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53화 (53/361)

53화. 밤하늘에 점 하나를 찍어 봐 - (9)

“아름다운 밤입니다. 야구하기 아주 좋은 날이군요.”

이곳은 U-18 본선 경기가 열리는 캐나다, 현지 중계석은 멕시코와 일본의 맞대결을 앞두고 떠들썩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이키? 이시다? 다카기? 들어 본 적 없습니다.”

얼마 전, 멕시코의 선발 카를로스 산체스는 일본을 자극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메이저리그 구단의 주목을 받은 몸, 이제 막 고개를 든 애송이들은 신경 쓰지 않겠다며 선을 그었다.

“멕시코는 야구 변방이잖아요. 메이저리그 다음 가는 시장이 있는 일본의 사정까진 잘 모르겠죠. 이해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멕시코는 야구 변방이니까요.”

다카기는 바로 카를로스의 뼈를 때렸다.

멕시코에서 야구 인지도는 축구에 한참 못 미친다. 거기다 주변에 야구를 잘 하는 국가들이 많아 존재감이 묻히는 편,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도 멕시코가 아니라 남태평양 대회가 열린 쿠바에서 카를로스를 발굴했다.

그에 비해 스카우터들은 마이키 - 이시다 - 다카기의 명성을 듣고 일본으로 직접 찾아갔다.

진짜 무시당해야 할 쪽은 어디일까, 다카기의 발언은 일본 본토의 시청률 상승으로 이어졌다.

[카를로스? 이건 어디서 굴러온 말 뼈다귀야?]

-> 13살에 142km 던졌고 지금은 158km까지 던진다. 말 뼈다귀는 아님

-> 그거 공식기록 아니잖아. 내가 볼 땐 뻥이 반이다.

-> 일본 선수들은 이제 메이저리그 직행도 가능한 수준이다. 청소년 대회라도 멕시코 따위에게 질 수 없지(다카기 파이팅).

-> 다카기,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다. 일본의 당당한 돌격대장

한국전만큼 뜨거운 관심 속에서 치르는 경기,

외야에 앉은 관중들이 일장기를 휘두르며 필승을 연호했지만, 다카기는 감정 없는 얼굴을 유지했다.

“자, 1회 초 일본의 공격, 다카기 하루요시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지역예선 성적은 타율 0.714, 홈런 3개, 7타점, 대표 팀의 선봉장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빠른 볼에 유독 강한 선수거든요. 오늘도 좋은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카를로스는 초구부터 150km에 근접한 빠른 볼을 과시했다.

하지만 결과는 볼, 다카기는 시큰둥한 얼굴로 다음 공을 기다렸다.

‘달라진 게 없는데’

‘뭐, 아직 어리니까.’

다음 공도 볼, 경기장을 찾은 스카우터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중심발이 투구 판을 밀고 나갈 때, 치고 나가는 디딤발은 닫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게 중심이 한꺼번에 앞으로 넘어오면서 밸런스가 무너지는 경우가 있는데, 카를로스는 그 기준에 맞아떨어졌다.

지난 2년 동안 공만 빨라졌지 기술적인 부분은 제자리걸음, 개선될 여지는 있지만 지금은 그 이상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상성이 안 좋군.’

거기다 상대는 일본, 짧고 정확하게 치는 선수들이 대거 포진 돼 있다.

구위는 좋지만 제구에 물음표가 달린 투수에겐 다소 까다로운 팀, 일본의 아카마츠 감독도 카를로스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과연 문제가 제구뿐일까?’

멕시코는 올해 야구강국 베네수엘라를 꺾고 본선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멕시코를 경계한 일본은 멕시코를 해부,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이거 뭐야, 기본도 안 됐잖아.’

카를로스와 호흡을 맞춰야 할 하지엘 로드리게스 포수도 문제점을 드러냈다.

포수에게 요구되는 능력이 한두 가지는 아니지만, 스트라이크가 될 공을 볼로 만들어선 안 된다.

예를 들어 낮은 공이 들어오면 포수는 어떻게 받아야 할까, 미트를 세우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듯이 포구가 되기 때문에 심판은 공이 낮게 들어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너무 눕히면 공이 미트에서 빠져버리기 일쑤, 특히 카를로스처럼 볼은 빠르지만 제구가 불안한 투수라면 포수의 역량이 중요하다.

