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밤하늘에 점 하나를 찍어 봐 - (4)
‘내가 못마땅하겠지. 하지만 당신들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
다카기는 자신을 둘러싼 묘한 시선 따윈 무시했다.
지금 저들이 상대해야 할 적이 나인가. 어린놈에게 그런 소릴 들었다면 치욕으로 받아들이고 의지를 불태우는 게 정상, 계속 목소리를 높이며 선수단의 투지를 자극했다.
‘별난 녀석이군.’
스리랑카의 김재용 감독은 그런 다카기를 유심히 바라봤다.
일본 여론의 평가도 좋지 못한데 저렇게 씩씩할 수 있다니, 뭣보다 다카기의 몸짓엔 절대적인 자신감과 여유가 있다.
‘스포츠는 즐기는 놈이 제일 무섭지.’
전쟁에선 목숨을 버리고 달려드는 적이 무섭지만, 스포츠에선 즐기는 놈이 제일 무섭다.
1할 치는 타자가 어떻게 야구를 즐길 수 있는가? 즐길 기회도 없이 라인업에서 제외되기 마련, 실력 없이 저런 여유를 가질 순 없다.
지금 일본에서 가장 무서운 선수는 누구인가? 김재용 감독은 망설임 없이 다카기를 지목했다.
“타순이 돌면 위험하다. 그 전에 끝내라.”
“알겠습니다.”
이어지는 일본의 8회 말 공격,
김재용 감독의 지시대로 쌈빳은 공격적인 투구를 펼쳤다.
체인지업으로 카운트를 잡고 뺏는 모습은 여전, 스라링카에 이 정도 제구를 보여주는 학생이 있었을 줄이야, 우리가 아시아 최강이라는 자만에 빠져있던 일본 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체격 조건이 좋은 것도 아니고 빠른 볼도 큰 장점이 없는데 타자들은 속수무책, 저런 공을 공략한 다카기가 더욱 돋보이는 건 당연했다.
[다카기까지만 가라. 제발]
-> 그 전에 끝날 것 같은데
[대만을 9대 0으로 이겼는데 스리랑카에게 진다고? 이건 말도 안 돼!!]
-> 이런 놈들에게 일본 야구의 미래를 맡긴다는 게 절망적이다.
-> 그냥 외국인 선수로 대체하자. 춍도 대표 팀이 됐는데 뭐 어때
-> 힘이 없으니 이젠 오랑캐로 오랑캐를 상대하는 꼴이네.
8회 말 반격이 삼자 범퇴로 끝나면서 팬들의 염려는 현실이 됐다.
이제 남은 공격 기회는 9회 말 뿐, 벼랑 끝에 몰린 아카마츠 감독은 타자들에게 정확한 타격과 인내심을 요구했다.
“스트라이크!!”
얄궂게도 그 점을 파고드는 투구, 쌈빳은 이번엔 빠른 볼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더니 체인지업으로 헛스윙을 이끌어냈다. 타이밍을 전혀 못 잡는 타자들, 경기를 지켜보던 아카마츠 감독도 오늘 경기는 어렵다는 걸 직감했다.
결국 경기는 7번 타자 아오타가 유격수 땅볼로 물러나면서 종료.
기적의 승리를 이끌어낸 스리랑카 선수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는 동안, 일본 대표 팀은 씁쓸한 얼굴로 그라운드에 발을 들였다.
경기가 끝나면 서로 손을 마주치는 게 예의, 하지만 자존심이 상한 후지타 겐고로는 쌈빳의 손을 지나쳤다.
진 건 둘째 치고 매너마저 엉망,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카기는 쓴 웃음을 지었다.
“You're pretty good? but I wouldn't think it to be as easy next time.”
= 꽤 하는데? 하지만 다음엔 이렇게 쉽지 않을 거야.
못난 놈을 대신해 대신 인사를 건넸다.
영어 잘하는 한국인 감독이 있으니 놀랄 것도 없지만, 의외의 칭찬을 받은 쌈빳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다카기와 손을 마주쳤다.
‘내 말 알아들었나?’
다카기는 자신의 영어발음이 신경 쓰였다.
얼마 전 미국에 살고 있는 사촌동생에게 영어발음이 형편없다는 지적을 당했는데, 제대로 알아들은 건가. 하지만 뒤에서 몰려오는 동료들 때문에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 했다.
“감독님, 왜 그때 다카기 선수를 대타로 쓰지 않은 겁니까?”
경기가 끝난 후, 아카마츠 감독은 취재진에 둘러싸였다.
