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밤하늘에 점 하나를 찍어 봐 - (8)
“스트라이크!!”
이어지는 4회 초 한국의 반격, 위기를 넘겼지만 선수들은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일본의 선발 이시다는 140km를 넘나드는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고 체인지업으로 마무리하는 패턴을 반복, 그래도 한국 타자들은 대응을 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더 떨어지는데’
이런 흐름은 이시다의 투구 폼과 연관이 있었다.
빠른 볼 제구가 안 돼서 이런 저런 시도를 하다 투구 중간에 멈칫하는 동작을 추가했는데, 공에 실리는 힘이 떨어지면서 직구가 마지막에 가라앉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잠깐, 이게 의외로 먹힐지도”
다이이치 야구부의 다나카 코치는 이 부작용에 주목했다.
이시다의 결정구는 체인지업, 싱커처럼 움직이는 빠른 볼은 체인지업과 의외로 좋은 궁합을 발휘하지 않을까? 이 예상은 멋지게 맞아떨어졌다.
‘저런 투수는 볼이 많아야 정상인데’
한국의 이성환 감독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 공이 가라앉는 타입은 스트라이크를 넣기 어려워 투구 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필요할 때는 스트라이크를 찔러 넣으니, 기다리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애매했다.
결국 한국의 공격은 성과 없이 종료, 일본의 반격이 시작됐다.
“자, 이제 경기는 5회 말 일본의 공격으로 이어지겠습니다. 선두타자는 이마오카, 오늘 앞 선 두 타석에선 모두 범타로 물러났습니다.”
“정영규 선수가 지금 투구 수가 75개거든요. 조금 더 적극적인 투구를 해주길 바랍니다.”
이현진 해설위원은 안타까운 충고를 이어갔다.
구위가 좋다면 좀 더 빠른 볼에 의존해도 될 텐데, 정영규는 오늘도 변화구 비율이 높은 편이다.
투구 수 관리에 실패하는 것도 그런 이유, 하지만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어? 맞았네.’
이마오카가 빠른 볼을 받아치자, 정영규는 다시 변화구 비율을 높였다.
투수가 가장 많이 던지는 공은 빠른 볼, 당연히 그만큼 안타도 많이 맞는다. 그래도 던져야 되는데 그러질 못한다는 건 큰 단점, 다행히 주무기로 활용하는 커브가 나쁘지 않지만 타순이 한 바퀴 돌자 일본 타자들은 같은 패턴에 속지 않았다.
이시다는 빠른 볼과 구별이 어려운 체인지업이 주무기지만, 커브는 그게 아니라 카운트는 더욱 불리해졌다.
까앙 ~ !!
“내야를 ··· 빠져 나갑니다. 1루 주자는 2루를 지나 3루까지, 일본이 무사 주자 1, 3루 기회를 맞이합니다.”
“지금은 잡으러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타자가 놓칠 리가 없죠. 그렇게 적극적인 투구를 강조했는데, 지금 던지면 뭐 합니까.”
팽팽했던 경기에 균열이 생길 조짐이 보이자 한국 벤치는 분주해졌다.
거기다 다음 타자는 다카기 하루요시, 흐름상 여기서 한 방 터지면 경기는 어려워진다. 투구 수도 많겠다, 이성환 감독은 정영규를 내리고 김천웅을 마운드에 올렸다.
‘여기서 한 방 치면 안티가 400만 명 정도 생기겠는데?’
한편, 다카기는 묘한 미소를 품고 타석에 섰다.
한국의 시청자들도 이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겠지, 한 방 치면 별의 별 말이 다 나오겠지만 개의치 않았다.
‘예상했던 패턴이네.’
초구를 지켜본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피칭, 강타자를 상대할 때 투수들이 자주 쓰는 방법 아닌가. 들어올 생각이 없다면 기다릴 뿐, 무리하지 않았다.
“아 ~ 다시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이 상황에선 들어가도 의미가 없네요. 차라리 무사 만루 작전으로 가는 게 낫겠습니다.”
카운트가 몰리자 이성환 감독은 고의사구를 지시했다.
이것도 예상했던 패턴, 대충 자세를 잡고 있던 다카기는 4번 째 공이 포수 미트에 들어오기도 전에 배트를 내던졌다.
‘다음 고시엔도 이러려나? 놀아줄 상대가 없으면 재미없는데’
1루에 자리 잡은 다카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올해는 1학년이라 날 얕잡아 보고 놀아주는 투수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 실력을 증명했으니 견제는 더 심해지겠지, 3학년 선배들도 다 은퇴했는데 날 받쳐줄 선수가 있을까. 여기는 대표 팀이라 그나마 괜찮지만, 소속팀은 그게 아니라 내년 전망은 약간 불투명했다.
