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50화 (50/361)

50화. 밤하늘에 점 하나를 찍어 봐 - (6)

“감독님, 대승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경기가 끝난 후, 아카마츠 감독은 기자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오늘 일본은 홍콩을 22대 0으로 꺾으며 지역예선 통과를 확정지었다. 한때 일본의 위기를 점쳤던 여론은 쏙 들어갔고, 자신감을 얻은 아카마츠 감독은 당당히 가슴을 폈다.

“감독님, 스리랑카 전 패배 이후 여론이 좋지 않았는데, 하루 만에 분위기를 바꾼 비결이라도 있으십니까?”

“이게 원래 일본의 모습입니다. 비결이나 이전과 비교해 달라진 건 없습니다.”

아카마츠 감독은 기자의 의도를 교묘히 피해갔다.

오늘 다카기는 리드오프 홈런 포함, 4안타 5타점 대활약을 펼쳤다. 다카기를 의식하는 여론은 녀석의 활약이 일본의 승리에 얼마나 보탬이 됐는지 따지고 있겠지.

하지만 아카마츠 감독은 의미 없는 짓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 녀석은 일본인이다. 그리고 이게 진짜 우리의 실력이지.’

다카기가 없어도 대만은 쉽게 잡아냈지만, 역시 녀석의 유무에 따라 타선의 무게감이 달라진다.

능력이 있다면 그만한 대우를 해주는 게 세상의 이치, 다카기는 일본 대표 팀의 일부라는 뜻을 분명히 했다.

“다카기 선수, 성공적인 복귀 축하드립니다.”

“예”

기자들의 다음 타깃은 역시 다카기,

자신을 외국인 선수로 여겨도 상관없다는 폭탄 발언 이후 공식 인터뷰는 이게 처음, 잘못 건드렸다간 좋을 게 없겠지, 민감한 질문은 가려냈다.

“오늘 3홈런 포함 4안타, 5타점 대활약을 펼치셨는데, 본인의 활약에 만족하십니까?”

“홍콩 상대로 거둔 결과입니다. 팬들도 인정 안하는 활약에 무슨 만족을 하겠습니까.”

기자들은 뜨끔했다.

홍콩상대로 이 정도 하는 건 의미 없다며 비아냥거리는 팬들이 있는 게 사실, 그렇다고 해도 공식 인터뷰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건 조금 ··· 상대 팀에 대한 무례가 아닐까요?”

“실력이 없는 건 없는 겁니다. 어설픈 친절보단 불쾌한 도발이 홍콩의 발전에 도움이 되겠죠.”

비난과 격려가 교묘히 섞인 대답, 아직 다카기의 캐릭터를 이해 못한 기자들은 아리송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제 본선 진출을 위한 경쟁이 시작될 텐데, 가장 경계해야 할 나라는 어디라고 보십니까?”

“당연히 한국이죠.”

다카기는 입꼬리를 슬쩍 들어올렸다. 정해져 있는 답을 묻다니, 다음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는 뻔했다.

“한국을 상대로 어떤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실 생각이십니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세계의 넓음을 깨닫기 위해 대표 팀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한국은 좋은 팀이고 뛰어난 선수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부디 제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경기력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다카기의 인터뷰는 한국 여론까지 뒤집어 놨다.

쪽발이 주제에 누가 누굴 평가하려고 하느냐는 말부터, 일부는 벌써부터 경기가 기다려진다는 기대를 표하기도 했다.

* * *

‘말이라도 걸어볼 기회가 있을까?’

이곳은 B조 1위를 확정지은 U-18 한국대표팀 숙소, 그 일원인 ‘김인호’는 이제 막 올라온 기사를 들춰봤다.

남들에겐 비밀이지만 김인호는 다카기와 먼 혈연관계다.

물론 서로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고, 부모님의 입을 통해 일본에 친척이 있다는 것만 들었을 뿐이다.

남이라고 봐도 좋은 관계, 뭣보다 몇 년 전 벌어진 소송은 겨우겨우 이어지던 집안 유대를 완전히 박살내버렸다.

“그 인간들이 조상 묘 모시는 땅 팔아먹으려고 해요!!”

한국 여론을 떠들썩하게 한 토지소송은 김인호의 숙모가 일본에 연락을 하면서 시작됐다.

원래는 서로 공평하게 나누기로 했는데 집안 남자들이 수작을 벌인 게 문제, 내가 못 먹을 땅이라면 너희들도 못 준다는 생각으로 달려들었다.