하지만 로드리게스는 카를로스의 단점을 전혀 보완해주지 못했다. 아니, 돕기는커녕 블로킹이나 기본적인 미트질도 평균 이하, 이런 팀이 어떻게 베네수엘라를 꺾었는지 이해가 안 됐다.

‘베네수엘라도 한 물 갔군. 이 경기는 절대 질 리가 없어.’

아카마츠 감독은 일찌감치 승리를 점쳤다.

거기다 타석에는 선구안과 빠른 볼에 강점을 갖춘 다카기, 이 대결의 결과도 어느 정도 보였다.

‘재미없으니까 하나 봐 준다.’

3구도 볼이 되자 다카기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경기도 수준이 맞는 애들하고 해야지 이게 뭔가. 세계의 벽을 실감하자고 그 먼 길을 날아왔는데 모든 게 기대 이하, 스트라이크 하나 넣으라는 뜻으로 성의 없는 자세를 잡았다.

“다시 낮게! 다카기 선수가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출루합니다.”

“역시 공이 빨라도 스트라이크를 못 넣으면 의미가 없죠. 다카기 선수는 지금 칠 생각도 없었습니다.”

이제 타석에는 한국전부터 타격감을 끌어올리고 있는 기무라, 카를로스는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았지만 불안한 제구는 잡히지 않았다.

‘이제 그만 좀 죽으라고!!’

죽으라고 던져도 다 커트해 내는 타자, 승부가 8구까지 이어지자 카를로스의 인내심도 한계에 이르렀다.

‘나도 방 빼야지.’

상황을 살피던 다카기는 1루에서 멀어졌다.

지금은 마이키 선배와 같은 방을 쓰고 있지만 첫 룸메이트는 기무라였다.

딱히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뭐가 못마땅하다고 방을 뺀 건지, 소심한 항의에 나섰다. 뭣보다 기무라는 땅볼 비율이 높은 선수, 병살을 방지하기 위해 리드를 넉넉히 잡았다.

‘사인 났나?’

1루 주자의 움직임을 확인한 기무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카운트는 2볼 2스트라이크, 작전이 나올 수도 있는 타이밍이다.

혹시 내가 사인을 놓친 건가? 자세를 고쳐 잡기 전, 3루 코치와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이렇다 할 지시는 없었다.

‘아차! 이건 아닌데!!’

8구는 낮은 직구, 누가 봐도 볼인데 기무라는 커트를 해버렸고, 스타트를 끊은 다카기는 1루로 돌아왔다.

‘방 뺀다니까 왜 붙잡으시나?’

나는 말없이 보내드렸는데 본인은 가지 말라고 붙잡고 있으니, 깔끔하게 헤어지자는 눈빛을 보냈다.

깡!!

“아 ~ 높게 뜬 공, 유격수가 그 자리에서 잡아냅니다. 기무라 선수는 10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내야 뜬 공으로 물러납니다.”

“지금도 볼이었는데 급했어요. 기무라 선수가 이번엔 신중하질 못했습니다.”

아웃은 됐지만 끈질긴 모습을 보여준 기무라는 동료들의 환대를 받으며 벤치에 입성했다.

하지만 다카기의 돌발행동은 씁쓸한 뒷맛을 남겼고, 자리에 앉아 녀석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무섭다고 선전을 하세요.’

한편, 다카기는 배터리의 동향을 살폈다.

타석에는 카와다 유키나가, 최근 부진에 빠진 후지타를 대신해 타선의 허리를 책임지고 있다.

최근 잘 맞는 우타자가 들어섰으니 포수는 바깥쪽으로 빠져 앉을 수밖에 없겠지, 왼쪽 무릎을 땅에 대고 있는 것도 눈에 걸렸다.

바로 일어나 송구를 할 수 있는 자세, 하지만 폭투나 예상치 못한 공이 들어왔을 때 대처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1루 주자가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모양, 거기다 제구도 안 되는 투수, 이런 좋은 먹잇감을 놓칠 순 없었다.

“뛰었네요!!”

“다카기 선수는 2루에 들어갑니다!! 도루 성공!! 일본의 선취점 기회를 만들어 냅니다!!”

“역시 야구 센스가 있네요. 이렇게 되면 기무라 선수도 아쉬움도 달랠 수 있겠죠.”

눈 뜨고 당한 멕시코 배터리는 할 말을 잃었다.

특히 카를로스가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 하지만 뭐가 잘못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감독은 물론 코치도 내가 던지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 그런데 나는 저런 아시아인 따위에게 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건가, 누가 답을 찾아주길 바랐다.

