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47화 (47/361)

47화. 밤하늘에 점 하나를 찍어 봐 - (3)

‘마음껏 즐겨 봐라.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는 건 그것뿐이다.’

선취점을 내줬지만 스리랑카를 이끄는 김재용 감독의 표정은 덤덤했다.

스리랑카가 야구에 큰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곳 학생들은 한국의 아이들에 비해 체격이나 운동 능력이 월등하지도 않다.

큰 키를 활용하는 투구나 파워 스윙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 기본기는 가르쳤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그건 너무 이상적이야. 그게 우리나라 현실에서 가능한 일인가?”

“여기가 제 뜻을 펼칠 곳이 못 된다면 다른 곳으로 갈 수 밖에요.”

한국에서 감독제의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김재용 감독은 고심 끝에 스리랑카 행을 택했다.

한국의 스포츠는 철저한 엘리트 중심, 일반학생은 평생 동안 야구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스포츠 강국의 토대를 이루는 게 엘리트 교육인가.

이미 많은 스포츠 강국은 생활체육을 스포츠의 기반으로 두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도 상황은 마찬가지, 일본협회에 등록된 고교야구 클럽은 약 4천 여 개에 이른다.

전문적으로 야구를 하는 곳은 얼마 없지만, 부활동과 스포츠를 학창 시절의 일부로 대한다는 것부터 출발점이 다르다.

김재용 감독도 일본의 부활동 문화를 한국야구에 접해보고자 했지만, 운동은 공부와 별개라는 인식이 강한 한국에서 부모들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했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뭣보다 즐겁지가 않아.”

고민 끝에 결심한 스리랑카 행, 여건이 좋지 않고 애로사항도 많지만 김재용 감독은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까앙 ~ !

감독의 그런 마음을 이해하기라도 한 걸까.

스리랑카는 2회 초에 첫 득점을 냈다. 일본은 바로 추격을 뿌리쳤지만 5회 초에 다시 한 점을 내주며 불안한 리드를 이어갔다(4대 2).

‘이거 생각보다 강한데’

아카마츠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저기서 얻어터지던 스리랑카 야구가 여기까지 자리가 잡혔을 줄이야, 이성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 팀만 경계하고 있었는데, 김재용 감독이 4년 동안 가다듬은 스리랑카의 전력도 만만치 않았다.

‘한국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나라야.’

아카마츠 감독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역시 일본의 발목을 잡는 나라는 한국이라는 건가? 벤치에도 신경 쓰이는 녀석이 한 명 있다. 다카기는 일본의 구세주가 될 것인가 아니면 폭탄이 될 것인가. 자기가 뽑은 선수지만 뭔가 찝찝했다.

까앙 ~ !

“이 타구는 내야를 빠져 나갑니다! 2루 주자는 홈으로! 들어옵니다! 스코어 4대 3!! 턱밑까지 추격을 허용하는 일본입니다.”

“글쎄요. 대만을 9대 0으로 꺾었는데 ··· 이런 흐름은 좀 당황스럽네요.”

경기가 묘하게 흘러가자, 아카마츠 감독의 생각은 복잡해졌다.

엄격한 투구 제한 규정이 걸린 청소년 대회, 연투를 하면 투구 수에 관계없이 하루를 쉬고, 80개 이상을 던지면 사흘을 쉬어야 한다.

일본 대표 팀에서 가장 뛰어난 선발투수라면 가나가와의 마이키 요시토모, 그리고 다이이치의 이시다 토모카츠를 꼽을 수 있다.

마이키는 대만전에 이미 활용했고 한국전을 대비해 이시다를 아껴야 하는 상황, 스라링카 따위에게 이시다를 보낼 순 없지 않은가. 하지만 경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면서 내가 뭔가 착각을 한 게 아닌가라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필요해. 도망칠 수 있는 한 방이 필요하다고’

초반에 기세를 떨치던 일본 타선은 돌연 침묵했다.

6회 말, 1사 주자 2루에서 키타노 요스케가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나자 아카마츠 감독은 대타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대타로 나가나?]

의도된 연출이었을까.

방송카메라 한 대가 벤치에 앉아 있는 다카기를 비췄다.

팔짱에 다리까지 꼬고 있는 다소 건방진 자세, 하지만 그 실력을 알고 있는 팬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우라를 느꼈다.

[도대체 왜 안 쓰는 거야?]

->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라. 여기서 아웃 되길 바라는 거냐?