소식을 접한 고영길은 변호사 군단을 꾸려 한국법원에 소장을 제출, 이 과정에서 김인호의 숙모는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길 기대했지만, 맺고 끊는 게 확실한 고영길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 땅은 하루 앞으로 넘겨줄 거니까 그렇게 알아라.”

[그 ···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으면 그 땅은 그 녀석들이 다 해먹었을 거라고요!!]

“흥!! 너도 그놈들과 똑같은 년이다!! 다시는 나한테 전화하지 마라!!”

어디 가서 말하기도 창피한 집안 일,

그동안 교류가 없던 친척들이 벌인 일이지만 김인호는 막장으로 치닫는 집안싸움을 창피하게 여겼다.

‘뭐, 우리 부모님은 착실한 분들이니까 상관없지만 ··· ’

그래도 창피한 건 창피한 일, 우리끼리 잘 살면 그만이라며 무시했다.

그런데 지금껏 교류 한 번 없던 녀석에게 말을 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왜 야구를 하는 거지?’

그래도 호기심은 끊이지 않았다.

스기토모 그룹은 일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공룡 기업

여기에 스기토모 그룹의 창시자, 고명출의 목숨을 보호하고 창업에 도움을 준 ‘스미다’ 그룹의 영향력까지 합치면 열도를 뒤흔드는 괴수 수준,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재력과 힘을 갖추고 있다.

이런 엄청난 집안의 장남이라면 후계자 수업을 받아야 할 텐데 야구천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그 녀석은 뭘 원하고 있는 걸까?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또 쓸데없는 생각한다.’

김인호는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냈다. 조만간 적으로 만날 입장, 혈연관계라는 건 잊고 결전의 날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 * *

[운명의 한일전, 오늘 저녁 6시]

시간은 흘러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지역예선을 통과한 한국과 일본은 각각 스리랑카와 인도네시아를 격파하며 본선 진출 발판을 마련, 아시아 야구의 자존심을 자처하는 두 나라의 대결은 한일 팬 간의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어느 쪽이 이기든 한국의 승리다.]

-> 당연, 왜구가 그런 파워를 내는 건 불가능해. 다카기는 한국 피를 이었기 때문에 그런 타격을 할 수 있는 거다.

-> 웃기는 소리, 프로만 봐도 기술 힘 모두 다 일본이 앞서는데?

-> 그건 프로 얘기고, 청소년 야구는 우리나라가 앞선다. 프로만 잘 갖춰져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텐데 ···

-> 이미 대등하게 싸우고 있어. 역대 국가대표 전적 모르냐?

-> 그거 언제 얘기냐? 최근 일본이 WBC에서 선전하는 동안 한국은 지역예선 탈락만 2번이다. 아시아 야구 맹주는 일본이 맞아.

[다카기는 일본인이다. 조센징들 정신승리 하고 있네]

-> 여기 한국말 잘 하는 쪽발이 있네.

-> 정확히 말하면 잡종이지. 역시 잡종이 튼튼하고 좋아

좋든 싫든 다카기는 양국 팬들의 관심을 동시에 받았다.

실력뿐만 아니라 집안 배경도 화젯거리, 하지만 본인은 외국인 용병 선언을 한 몸이라 국적 논란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괜히 부담주지 말자.’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지만, 아카마츠 감독은 평소처럼 훈련을 지도했다.

일본은 그동안 한국을 라이벌 취급하지 않았다. 경제 스포츠 문화, 모두 이쪽이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한국이 일본을 추월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일본의 장기불황, 그 사이 한국은 국제정세 흐름과 몇 가지 행운에 힘을 얻어 영향력을 확장해 왔다.

이런 추세는 일본 내에 위기감을 조성, 한국에 대한 두려움은 혐오로 극대화 됐다. 다카기에게 비난이 쏟아진 것도 그런 이유,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한국에 대한 증오심을 심어줘야 하나?

아카마츠 감독은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뭣보다 한국의 피를 이은 학생이 대표 팀 유니폼을 입고 있으니, 그런 발언은 자폭이나 마찬가지, 그저 오늘 밤이 일본의 승리로 조용히 지나가길 바랐다.

“본선으로 가는 마지막 고비다. 다들 전력을 다해주길 바란다.”

“예!!”

경기를 앞둔 일본 대표팀은 전의를 불태웠다.

오늘 경기를 잡아도 스리랑카라는 난적이 기다리고 있지만, 지금 분위기라면 질 것 같지가 않다. 역시 문제는 한국 대표팀, 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지키겠다는 각오를 가슴에 새겼다.

