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46화 (46/361)

46화. 밤하늘에 점 하나를 찍어 봐 - (2)

까앙 ~ !!

선두타자가 아웃 됐지만 후속타자 기무라, 후지타의 연타가 터지면서 일본 대표 팀은 기분 좋은 선취점을 올렸다.

다카기의 빛에 가렸지만 후지타 겐고로(3학년 : 카와마츠 고교)는 고시엔에서 타율 0.424 홈런 3방을 터뜨리며 베스트 나인에 뽑힌 유망주,

다카기의 피에 불순물이 섞였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팬들은 후지타의 활약에 기대를 걸었다.

‘마지막에 웃는 건 나다.’

후지타도 다카기를 은근 의식했다. 자이니치니 불순물이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마지막 승자가 되지 못했다는 게 원통할 뿐, 고시엔에서 풀지 못한 아쉬움을 여기서 만회하겠다는 각오를 세웠다.

‘신뢰란 도장이 찍히지 않은 계약서다.’

한편, 다카기는 벤치에 앉아 할아버지의 조언을 곱씹었다.

사람들은 인간관계는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그게 세상에서 통용되는 이론일까?

신뢰란 언제든지 의심으로 바뀔 수 있는 것, 아카마츠 감독은 이번 대회에서 다카기를 주전 유격수로 기용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다카기는 그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국제대회처럼 단기전은 선수를 믿고 기다려주기 어렵다. 내가 성적을 못 내면 감독이 계속 지켜봐줄까? 고시엔에서 거둔 성적은 신뢰라는 계약서에 도장이 될 수 없는 법, 지나간 영광에 매달리는 건 어리석었다.

‘두고 봐라. 그 도장은 내 손으로 찍는다.’

이어지는 일본의 3회 초 공격,

투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다카기는 2번 째 타석을 맞이했다. 투 아웃이라 연속안타를 기대하긴 어려운 상황, 아카마츠 감독은 여기서 다카기가 특유의 장타력을 발휘해주길 기대했다.

‘엇?!’

여기서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다.

상대투수 이지엔리의 139km 속구가 타자의 헬멧을 강타한 것, 깜짝 놀란 아카마츠 감독이 보호 펜스 밖으로 나갔지만, 다카기는 고개를 좌우로 몇 번 움직이며 1루로 향했다.

‘이대로 놔두는 건 좋지 않은데’

달려 나온 코치는 교체를 권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헤드 샷, 거기다 이 녀석의 뒷배경이 조금 큰가? 놔뒀다가 문제가 생기면 뒤처리에 애를 먹을 게 분명했다.

“다카기 선수가 여기서 교체되는군요. 천천히 벤치로 향하고 있습니다.”

“첫 국가대항전인데 ··· 고시엔에 비하면 빛을 발휘하지 못했네요.”

결국 다카기는 교체 지시를 받아들였다.

야구 인생이 오늘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도장을 찍는 건 재정비를 마친 후에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날 일본은 대만을 9대 1로 격파, 일부 팬들은 다카기 무용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부자가 사치품을 사는 건 이해가 돼. 하지만 길바닥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울 필요는 없지. 대표 팀에 정말 다카기가 필요했을까?]

[오늘로 다들 깨달았을 거다. 일본은 그 자체로 위대해, 춍의 도움 따윈 필요 없다고]

[부상당했으니 그냥 병원에 있어라. 일본엔 널 위한 자리 없다]

-> 부상이 아니라 죽었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도를 넘은 비난에 몇 몇 팬은 자중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효과는 없었다.

누군가를 혐오하고 깎아내려야 직성이 풀릴 만큼 이 사회는 오염된 건가? 평소 다카기가 자주 다니던 식당의 단골손님, 호리오 씨는 이 나라는 틀렸다며 고개를 저었다.

“고등어 새끼만도 못한 놈들 ··· 이 나라엔 어떻게 피라미들만 가득한 거야? 아니지, 피라미라는 말도 아까워!!”

세상이 어느 시댄데 핏줄을 운운하는가.

지금은 능력과 인품으로 평가를 받는 시대, 호리오 씨는 일본은 예전부터 변한 게 없다며 한탄했다.

“내가 학교에서 애들 가르칠 때 교과서에 뭐라고 적혀있었는지 아나? 홋카이도엔 사람이 안 살고 아이누와 동물만 산다고 했지. 애들이 아이누도 동물이냐고 물어보는데 내가 할 말이 없었어!!”