까앙 ~ !!

“당긴 타구가 좌익수 옆에 떨어집니다!! 그 사이 2루 주자는 홈으로!! 일본이 선취점을 가져갑니다!!”

“다카기 선수를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지금은 사실 홈으로 들어오기엔 조금 짧았는데, 구리엘 선수가 멈칫하는 걸 보고 바로 뛰었어요.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플레이가 승부를 가르는 겁니다.”

홈에 입성한 다카기는 완만한 커브를 그리며 포수 뒤를 지나쳤다.

다 네 멍청한 선전 덕분이라는 감사의 표현, 하지만 하지엘은 그 뜻을 알아채지 못했다.

‘한마디 할까.’

한편, 기무라는 동료들과 세리머니를 나누는 다카기를 예의주시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감독도 가만히 있는데 일개 선수가 충고를 하는 것도 애매했다. 결국 말 한 마디 못하고 다카기와 손을 마주쳤고, 그대로 벤치에 눌러 앉았다.

“쟤들 진짜 야구 못하지 않아요?”

이때 다카기가 던진 말 하나가 더그아웃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그런 말을 대놓고 하다니, 실례지만 사실이라 아무 반론도 날아오지 않았다.

이날 멕시코의 선발 카를로스 산체스는 2와 1/3이닝 동안 무려 62개를 던지며 5볼넷, 5피안타, 6실점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받아들었다.

그에 비해 마이키 요시토모는 멕시코 타선을 1실점(7이닝)으로 틀어막으며 호투, 일본의 17대 1승리를 이끌었다.

다카기도 5타석 2타수 1안타, 3볼넷, 3득점 활약을 펼치며 팀 공격을 주도, 첫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 아카마츠 감독은 다소 피곤한 얼굴로 일본 기자들을 마주했다.

“감독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오. 실은 어제 잠을 못 잤습니다.”

시차적응이 이렇게 괴로운 것이었다니, 그렇게 따지면 시차적응에 경기까지 치른 선수들은 어떻겠는가?

기자의 장난 섞인 농담에 아카마츠 감독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그 녀석들은 아직 10대 아닙니까. 50이 다 된 저와 비교하지 마십쇼.”

“하하 ~ 죄송합니다. 그럼 다음 질문 드리겠습니다.”

“예”

“팬 여러분들이 역대 최강의 U-18 팀이라는 극찬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감독님도 이에 동의하십니까?”

“뭐 ··· 글쎄요. 일단 그런 칭찬을 들으려면 우승부터 해야겠죠. 방심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독 인터뷰가 끝나고 기자들의 관심은 선수들에게 집중됐다.

7이닝 1실점 투구를 펼친 마이키, 홈런 포함 4타점을 쏟아 부은 카와다 유키나가, 인터뷰 할 선수는 얼마든지 있지만 다카기는 헛스윙 한 번으로 기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다카기는 A조 예선, 그리고 본선 진출이 걸린 3연전에서 단 한 번도 헛스윙을 하지 않았다.

그런 선수가 오류를 범하다니, 야구팬들은 기계가 오작동을 일으켰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다른 것도 많은데 왜 그걸 끄집어내는 거야?’

물론 다카기는 기자들의 질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2타수 1안타, 3볼넷, 4득점, 칭찬할 거리는 얼마든지 있는데 굳이 헛스윙을 언급하다니, 머리를 굴리다 얼토당토않은 변명거리를 앞세웠다.

“타석에서 언뜻 밤하늘을 봤는데 별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채워주려고 한 겁니다.”

밤하늘은 별이 있어야 제격, 텅 빈 절경이 아쉬워서 점을 하나 찍어보려 했다는 궤변에 기자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 그래서 그런 스윙을 하신 겁니까?”

“네. 그런데 생각만큼 잘 안 되더라고요. 다음에는 채워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기자들은 바로 인터뷰를 기사에 올렸다.

다음 경기에선 홈런을 치겠다는 예고인가? 실력이 없는 선수라면 허풍으로 들렸겠지만, 전과가 있는 선수라 농담으로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뭐 이런 건방진 자식이 다 있어?’

물론 일본의 다음 상대로 결정된 쿠바는 다카기의 인터뷰를 고깝게 받아들였다.

쿠바는 U-18 최다 우승국, 하지만 최근 미국과 주변 나라의 약진에 밀려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밤하늘에 홈런을 박아주겠다는 말이 곱게 들릴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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