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51화 (51/361)

51화. 밤하늘에 점 하나를 찍어 봐 - (7)

‘생각보다 빠른데?’

초구(볼)를 지켜본 박민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시다는 기교파로 알고 있는데 체감 구속은 강속구 투수다.

혹시나 해서 전광판을 살펴봤지만 구속은 138km,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닌데 도깨비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공은 본 적도 없어.’

살짝 떨어지는 체인지업도 일품(파울), 체인지업은 본래 변화구가 아니라 회전이 덜 걸린 빠른 볼에 가깝다.

덜 걸린 회전 때문에 공이 마지막에 떨어지는 건데, 박민수는 히팅 포인트를 뒤에 두는 편이라 체인지업이 큰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치기 어려운 공, 오늘 승부는 쉽지 않겠다는 걸 실감했다.

‘빠른 볼이 먹히겠네.’

이시다는 포수와 신중히 사인을 주고받았다.

체인지업은 그럭저럭 따라오는 것 같은데, 빠른 볼도 그럴까? 초구 빠른 볼은 골라냈다기보다는 미처 반응하지 못한 느낌, 바로 시험에 나섰다.

까앙 ~ !

“타격!! 아 ~ 3루수가 파울라인 근처에서 잡아냅니다. 원 아웃, 박민수 선수의 첫 타석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지금은 타이밍이 조금 늦었거든요. 체인지업보다는 빠른 볼에 타이밍이 맞췄어야 했는데 ··· 아쉽습니다.”

이시다는 한국의 1회 초 공격을 삼자 범퇴로 틀어막았다.

고시엔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피칭은 건재, 첫 단추를 잘 꿴 일본은 다카기를 선봉장으로 삼아 공세에 나섰다.

“자, 1회 말 일본의 공격, 다카기 하루요시 선수가 타석에 섭니다. 이번 대회 성적은 타율 0.700, 홈런 3개, 6타점, 역시 요주의 선수다운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선수가 초구를 잘 치긴 하는데, 그래도 넣어야 됩니다. 도망치면 더 힘들어져요.”

초구(스트라이크)를 지켜본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영규는 장신(184cm)을 활용해 공을 내리찍는 타입, 지역예선에서 붙어본 히라타니와 투구 스타일이 비슷한데, 그보다는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 이 정도면 되겠지.’

다카기는 배트 그립을 낮게 조정했지만 어깨는 살짝 열어뒀다.

어깨를 열면 바깥 쪽 공에 대응하기 어렵겠지만, 저런 투구 폼은 좌우 제구가 어렵다. 결국 이 타석은 힘과 힘의 대결에서 승부가 나겠지, 파워를 더 실어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기분 탓인가?’

포수 마스크를 쓴 이정홍은 곁눈질로 타자를 살폈다.

뭔가 달라진 것 같긴 한데 기분 탓이겠지, 복잡한 생각은 집어치우고 다음 공을 기다렸다.

까아앙 ~ !!

“높게 날아가는 타구!! 중견수 계속 뒷걸음질 칩니다!! 담자 ~ 앙!! 앞에서 잡아냅니다!! 후우 ~ 지금은 아찔했습니다.”

“다행이네요. 확실히 다카기 선수는 타구가 뜨면 별 재미를 못 보는 것 같은데, 정영규 선수는 오늘 제구를 낮게 가져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1루 근처에서 타구의 종착점을 확인한 다카기는 천천히 벤치로 향했다.

생각대로 됐던 타격, 그래도 결과가 따라주지 않을 때가 있다. 고시엔부터 지금까지 쳤다 하면 안타 행진, 가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야구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지금은 위험했어.’

아웃은 잡아냈지만 정영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카기는 일본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선수, 방금 던진 공은 혼신의 힘이 실린 일격이었다. 그런데 이게 저기까지 날아가다니, 어디서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일이다.

다음에도 이런 승부가 통할까? 영상자료를 보고 투수들이 왜 저 자식을 피해가나 했는데, 직접 겪어보니 이해가 됐다.

양 팀 선발투수가 무사히 1회를 넘기면서 경기는 투수전으로 흘러가는 듯 했지만, 2회 초 선두타자 김인호가 안타를 때려내면서 한국은 선취점을 올릴 기회를 잡았다.

‘한국에 친척이 있다는 건 알겠지? 하긴, 그 난리를 피웠는데 ··· ’

김인호는 곁눈질로 다카기를 살폈다.

분명 신경 안 쓰겠다고 다짐했는데 나와 같은 피를 공유했다는 것만으로도 자석처럼 끌리는 느낌을 받았다. 입이 근질근질한데 할 말은 없고, 뭣보다 한국어를 알아듣는다는 보장이 없어 그만 관뒀다.

‘견제 한 번 하시죠.’

다카기는 이시다와 눈빛을 교환했다.