까앙 ~ !
“좋아!!”
“됐어!!”
한편, 후속 타자 기무라는 유격수 키를 살짝 넘어가는 안타로 일본에 선취점을 안겼다.
3루 주자 이마오카는 여유 있게 홈으로, 2루 주자까지 홈으로 파고들자 좌익수는 홈 송구를 택했다.
하지만 결과는 세이프, 팽팽했던 경기는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무너졌군, 한국 대표팀’
후속타자 후지타가 희생타를 쳐 주자 아카마츠 감독은 승리를 확신했다.
적어도 패배를 안겨준 스리랑카전보다 험난한 여정이 예상됐는데 생각보다 쉽게 풀리고 있는 경기, 경기가 일본 쪽으로 기울면서 한국 여론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반쪽발이에 빨갱이의 피까지 이어받은 놈에게 지면 치욕이다. 지면 다들 한국에 돌아오지 마라]
->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그거 다 해명 된 게 언젠데 아직도 개소리 지껄이냐?
-> 도대체 뭐가 진실인데? 누가 설명 좀 해 봐.
-> 고명출이 조총련하고 잠깐 엮인 건 맞아, 그런데 북한이 상납금 요구하고 슬슬 본색을 드러내니까. 북한으로 넘어가려는 동포들 설득하고 막았어, 일본이 자이니치 북송할 때 고명출이 배 지원 거부한 적도 있고, 물건은 팔아도 동포는 안 팔았다는 거다. 옛날에 밝혀진 걸 왜 지금 기사로 내보낸 건지 이해가 안 됨.
[고명출이 간토 대지진 때 죽었어야 돼. 그래야 다카기 이 자식이 안 태어났을 텐데]
-> 그때 죽은 조선인이 몇 명인데, 위안부 망언에 버금가는 개소리를 ··· 너 한국인 아니지? 아니길 바란다.
-> 어차피 일본에 돈 벌러 간 인간들 아냐. 현실로 따지면 외국인 노동자들인데,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하고 간 거 아냐?
-> 허허 ~ XX 할 말을 잃었습니다. 해외에 돈 벌러 가면 맞아 죽는 거 당연히 각오해야 되는 거야?
[고명출이 무슨 죄냐? 나도 한때 그 인간 안 좋게 봤는데, 백성을 지키지 못한 나라는 국민에게 지울 의무가 없다는 말 듣고 느낀 거 많았다. 지금 우리나라 정부가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하고 있나? 이젠 애국이라는 선전에 흔들리면 안 되는 시대다.]
-> 걸핏하면 헬조선 운운하는 놈들이 이런 때는 태세전환이지, 독립운동가 코스프레 그만해라. 토 나온다.
대표 팀의 부진과 다카기의 활약은 한국 여론에 논란을 일으켰다.
애국이란 무엇인가.
하라면 해야 하는 건가,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불행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점에서 국민의 신뢰를 배신한 정치인과 친일파는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경기가 흘러갈수록 다카기는 한국 야구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까아앙 ~ !!
“아 ~ 이 타구는 ··· 좌측 담장을 직격합니다. 다카기 선수의 2루타, 일본이 5대 1로 점수 차를 더 벌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네요. 잘 던졌고 잘 쳤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현진 해설위원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국내 프로선수들의 기량이 날이 갈수록 떨어지면서 팬들의 실망도 커지고 있는데, 청소년 대표 팀까지 이런 모습을 보여줄 줄이야.
그에 비해 매년 괴물이 쏟아져 나오는 일본, 거기다 한국에 비수를 꽂은 건 재일교포 4세,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입맛은 씁쓸해졌다.
‘경축, 한국 안티 400만 명 확보’
한편, 2루에 안착한 다카기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선수들은 모르겠지만, 다카기는 최악의 상황에서 실력이 극대화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안티가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날 자극하는 계기가 되겠지, 욕하려면 더 하라며 피식거렸다.
‘이젠 됐다. 다 해결 됐어.’
아카마츠 감독은 결정타를 날린 다카기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한국 격파의 선봉장이 됐으니 녀석을 향한 여론의 반응도 달라지겠지, 지금 기세로 우승까지 한다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이날 경기는 일본의 5대 1 승리로 마무리, 2승을 선점한 일본은 본선 진출 청신호를 밝혔다.
