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밤하늘에 점 하나를 찍어 봐 - (5)
‘이 울타리 안에서 나는 일본인이라고? 글쎄?’
한편, 경기를 앞둔 다카기는 더그아웃에서 감독의 충고를 곱씹었다.
처음부터 일본의 명예를 위해 출전한 청소년 대회가 아니다. 나는 세상의 넓음을 깨닫고, 그 과정에서 일본은 승을 챙기면 되는 거 아닌가.
서로 이득이 있기에 같이 가는 길, 가슴에 달린 일장기에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았다.
“자, U-18 지역예선 A조, 일본과 홍콩의 경기의 막이 오릅니다. 일본의 1회 초 공격, 다카기 하루요시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이번 대회 성적은 2타수 1안타, 어제 대타로 나와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건강하다면 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선수죠. 오늘 기대해보겠습니다.”
B조는 한국이 3연승을 달리며 일찌감치 순위가 결정됐지만, A조는 어제 일본이 패하면서 혼란에 휩싸였다.
■ 1위 스리랑카 : 2승(10득점 8실점)
■ 2위 일본 : 1승 1패(13득점 5실점)
■ 3위 대만 : 1승 1패(10득점 11실점)
■ 4위 홍콩 : 2패(6득점 14실점)
스리랑카가 오늘 대만을 잡는다면 A조 1위는 확정이다.
하지만 대만이 스리랑카를 잡고 일본이 홍콩을 잡으면, 2승 1패가 된 세 팀이 득실차를 따지게 된다.
마진이 8이나 되는 일본이 유리한 입장에 있는 건 사실,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점수를 내야 했다.
‘우리는 점수 파는 기계가 아니라고’
다음 라운드 진출은 물 건너갔지만, 홍콩 선수들은 이를 악물었다.
홍콩은 대만에게 10대 2로 졌지만 스리랑카를 상대로 5대 4,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그 스리랑카에게 5대 4로 패한 일본이 우릴 물로 볼 자격이 있나?
홍콩의 선발 투수 앤디 라우는 홍콩은 우리의 적수가 못 된다는 일본 여론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본때를 보여주마.’
듣자하니 다카기는 일본에서도 논란이 많은 녀석, 다 툭툭 건드려보는데 나라고 안 될 거 없지 않은가.
앤디 라우는 초구부터 몸 쪽 깊숙한 코스를 노렸다.
‘이건 뭐야?’
하지만 위협구도 제구가 돼야 던지는 법, 공이 바닥에 처박히자 다카기는 한껏 조였던 자세를 풀었다.
‘내가 너 같은 애하고 놀자고 여기 나온 줄 알아?’
세계의 넓음을 깨닫기 위해 왔는데 상대 투수가 이런 수준 낮은 공을 던지면 얼마나 맥이 빠지겠는가. 너 같은 놈을 상대할 이유는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까아앙 ~ !!
“때렸고!! 이 타구는 어디까지?!! 좌익수가 움직일 틈도 없이 담장을 넘어갑니다!! 일본의 선취점!! 그 주인공은 다카기 하루요시 선수입니다!!”
“다카기 선수의 힘을 느낄 수 있는 홈런이네요. 공이 거의 뜨지 않고 펜스를 넘겼습니다.”
대회 첫 장타가 나왔지만 다카기는 서둘러 베이스를 돌았다.
기억할 가치도 없는 선수에게 때린 홈런, 이딴 일로 잘난 척 하고 싶지 않았다.
“좋았어!!”
마중을 나온 아카마츠 감독은 양손을 내밀었다. 다카기는 무심한 표정으로 양손을 마주쳤고, 차례로 늘어선 손에 같은 반응을 보였다.
‘기분 나쁘게 ··· 씻어버려?’
벤치에 앉은 다카기는 생수병을 손에 쥐었다.
다른 건 괜찮은데, 어제 한바탕 부딪쳤던 후지타의 손은 참을 수 없는 불결함을 남겼다.
그냥 씻어버릴까 했지만 이런 행동이 쌈빳의 손을 피해버린 후지타와 다를 게 뭐가 있는가? 끓는 속은 냉수로 가라앉히고 빈병은 구겨버렸다.
‘저 자식은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근처에 있던 일본 선수들은 다카기의 눈치를 살폈다.
홈런 쳤으면 웃고 말 것이지 구석에서 음침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녀석, 생수병 따윈 누구나 구겨버릴 수 있지만 방금 전 무력시위를 한 놈이라 사소한 힘자랑도 괜히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까앙 ~ !