선배와는 지난 1년 동안 수도 없이 사인을 주고받았고 이제는 척 하면 척, 대답은 바로 날아왔다.

‘깜짝이야.’

잠깐 정신 줄을 놓고 있던 김인호는 서둘러 1루로 귀환했다.

거기다 무슨 태그를 이렇게 강하게 하는지, 한 살 어린 동생에게 약간 서운함을 느꼈다.

“좀 아프다?”

한국어로 경고를 날렸지만 답이 없는 녀석, 역시 일본에 물든 일본인이라는 건가? 이제부터는 동생이 아니라 적으로 보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아프라고 한 거야.’

한국어를 알아들은 다카기는 김인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가볍게 인사만 할 생각이었는데, 이번 태그는 자기가 생각해도 강하게 들어갔다.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다면 사과할 일, 뜻밖의 반응에 김인호는 혼란에 빠졌다.

‘뭐야 이 자식, 내 말 알아들었나?’

다시 말을 걸어볼까 했지만 그만뒀다. 지금은 경기 중, 혹시 이것도 내 집중력을 분산시키려는 수작 아닐까? 더는 말려들지 않았다.

선두타자가 살아나갔지만 한국의 2회 초 공격은 득점 없이 종료, 일본의 공격도 비슷하게 흘러갔지만 선수들의 집중력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특별한 의미가 담긴 한일전, 여론도 그렇고 감독님도 오늘 따라 기합이 들어가 있는데 나도 불타올라야 하는 건가?

하지만 다카기는 이 경기에 큰 의미를 부여할 생각은 없었다.

‘나도 막 불타오르고 그래야 돼? 그런데 뭘 위해서? 내 적은 누구지?’

왜 한국과 일본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과거의 원한 때문에? 다카기는 이 상황을 나름대로 재해석했다.

“너는 싸우지 않아도 된다.”

“안 싸워도 된다고요?”

“그래”

왜 할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셨을까?

평생을 차별과 싸워왔다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그동안 누굴 적으로 삼고 싸워왔던 걸까? 자이니치라 모욕하는 일본? 하지만 일본에 빌붙어 이득을 챙긴 놈이라며 욕을 퍼부은 건 한국 여론도 마찬가지다.

[고명출, 한때 조총련과 협력 관계였다.]

한일전을 앞두고 한국 여론은 다시 스기토모 그룹의 역사를 들춰냈다.

해방 후, 재일조선인들은 사업을 하고 싶어도 돈을 빌릴 곳이 없어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그건 스기토모 그룹도 마찬가지, 패망 후 사업은 망해버렸고 일본 정부가 재기에 필요한 돈을 빌려주지 않자 고영길의 할아버지 고명출은 조총련을 통해 북한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렇게 버티다 1957년, 일본 정부가 신용대출은행을 설립해 기업들을 지원하자 겨우 숨통이 트였고, 1961년에 북한과의 관계를 끊었다.

[반쪽발이 + 빨갱이 = 다카기 하루요시(일본 대표팀)]

-> 와 ~ 이렇게 저주받은 핏줄이 또 있을까? 최악의 조합이네.

-> 진짜 막장이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듯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쪽발이에 빨갱이 조합이면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기 어렵겠네.]

이런 사실 때문에 한국의 몇 몇 네티즌들은 다카기를 반쪽발이에 빨갱이 피까지 이어받은 저주 받은 핏줄이라며 욕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재일한국인들이 북한과 손을 잡은 건 어쩔 수 없는 일, 살아갈 길이 막막한데 그럼 다 손가락 빨다 죽으라는 건가.

이런 것도 모르고 조총련과 관련됐다면 무조건 욕하고 보는 한국, 그럼 한국 정부는 재일한국인들을 위해 뭘 했는가?

살아갈 길을 열어준 것도 아니면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양심 있는 행동 아닌가? 다카기는 한국 여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원망하지도 않았다.

‘내가 할아버지 원한을 짊어질 이유는 없지. 너희들이 날 욕하는 건 자유지만, 그 이상 까불면 재미없을 거다.’

다카기는 솔직히 두 나라에 별 다른 감정은 없었다. 날 욕하는 여론에 욱하긴 했지만, 그게 일본 전체를 미워할 이유는 될 수 없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도 있기 마련, 한국의 피를 이었다고 모든 일본인이 날 증오하나? 이시다 선배도 그렇고 날 한 명의 인간으로 대우해주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 조상의 나라라고 하는데 그것 외엔 아무 인연도 원한도 없다.

이런 나라를 의식하고 경기를 한다는 것도 웃긴 일, 너만은 반드시 이기겠다는 한국과 일본의 여론에 동조할 이유가 없었다.

“넌 싸우지 않아도 된다 = 내 원한을 짊어질 필요는 없다.”