“감독님, 오늘 승리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경기가 후 아카마츠 감독은 밝은 얼굴로 기자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홍콩을 22대 0으로 꺾어도 시원치 않던 반응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뭣보다 다카기의 활약으로 한국전을 잡아냈다는 게 더 기뻤다.
다들 그 녀석은 필요 없다고 했지만, 없었으면 어쩔 뻔 했는가.
자존심을 버리고 초빙한 선수, 그 활약이 눈에 띌수록 아카마츠 감독의 어깨엔 힘이 들어갔다.
“스리랑카 전 패배 이후, 대표팀이 3연승을 달리고 있는데 그 원동력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게 원래 일본의 모습입니다. 팬 여러분들이 그동안 너무 오래 기다리셨는데, 올해는 반드시 우승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감독 인터뷰가 끝나고 기자들의 관심은 다카기에게 집중됐다.
지금까지 성적은 14타수 10안타(0.714), 이 중 장타가 무려 7개다(2루타 4개, 홈런 3개).
고시엔에서 빼어난 활약을 한 선수도 국제대회에선 힘을 못 쓰는 경우가 많은데, 설마 여기까지 할 줄이야.
놀랍다, 대단하다, 이런 수식어는 이제 식상해서 같다 붙이기도 민망했다.
“다카기 선수, 홍콩 전에서 3홈런을 때렸어도 만족 못했다는 말을 하셨는데, 오늘은 만족하셨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질문은 던진 기자는 당황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만족이 된다는 건지, 이번 기회에 속마음을 캐물었다.
“한국은 ··· 글쎄요. 나름 괜찮은 팀이었지만 솔직히 어렵진 않았습니다.”
“좀 더 강한 상대를 원하신다는 겁니까?”
“네, 캐나다 본토에서는 제가 원하던 상대를 만나길 바랍니다.”
이렇게 인터뷰는 종료, 다카기를 한국이 보낸 스파이 취급하던 일본 여론도 들썩였다.
[이게 절대강자의 위용이라는 건가. 솔직히 무섭다]
-> 지금 감탄할 때냐? 춍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뒀다고, 이건 일본의 굴욕이다.
-> 외국인 선수로 생각해도 상관없다고 했잖아. 일본은 이기고, 본인은 실력 향상 되고, 뭐가 불만인데?
[그냥 생각 없이 볼래. 이제 일본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 춍이라고 욕해서 튕기는 것 같은데, 응원 많이 해주자. 그럼 다카기의 태도도 달라지겠지
이날 이후, 일본은 스라랑카에게 지난날의 패배를 설욕하며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한국 역시 말레이시아를 격파하고 2위로 본선 진출에 성공, 캐나다로 출국하는 공항에서 양 팀 선수들은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다음에는 우리가 이긴다.’
‘5대 2로 진 주제에’
물어뜯어도 끊어지지 않는 질긴 악연, 사소한 눈싸움이 오갔지만 다카기는 그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했다.
“야, 너 면세점에서 물건 더 싸게 살 수 있냐?”
“네?”
이때 마이키가 다카기의 옆구리를 찔렀다.
도쿄 공항엔 스미다 그룹이 운영하는 면세점이 있다.
스기토모, 스미다 그룹이 각별한 사이를 이어오고 있다는 건 여론에 널리 알려진 사실, 스기토모 그룹의 도련님이라면 물건을 좀 더 싸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마이키는 약간 기대를 품었다.
“제가 뭐라고 물건을 싸게 줘요?”
“솔직하게 말해. VIP 우대 같은 거 없냐?”
다카기는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마트 할인 행사도 아니고 면세점에서 물건을 깎아달라니, 어이가 없었다.
“저 아무 힘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쳇 ~ 뭐야. 도련님이라고 별 거 없잖아?”
“선배, 그게 가치를 인정받길 바라는 사람이 할 말인가요?”
물건에 값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가치라는 게 있다.
마이키는 훗날 프로진출을 희망하는 입장, 물건 값도 제대로 지불 못하는 사람이 내 가치는 인정받길 바란다?
후배의 충고에 마이키는 입을 쭉 내밀었다.
“야, 넌 도련님인데 그런 힘도 없냐?”
“저 용돈 받고 사는 신세거든요? 드라마 같은 설정 기대하지 마세요.”
그제야 마이키는 피식 웃고 말았다.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나와 다를 게 없는 삶을 살고 있다니, 김이 팍 새버렸지만 녀석과의 거리가 조금 더 좁혀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