까아앙 ~ !!
그 사이, 일본 타자들은 앤디 라우를 마구 두들겼다.
한 타자도 못 잡고 일곱 타자 연속 출루를 허용하다니, 격차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홍콩의 감독은 예상보다 냉정한 현실에 씁쓸함을 드러냈다.
“벗어납니다! 밀어내기!! 스코어는 4대 0으로 벌어집니다!”
“이번 회에 밀어내기만 2개째네요. 뭐, 승리는 예상은 했지만 너무 맥이 빠지는 전개입니다.”
이제 타석에는 8번 타자 마사카즈, 어제 결정적인 실책으로 일본의 패배를 초래한 원흉이다.
아카마츠 감독의 대타 기용 실패 덕분에 몰매는 맞지 않았지만 욕을 먹은 건 사실, 팀은 4대 0으로 앞서고 있지만 만루 기회에서 명예회복에 나섰다.
까아앙 ~ !!
“높게 뻗어나가는 타구!! 좌익수가 펜스 앞에서 ··· 잡지 못합니다!! 그 사이 3루 주자!! 2루 주자는 홈으로!! 1루 주자는 어디까지?!!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옵니다!! 타자주자는 2루에 안착!! 이제 경기는 7대 0입니다!!”
“일방적이네요. 오늘 경기는 콜드 게임 기대해보겠습니다.”
홈을 밟은 주자들이 늘어나면서 일본 벤치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정도면 다음 라운드 진출은 확실하겠지, 아침까지만 해도 암울했던 분위기가 거짓말 같았다.
‘홈런만 치지 말자. 불결하니까.’
한편, 다카기는 타석에 설 준비에 나섰다.
홈런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후지타와 또 손을 마주하는 건 최악, 대기타석에서 가볍게 치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 사이 9번 타자 미야기는 2루 주자를 3루로 보내고 아웃, 타순이 일순 되면서 다카기는 천천히 타석으로 향했다.
“초구는 흘려보냅니다. 음 ··· 다카기 선수가 왜 이걸 놓쳤을까요?”
“글쎄요. 지금은 칠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운데로 들어왔지만 다카기는 입질도 주지 않았다.
지금 원하는 건 가볍게 밀어 칠 수 있는 바깥쪽, 노리는 공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까아앙 ~ !!
“높게!! 가는 타구!! 어디까지?!! 중견수는 그저 바라 볼 뿐입니다!!!! 다시 홈런!! 다카기 선수가 한 이닝에 홈런 2개를 쳐내고 있습니다!! 스코어 9대 0!! 오늘 경기는 일본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바깥쪽으로 잘 붙였는데 힘으로 밀어냈네요. 가운데 공은 흘려버리고 이건 홈런으로 ··· 정말 알 수가 없는 선수입니다.”
1루를 돌던 다카기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일본에겐 최상의 결과지만 본인에겐 최악, 일단 떨떠름한 감정을 숨기고 홈으로 향했다.
‘이번엔 내가 피하고 말지.’
한편, 후지타는 더그아웃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난 오늘 안타 하나 때렸는데 저 자식은 홈런만 2방이라니, 꼴 보기 싫어서 피해버렸다.
‘잠깐, 그렇다고 홈런 안 칠 거야?’
후지타는 뭔가 잘못 됐다는 걸 깨달았다.
저 자식과 손을 마주치는 게 싫다면 홈런은 포기할 건가? 다카기는 이미 홈런 2개를 적립, 이대로 경기가 끝나도 찝찝한 건 마찬가지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칠 뿐, 더그아웃으로 돌아와 다카기의 손을 격하게 내리쳤다.
‘지금 해보자는 거냐?’
한 성깔 하는 두 소년의 눈빛이 맞부딪쳤다. 어제 그 난리를 치렀던 일본 벤치는 묘한 분위기에 휩싸였지만, 문제아 둘은 제 갈 길을 갔다.
‘뭐 ··· 인연이란 이런 저런 형태가 있는 법이지.’
아카마츠 감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친하게 지내라고 타일렀지만 소귀에 경 읽기라는 건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서로를 자극하며 발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싸우다 보면 서로 미운 정은 들지 않을까?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조금이나마 희망을 걸었다.
‘날 너와 동급 취급하는 건 그만둬라. 기분 나쁘니까’
다카기는 자신을 라이벌 취급하는 후지타에게 가소롭다는 눈빛을 보냈다.