6회 말, 2사 주자 2루에서 왜 다카기를 대타로 쓰지 않은 걸까? 7회 말에 투입했지만, 반찬 없는 밥상 앞에서 일본은 안타 하나로 만족했다.
오늘 경기의 패인은 아카마츠 감독의 우유부단함 때문, 기자들의 목소리엔 패배를 질책하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이것들이 진짜 ··· ’
아카마츠 감독은 순간 욱했다.
오랑캐를 대표 팀에 뽑느니 마느니 하면서 난리를 친 게 누구인가.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안 썼냐고? 여론의 뻔뻔한 태세전환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대타 카드를 망설인 건 누구의 책임인가.
감정을 가라앉히고 질책을 받아들였다.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카기 선수가 어제 투구에 머리를 맞았기 때문에, 벤치에 앉으라고 지시한 건 제 판단입니다. 다카기 선수를 경기에 투입하지 않았다면 저도 여러분들 앞에서 할 말이 있겠지만, 투입하고도 졌으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남은 경기에 총력을 다해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선수단을 수습해 호텔로 돌아온 아카마츠 감독은 허공에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것도 받아들이는 게 감독이지만 아직 초보라 어려운 게 사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대책을 강구했다.
‘한 경기만 더 지면 끝이다.’
다음 경기 상대는 홍콩, 객관적인 전력을 따져보면 절대 질 수가 없다.
하지만 스리랑카전은 질 줄 알고 졌는가, 뼈아픈 패배를 당한 다음이라 자신감은 땅바닥에 처박혔다.
* * *
그날 저녁, 일본 선수단은 무거운 분위기에서 식사를 했다.
패배도 패배지만, 몇몇 학생들은 태평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다카기를 언짢은 눈으로 노려봤다.
“역시 외국인이라 영어도 잘 하는 모양이네.”
이때 후지타가 선공을 날리면서 묘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누가 봐도 들으라고 한 말, 패배를 당하고 상대 선수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하다니, 너는 치욕이라는 걸 모르냐는 말투로 시비를 걸었다.
“괜한 사람한테 화풀이하기 전에 매너나 잘 챙기시죠?”
“뭐?”
“치졸하게 상대 선수가 내미는 손이나 외면하고, 그게 일본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입니까? 내일 기사가 어떻게 날지 볼만하겠네요.”
“야!!”
폭발한 후지타가 목소리를 높이자 다카기도 지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쪽에서 말없이 식사를 하던 코치들 입장에선 날벼락,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이 자식이 계속 속을 긁잖아요!!”
본인에게 유리한 말만 하다니, 다카기는 어디 또 지껄여 보라며 팔짱을 낀 채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이유야 어쨌든 서로 사과해라. 분위기도 안 좋은데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이 자식은 일본인이 아니라고요!! 왜 대표 팀에 뽑힌 건지 이해가 안 돼요!! 그냥 네 나라로 꺼져버려!!”
코치들이 화해를 주선했지만 후지타는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최악의 타이밍에 등장한 아카마츠 감독, 방에서 겨우 마음을 다스렸는데 이건 또 무슨 소란인가?
일그러진 감독의 얼굴을 확인한 후지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어?”
“그 ··· 그게 ··· ”
“누가 일본인이 아니야?!! 어?!!”
감독의 불호령에 후지타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언론도 그 지경인데, 팀 내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녀석들이 있었다니, 솔직히 실망했다.
“감독님, 제가 대들어서 이렇게 된 겁니다. 죄송합니다.”
이때, 다카기가 대뜸 감독에게 고개를 숙였다.
후지타가 뭐라고 해도 미동도 안 하던 녀석이 이 타이밍에? 설마 이런 시나리오도 다 예상했던 걸까? 어쨌든 주위 사람들은 곤경에 처한 쪽이 후지타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자네 둘 잠깐 나 좀 보지.”
식사를 하러 왔다가 기분이 잡친 아카마츠 감독은 문제아 둘을 자기 방으로 소환, 그리고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궁했다.
“그걸 제 입으로 말해도 되겠습니까?
“ ··· 그게 무슨 소린가?”
“제가 무슨 말해도 변명이 될 뿐입니다. 그때 상황은 감독님이 코치님들께 물어보는 게 확실할 겁니다.”
다카기의 답에 아카마츠 감독은 잠시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라니, 그만큼 난 잘못한 게 없다는 확신이 있다는 건가? 아니, 그것보다 감독이 선수를 믿지 못하면 누굴 믿는단 말인가. 어떤 말을 해도 믿을 테니, 사실대로 말해보라고 다독였다.
