왕따 시키라고 선전하는 것과 다를 거 없습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은 무시하고 잘하는 학생은 대놓고 칭찬하는 선생님들이 꼭 있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학생들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할 뿐, 지금 아카마츠 감독은 다카기를 특별대우하고 있는데 이런 행동이 선수단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 아카마츠 감독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제가 전에 말씀드렸죠? 전 제 실력을 세계에서 검증받기 위해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어요. 그리고 감독님은 제가 필요해서 뽑은 거고요. 아닙니까?”

“그래 ··· 그렇지 ··· ”

“전 특별대우 받는 거 바라지도 않아요. 쓰임을 받는 건 다른 녀석들하고 다를 거 없는 입장입니다. 감독님이 3번에 서라면 서겠지만, 이건 아닌 것 같네요.”

잔잔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아카마츠 감독은 입을 다물었다.

딱히 선수들을 차별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렇게 따로 불러 논의를 한 건 다카기가 선수들 중 유일하다.

그렇잖아도 대표팀 선수들과 어색한 동거를 하고 있는 다카기, 만약 이 사실을 선수들이 알게 된다면 팀 분위기에 좋을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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