상대는 누가 봐도 일본보다 몇 수 아래, 그런데 홈런 하나 쳤다고 기세등등이라니, 고등학생이 유치원 학습지 만점 맞았다고 잘난 척 떠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1회에만 10실점을 한 앤디 라우는 쓸쓸히 퇴장, 이후에도 일본은 쉴 새 없이 홍콩 마운드를 두들겼다.
2회 말 공격이 끝났을 때 스코어는 14대 0, 3회 초 선두타자로 나선 다카기는 콜드게임에 쐐기를 박았다.
까아앙 ~ !!
“이번에도 멀리 가는 타구!!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곳으로!! 날아갑니다!!!! 세 번의 스윙!! 3연 타석 홈런!! 자신이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결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세 번의 스윙 세 번의 홈런 그리고 세 번의 침묵,
흠집 하나 없는 활약을 펼치고 있지만 다카기는 단 한 번도 미소를 보이지 않았다. 아카마츠 감독이 환한 미소로 반겼지만 반응은 여전, 동료들의 환대에 둘러싸여도 반응은 여전했다.
‘깡생수도 세 병째’
방송카메라는 생수병을 입에 문 다카기를 비췄다.
물을 마시는 건 그러려니 하겠는데, 꼭 저렇게 전투적으로 마셔야 할까. 생수병을 짓이기는 행동에도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이 자식 자이니치잖아. 일본에 도움 되기 싫은데 홈런 나와서 불쾌한 거 아냐?]
-> 스파이 노릇 해야 되는데 홈런 나오니까 자기도 짜증나겠지. 나도 그 말에 찬성
-> 헛소리 같은데 다 맞는 것처럼 들린다.
-> 잡아둬야 한다. 이 자식 불만 품고 한국으로 귀화하면 언젠 간 큰 적이 될 거다.
-> 나도 그 말에 찬성, 적당히 일본인 대우해주고 부려먹으면 됨
[헛소리 그만 지껄여라. 다카기는 처음부터 일본인이었다.]
-> 당연하지. 일부 쓰레기들 제외하면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 상대는 홍콩이다. 홈런 10개 쳐도 의미 없음
사정없는 무력시위에 일본 여론은 발칵 뒤집혔다.
고시엔 때도 장타력은 충분히 보여줬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홈런보다 2루타가 더 많았고, 8할이 넘는 타율에 관심이 더 집중됐던 게 사실, 중장거리 타자라는 여론의 인식을 깨버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다카기는 홈런을 노리고 스윙을 한 게 아니다.
정확하게 쳐서 강한 타구를 만들어 내는 게 자신의 스타일, 통계만 봐도 타구 속도와 타율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요즘 공을 띄우는데 열중이라고 들었는데, 그게 정말 효과적인 타격일까. 맞지도 않은 옷에 무리하게 몸을 끼워 넣는 건 아닌지, 다카기는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을 추구했다.
‘나도 빨리 따라가야 하는데’
한편, 라이벌의 날갯짓이 거세질수록 후지타의 타격은 성급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힘은 저 자식에게 안 밀린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부딪쳐보니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하늘을 향해 쏴라.’
다카기는 후지타의 스윙에 나름대로 평가를 내렸다.
철없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오줌 멀리 보내기 내기를 한 기억이 있다.
멀리 쏘는 것도 적당한 각도가 중요, 하지만 어느 친구는 각도를 너무 높이다 오줌이 옷에 튀면서 날벼락을 맞았다.
지금 후지타가 딱 그 꼴, 아니나 다를까 높게 솟은 타구는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힘만 있다면 정확하게 때려도 충분해. 난 앞만 보고 쏜다.’
그에 비해 다카기는 타구를 앞으로 보낸다는 느낌으로 스윙을 했다.
상황에 따른 스윙이 가능한 건 그동안 기술을 갈고 닦은 덕분이겠지만, 이런 마음가짐도 큰 보탬이 됐다.
까앙 ~ !!
“이번에는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스코어는 22대 0으로 벌어집니다. 다카기 선수는 오늘 3홈런 포함 4안타!! 그동안의 아쉬움을 오늘 만회합니다!!”
“교체되는 건가요? 지금 사인이 나온 것 같은데요.”
5회 말, 아카마츠 감독은 다카기를 벤치로 불러들였다.
콜드 게임은 거의 확실, 경기를 마무리 한 다카기는 덤덤한 얼굴로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물론 후지타에겐 특별한 감정을 표출, 우리의 대립은 여기서 그치지 않을 거란 메시지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