-> 말은 똑바로 해야지, 다카기 만큼 확실한 타자가 또 어디 있냐?

-> 네, 자이니치 인증

[이럴 거면 뽑질 말지. 3회부터 보고 있는데 답답해 죽겠어]

듣자하니 머리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데 왜 저기에 처박아두는 건가. 다카기를 일본 대표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침묵을 지켰지만, 그 반대편에 선 팬들은 어서 대타로 보내라고 아우성을 쳤다.

깡 ~ !

“아 ~ 2루수 정면, 6회 말 일본의 공격은 득점 없이 종료됩니다. 이어지는 스리랑카의 7회 초 공격, 여기는 후쿠오카 다이마루치 구장입니다.”

“아니, 왜 대타를 안 쓴 거야?”

중계가 광고로 넘어간 걸 확인한 해설위원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카기는 여론의 욕을 먹어가며 뽑은 선수 아닌가. 아카마츠 감독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It's fine!, We can turn this around!”

= 좋아! 이번에 경기 뒤집자고!!

초조해 하는 일본과 달리, 스리랑카 진영은 여유가 있었다.

지난 4년 동안 성장한 건 학생들뿐일까, 김재용 감독은 통역 없이도 학생들과 원활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스리랑카는 타밀어를 모국어로 쓰지만, 영국의 오랜 지배를 받은 만큼 영어를 제 2언어로 쓰고 있다. 과장이 아니라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 대화가 안 되는 지도자가 어떻게 학생들을 지도하겠는가?

김재용 감독이 영어에 능숙해지는 만큼, 학생들의 실력도 향상됐다.

‘내 생각이 너무 이상적이라고? 틀린 건 당신들이야.’

한국 야구관계자들에게 꿈속을 허우적거리던 인간이라는 조롱을 당했지만, 김재용 감독은 이제 당당히 어깨를 펼 수 있게 됐다.

스리랑카가 일본을 상대로 이 정도 경기를 펼칠 줄 누가 예상했겠나. 야구 불모지에서 작은 꽃 한 송이를 피워내면서 의문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까앙 ~ !!

7회 초, 분위기를 탄 스리랑카는 일본 진영에 맹공을 퍼부었다.

선두타자 ‘라히루’가 좌중간을 가르는 2루타로 포문을 열었고, 후속 타자 ‘다르샤커’가 느린 땅볼을 굴려주면서 주자는 3루까지 진루, 이 과정에서 송구 미스가 나오면서 라히루는 홈까지 파고들었다(4대 4 동점).

스리랑카가 일본을 이렇게 몰아세우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국만 신경 쓰고 있던 일본 중계석은 침묵에 휩싸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제대로 하라고!!”

다이마루치 구장은 일본 팬들의 원성으로 뒤흔들렸다.

고시엔의 열기가 뜨거웠던 만큼, 일본야구 협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만큼, 대표 팀을 지켜보는 눈은 한 두 개가 아니다.

경기 흐름이 팽팽할수록 심리적 압박을 받는 건 일본, 아카마츠 감독은 결단을 내렸다.

“다카기, 나갈 준비해라.”

“예”

상대적으로 공격력이 떨어지는 기무라가 빠지고 다카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드디어 끝판왕의 등장이라는 건가? 하지만 김재용 감독은 위축되지 않았다.

‘내가 옳았다는 걸 증명할 기회다.’

다이이치 야구부는 고시엔 우승을 차지하기 전까지 C클래스 야구부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어쨌든 훈련에 전문적인 웨이트 트레이닝까지 접목하는 엘리트 야구를 추구하고 있다.

그 중심에 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다카기, 여기서 저 녀석을 꺾는다면 내 생각이 옳았다는 게 증명되겠지 않겠나. 제자들에게 피하지 말라는 주문을 넣었다.

“자, 이제 일본의 7회 말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칼라너 선수가 내려가고 쌈빳 선수가 올라오네요.”

“스리랑카에서 구속이 가장 빠른 선수죠. 최고 139km를 던지는데, 이 정도는 우리 선수들이 충분히 공략할 수 있습니다.”

해설위원의 말을 비웃듯, 쌈빳은 일본 타자들을 손쉽게 처리했다.