“밥을 먹고 있는데, 후지타 선배가 누가 외국인 아니랄까봐 영어도 잘한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래서 잠시 욱했습니다.”
“ ··· 그게 정말인가?”
감독의 질책에 후지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짓이 섞였다면 뭐라고 변명이라도 하겠는데, 사실이라 아무 것도 방패막이로 내세우질 못했다.
“왜 말을 못하나? 사실이 아니라면 뭔가 변명이라도 해 보게”
감독의 질책에 후지타는 입을 다물었다.
사방에 널린 게 눈이고 다들 입이 달렸다. 출입기자들이 이 정보를 캐낸다면 대표 팀은 외우내환에 시달리다 자멸하겠지. 아카마츠 감독은 소란을 일으킨 두 선수를 모두 꾸짖었다.
“세계무대는 생각만큼 만만하지가 않아. 협력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데, 같은 팀 선수가 서로 싸운다면 그 결과는 당연한 거 아닌가?”
감독의 차분한 목소리에 후지타의 자존심은 상처를 입었다.
따지고 보면 오늘 역전 찬스에서 범타로 물러난 게 누구인가. 경기가 안 풀리다보니 괜한 곳에 화풀이를 한 게 본심,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자신은 속이지 못했다.
“그리고 다카기 군, 자네에게도 할 말이 있네.”
“예, 말씀하십시오.”
“자네가 지금 심기가 불편한 건 이해해. 여론에서 말이 많으니 뭔가 보여주고 싶은 생각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행동은 적을 많이 만들 뿐이야. 여론이 뭐라고 해도, 자네는 일본을 대표하는 선수야. 그것만은 명심해줬으면 좋겠네.”
“ ··· 알겠습니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그럭저럭 수습되는 분위기, 아카마츠 감독의 창날은 후지타를 향했다.
“자네도 뭐 할 말 없나?”
“예?”
“후배가 고개를 숙였어. 그에 대한 성의는 보여야 할 거 아닌가?”
후지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사과를 표했다.
일본인이 아니라고 한 것도, 네 나라도 꺼지라는 말도 다 취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둔 다카기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야, 어땠냐?”
“뭐가요?”
마이키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다카기를 붙잡았다.
그 난리를 치르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다니, 정말 괜찮은 건지 아니면 쓰린 속을 애써 다스리는 건지 궁금했다.
“그냥 서로 사과하고 끝났어요. 그것보다 뭐 먹을 거 없어요?”
다카기는 이 와중에 허기를 호소했다. 밥을 먹다가 싸움이 났으니 당연, 마이키는 넌 정말 알다가도 모를 놈이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야, 그런데 너 영어는 어디서 배운 거냐?”
“학교에서 배웠죠. 당연한 거 아닌가요?”
계속 되는 질문,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데 그렇게 유창한 발음을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솔직히 답하기 귀찮았지만 대인관계를 위해 다카기는 성심성의껏 답을 했다.
“미국에 사촌이 있거든요. 걔들하고 대화하면서 연습 좀 했죠.”
“오 ~ 혹시 나중에 해외진출 하려고 그러냐?”
“전 영어 잘 하는 외국인이잖아요. 기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야죠.”
다카기의 반응에 마이키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녀석이 할 말인가. 겉으론 씩씩한 척 하지만 외국인 취급당한 게 아직도 분이 안 풀린 모양, 한 번 삐치면 오래가는 유형이라 더는 건드리지 않았다.
* * *
[후지타, 쌈빳의 손 그냥 지나쳐]
후지타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여론은 무기력하게 패한 대표 팀을 질책했고, 특히 쌈빳의 손을 지나친 후지타는 맹폭격을 받았다.
그 경기를 지켜보는 눈이 몇 명인데, 예절과 매너를 중시하는 일본 사회에서 환영받기 어려운 행동 아닌가. 결국 후지타는 대표 팀 출입기자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사죄를 표했지만, 자존심과 체면은 완전히 박살났다.
“첫째도 둘째도 입 조심하게”
“알겠습니다.”
아카마츠 감독의 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카기와 후지타의 충돌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지만, 이대로 묻힐 거란 보장은 없다.
성적이 따라와 준다면 언제 그랬냐며 서로 웃고 떠들겠지만 그 반대라면? 코치와 선수들에게 입 조심하라는 주의를 줬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이겨야 한다. 그 수밖에 없어’
논란은 더 큰 논란이나 희소식으로 덮는 법. 기왕이면 희소식이 좋겠지 않겠나, 홍콩전 승리와 대회 우승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