‘이 전장이라면 나도 즐길 수 있겠지.’

물론 다카기는 그런 의도와 거리를 뒀다.

잊을만하면 일본의 자존심에 칼을 꽂아온 한국, 강한 상대를 찾아 여기까지 온 소년은 전쟁광이 된 마음으로 경기를 즐길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오늘은 포지션 변경이 조금 있을 거다. 자세한 설명은 코치들이 해줄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라.”

“예 ~ ”

아카마츠 감독이 자리를 비우자 뒤에 남은 코치들이 질서 정리에 나섰다. 오늘은 기무라가 유격수로 출전, 다카기는 1루로 자리를 옮겼다.

너는 오늘 공격에만 집중하라는 감독의 뜻, 그리고 모든 경기를 유격수로 뛸 순 없지 않은가. 다카기는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그럼 나는?’

매 경기 1루를 지킨 후지타는 지명타자로 자리를 옮겼다.

1루에 강한 애착이 있는데 하필이면 저 자식에게 내줄 줄이야.

물론 본인이 프로 선수도 아니고, 감독이 따로 불러 사정을 설명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한 마디만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감독의 일방통보에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난 아직 남의 손에 놀아나는 장기 말인가.’

프로 선수는 구단에 소속됐지만 개인사업자나 다름없는 존재, 포지션 변경이나 출장 시간을 두고 감독과 의견을 주고받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여기 학생들은 모두 그럴만한 입장이 아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감독이 쓰고 버릴 수 있는 장기 말, 자존심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지만 후지타는 현실 앞에 굴복했다.

“야, 신경 쓸 거 없어. 별 것도 아니잖아.”

몇 몇 선수들이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그것도 물리쳤다.

별 것도 아니라면서 이런 말을 왜 하는 건가. 평소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발끈하는 녀석처럼 보였단 말인가? 아니면 다카기를 의식하는 게 눈에 보였을 지도, 어쨌든 이 이상 추한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 * *

‘뭐야, 생각보다 크잖아.’

‘190 정도 되나?’

경기를 앞두고 양 팀 선수들은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한국 선수들이 다카기를 보고 느낀 첫 인상은 ‘거구’, 영상자료를 봤을 땐 키만 크고 비쩍 마른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예상과 차이가 컸다.

다른 일본 선수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고, 여기에 소위 등빨이라는 것도 장난이 아니다.

자세가 낮을수록 포구가 안정적이라 유격수는 키가 작은 선수가 하는 게 보통, 그런데 이런 덩치로 넓은 수비범위를 커버하며 안정성까지 겸비하다니, 그만큼 운동신경이 예사롭지 않다는 뜻이다.

깊게 눌러 쓴 모자 아래에서 번뜩이는 눈빛도 예사롭지 않고, 경계해야 할 선수라는 걸 실감했다.

“가자!! 일본의 힘을 보여주자!!”

1회 초, 한국의 선공으로 경기의 막이 올랐다.

언제나 파이팅이 넘치는 기무라가 분위기를 끌어올렸지만, 마운드에 오른 이시다는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

‘내가 다카기의 덕을 봐서 대표 팀에 뽑혔다고?’

이시다는 올 여름 고시엔에서 2승 무패, 평균자책점 1.00을 기록하는 대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다카기가 자이니치라는 게 밝혀지자, 몇 몇 팬들은 다이이치 야구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 불똥은 이시다에게 튀었다.

‘아니라는 건 오늘 증명하면 돼.’

이시다는 전형적인 땅볼 유도 형 투수, 다카기의 수비력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그만한 활약을 할 수 있었겠냐는 게 몰상식한 팬들의 주장, 무시해도 그만인 헛소리지만 역시 신경이 쓰였다.

오늘은 그 논란을 지워내는 자리, 어느 때보다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나섰다.

“자, 1회 초 대한민국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박민수 선수, 이번 대회에서 타율 0.457, 홈런 없이 3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다카기 선수가 있다면 우리에겐 박민수 선수가 있죠. 개인적으로 리드오프로서의 능력은 박민수 선수가 더 낫다고 봅니다.”

박민수는 정확한 타격, 빠른 발, 정교한 선구안을 갖춘 유망주로 한국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렇다 해도 장타력까지 갖춘 다카기와 비교하는 건 무리, 이현진 해설위원도 자신이 무리수를 던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되돌리긴 싫었다.

일본에겐 가위바위보도 질 수 없는 일, 팬들도 이해할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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