다카기는 드디어 할아버지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평생을 치열하게 싸워왔지만 나이가 들어 이젠 그것도 버거우시겠지, 얼마 살지도 못할 노인이 후손에게 증오심을 안겨주고 떠나다니, 그게 바람직한 일인가?

다카기는 할아버지의 뜻을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영웅처럼 행세할 생각도 없었다.

‘난 현실감각 없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고’

그럼 평화를 외치며 일본과 한국의 관계개선을 주장해야 하나? 다카기는 그게 옳다는 걸 가슴으로 이해했지만 머리로는 수긍하지 않았다.

한일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할아버지처럼 원한을 가슴에 묻을까. 아니, 내 원한을 세상이 알아주길 바라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게 틀린 행동이라고 책망할 수도 없는 일, 이렇게 원한은 대대로 계승되고 가해자는 계속 책임을 회피할 거다. 그리고 이게 냉정한 현실이다.

‘난 내 갈 길 갈 테니까, 너희들은 피 터질 때까지 싸워, 안 말린다.’

절대 끝나지 않을 싸움, 그럼 그 중간에 끼인 나는 누구를 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내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누구라도 한방 먹여줄 뿐, 그렇게 생각하니 투쟁심이 조금은 끓어올랐다.

그렇게 경기는 흘러 3회 말, 1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다카기는 2번 째 타석을 맞이했다.

오늘 정영규를 상대로 외야로 타구를 보낸 유일한 선수, 아카마츠 감독은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까앙 ~ !!

“초구 타격! 우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오늘 일본의 2번 째 안타, 뭐 ··· 이 정도면 선방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렇습니다. 장타만 억제하면 됩니다.”

한국 벤치가 초조함을 달래는 동안, 아카마츠 감독은 다카기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쳤다 하면 강한 타구, 지금도 방향만 좋았다면 2루타는 보장됐다.

이런 선수가 라인업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대 투수에겐 부담이 되겠지, 거기다 발도 빠르고 주루 센스도 탁월해 이래저래 까다롭다. 말 그대로 완전체, 여기서 한국을 깨부수고 완전한 일본인으로 거듭나주길 바랐다.

‘너 혼자 다 먹겠다는 거냐?’

다음 타자는 기무라, 후지타처럼 대놓고 대립각을 세운 건 아니지만, 기무라도 다카기를 의식했다.

천하의 가나가와 야구부가 고시엔 본선 첫 경기에서 패하다니, 거기다 상대는 지금까지 이렇다 할 명성도 없던 다이이치였다.

고시엔 우승과 MVP까지 가져가더니 이제는 대표 팀 분위기까지 주도한다고? 저 녀석에게 맛있는 부분은 더 이상 내주기 싫었다.

까앙 ~

“깊은 타구 ··· 2루는 늦었고!! 1루에도 던지지 못합니다!! 주자 올 세이프 ··· 대한민국이 1사 주자 1 - 2루 위기를 맞이합니다.”

“아 ~ 이건 아니죠!! 지금은 박민수 선수가 타구를 너무 기다렸어요!!”

그렇게 칭찬하던 선수건만, 이현진 해설위원은 아쉬움을 표했다.

1루 주자 다카기 그리고 기무라는 주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선수, 거기다 기무라는 땅볼 타구가 대부분이다.

이런 걸 고려했다면 좀 더 적극적인 대시를 했을 텐데, 여기서 균형의 추가 무너지는 건 아닌지 근심 어린 눈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망했다.’

박민수는 동료들에게 미안하다는 뜻을 표했다.

지금까지 수백, 아니 수 천 번은 더 받아낸 땅볼 아닌가. 그런데 이번 타구는 선뜻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동안 노력은 해봤지만 타구에 대한 공포는 어쩔 수 없는 일, 그래도 나름 많이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중요한 타이밍에 울렁증이 도지면서 어깨가 오그라들었다.

‘이건 내가 먹는다.’

다음 타자는 3번 후지타 겐고로, 앞 선 타석에선 플라이로 물러났지만 이번에야말로 영웅이 되겠다는 의욕을 앞세웠다.

하지만 초구부터 헛스윙, 울컥한 아카마츠 감독은 팀 배팅에 신경 쓰라는 사인을 넣었다. 하지만 강한 타격을 고수해 온 후지타에겐 어려운 요구, 어설픈 공에 배트가 따라 나가면서 투 스트라이크가 적립됐다.

“스윙!! 삼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2루 송구!! ··· 잡아냅니다!! 더블 플레이!! 정영규 선수가 고비를 넘어갑니다!!”

“지금은 힘으로 눌렀죠!! 히트 앤 런이 나올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기가 막히게 맞아들었네요!!”

투 스트라이크에서 빠른 볼을 승부구로 던질 줄이야,

히트 앤 런 작전을 지시했던 아카마츠 감독은 고개를 떨궜다. 이건 이성환 감독이 내 작전을 완전히 읽었다는 뜻, 감독으로서 이 이상의 수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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