공격의 흐름이 매끄럽지 않으니 타자들이 한 방을 노리는 건 당연, 쌈빳은 김재용 감독에게 전수받은 체인지업으로 장타를 억제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다카기는 동료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경기 후반까지 벤치에 앉아 있던 나도 쌈빳의 장단점을 알고 있는데, 저게 스타팅 멤버로 나선 선수들이 할 짓인가. 나보다 한 발 앞서나간 녀석들이라고 평가했건만, 하루아침 사이에 생각이 달라졌다.

‘조금 밀리고 있다고 성급해서는 ··· 다들 비켜, 내가 한다.’

2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맞이하는 첫 타석,

감독은 피하지 말라는 주문을 넣었지만, 쌈빳은 다카기가 범상치 않은 상대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정면 승부는 위험, 철저한 바깥 쪽 승부를 택했다.

까앙 ~ !

“잡아당긴 타구가 ··· 좌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4회 말 이후, 처음으로 선두타자가 출루하는 일본입니다!!”

“지금은 좀 무리한 타격이었는데, 어쨌든 안타가 된 건 다행이네요.”

해설위원은 진짜 중요한 걸 보지 못했다.

일부 타자들은 등이 투수 쪽으로 향한다.

스윙을 길게 끌고 나오면서 변화무쌍한 공에 대응하는 자세, 하지만 이런 타격은 배트 스피드가 받쳐주질 않으면 빠른 공에 대처하기 힘들다.

‘이 정도면 가능하겠어.’

하지만 다카기는 이 자세로 샴빳의 공을 공략했다.

샴빳의 평균구속은 130km 내외, 타이밍이 늦더라도 힘으로 밀어내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멋지게 성공, 하지만 이런 속뜻을 눈치 챈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저 자식은 진짜 천재다.’

아카마츠 감독이 그 중 한 명,

더그아웃에서 타자의 정면은 볼 수 없지만 옆모습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평소보다 길게 끌고 나온 스윙, 상황에 따라 스윙을 바꿔주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야구를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남들이 어렵게 하는 걸 쉽게 하는 것 그게 천재 아니겠나, 다카기는 그 조건에 딱 맞아떨어졌다.

‘이거 어렵겠는데’

감탄도 잠시, 아카마츠 감독은 후속타자 후지타 겐고로의 타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히팅 포인트를 앞에 두고 있어도, 앞발을 내딛는 타이밍을 조절하면 변화구는 공략할 수 있다.

하지만 후지타는 그런 임기응변이 부족, 빠른 공은 제법 치는 것 같은데, 수준급의 체인지업을 보유한 쌈빳 앞에선 힘을 쓰지 못했다.

“스윙!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또 바깥쪽으로 던질 확률이 높거든요. 후지타 선수가 말려들면 안 될 텐데요.”

“그런데 여기서 돌아 나옵니다 ··· 삼진, 일본의 7회 말 공격도 성과 없이 마무리 됩니다.”

변화구가 약점이라는 걸 간파 당했으니 빠른 볼을 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거기다 쌈빳은 체인지업으로 카운트를 잡을 수 있는 선수, 후지타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아 ~ 이건 또 뭔가요!!”

일본을 덮친 악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8회 초 스리랑카의 반격, 우익수 마사카즈는 평범한 플라이의 낙구지점을 잃어버렸다.

중계석이 탄식에 잠긴 사이, 타자 주자 아쇼커는 2루까지 진루, 후속타자들의 진루타와 적시타가 이어지며 스리랑카는 기어이 경기를 뒤집었다(스코어 5대 4).

‘관심도 받을 줄 아는 놈이 받는 거지.’

다카기는 2루 근처에서 팀 분위기를 살폈다.

본토에서 벌어지는 경기, 욕을 먹든 환호를 받든 다 감수해야 할 일이다. 관중의 관심이 부담스럽다면 여기에 설 자격이 있을까.

다들 얼어붙어서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데, 이런 정신 상태로 우승을 논한다는 게 한심스러웠다.

‘내 목표는 세계무대야. 여기서 질 순 없다고’

3경기를 모두 잡아야 다음 라운드 진출을 확정지을 수 있다.

그게 안 되면 득실점을 따지는데 머리 쓰는 일은 공부면 충분, 다카기는 그런 복잡한 계산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우승을 노리는 일본의 실력이야?!! 고시엔의 투지는 다 어디 갔어?!! 다들 정신 차려!!”

역전 당했다고 어쩔 줄 모르는 동료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다카기는 대표 팀의 유일한 1학년, 애송이에게 상급생이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나.

몇 몇은 언짢은 감정을 품었지만, 배려 없는 채찍질에 정신을 차린 녀석들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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