아이누는 엄연한 인종이다.

그런데 아이들한테 이런 걸 교과서로 가르쳐야 한다니, 그날만큼은 선생이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꼈다.

쿠릴 열도의 아이누가 왜 러시아를 지지하는가? 러시아 정부는 아이누를 인종으로 인정하고 보호하지만, 일본은 수 백 년에 걸쳐 그들을 탄압하고 멸시해 왔다.

뿌린 대로 거둔 결과, 오키나와도 마찬가지, 자이니치들에 대한 차별은 말할 것도 없다.

“다들 멍청이들뿐이야. 지금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혐오와 차별은 우릴 고립시킬 뿐이라고, 왜 그걸 모르는 거야?”

이런 나라에 정말 밝은 미래가 있을까? 호리오 씨는 주인장 앞에서 한탄을 쏟아냈다.

“술이나 한 병 더 드세요. 그런 말 한다고 세상이 달라집니까?”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네. 그 어린 친구가 무슨 잘못이 있나? 그 친구를 먼저 밀어낸 건 이 나라야. 흥!! 나중에 따귀 맞아도 할 말 없지.”

이때 미운오리 새끼 한 마리가 가게 안에 들어섰다.

이 식당 주인장의 아들, 하지만 아버지는 침묵을 지켰다. 요즘은 그래도 공부에 열중하는 녀석, 결과를 떠나서 노력만은 인정해 줬다.

“너 오늘 모의고사 본다며?”

“네, 봤죠.”

안주인이 남편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다.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다이이치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학교인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낭보를 기다렸다.

“그래서, 결과는 어땠니?”

“하아 ~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요.”

공부라면 어느 정도 해왔다. 그래봤자 어중간한 성적, 지금 톱에 서 있는 녀석들이 추격을 허용할 때까지 기다려주겠는가?

전력을 다해 뛰어도 따라잡기 어려운 게 현실, 미운오리는 그동안 나태했던 자신을 되돌아 봤다.

“하하 ~ 내가 교편을 잡았을 때 너 같은 녀석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잘 했어야지!!”

“지금 저 놀리시는 거예요?”

“놀리는 게 아니라 조언이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야!!”

상대는 주인장의 아들이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던 습성이 남아 있던 호리오 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릴 때는 거북이, 토끼와 같이 경쟁하니까 세상이 만만해 보이지!! 하지만 성장할수록 내 주위엔 다 뛰는 놈들 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분야든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대단한 거지!! 내 말이 틀렸냐?”

“ ······ ”

“지금의 널 봐라!! 네가 뛰는 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이냐? 그래도 포기는 하지마라. 죽기 살기로 뛰면 앞서 가던 놈들이 하나 둘 낙오될지 누가 아냐? 한 숨 쉴 시간 있으면 집에 가서 공부해!! 어서!!”

도대체 누가 주인이고 손님인지, 미운오리는 그렇게 식당에서 쫓겨났다.

아들을 혼냈지만 다 인생의 경험이 되는 조언, 주인장은 단골손님에게 감사함이 담긴 서비스를 제공했다.

“두고 보라고, 다카기 그 친구는 뭔가 하나 크게 터뜨릴 거야.”

“제 아들이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주인장의 기습질문에 호리오 씨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혼만 낸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서비스를 받은 대가는 확실히 치렀다.

* * *

‘아직인가.’

한편, 마이키는 룸메이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오늘 경기에서 6이닝 무실점 투구를 펼치며 고시엔의 굴욕을 씻었지만, 큰 의미는 두지 않았다.

아직 승부를 짓지 못한 라이벌이 부상으로 물러나면 기분이 후련할까? 조금 열 받는 자식이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예전처럼 잘난 척을 떨길 바랐다.

‘이렇게 끝낼 순 없지. 반드시 건강하게 돌아와라.’

그 마음이 닿은 걸까. 문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마이키는 침대 위에 던져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역시 그 녀석이 보낸 문자, 걱정이 깊은 만큼 손가락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저 지금 퇴원 했습니다.]

[머리는 괜찮냐?]

[머리보다 아픈 건 제 자존심이죠.]

벌레들에게 비아냥거림을 당하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야구를 하면서 부상으로 경기를 빠진 건 이번이 처음, 그렇다고 위축되진 않았다.

여기서 잠깐 발을 헛디뎠다고 풀이 죽다니, 싸우겠다는 내 의지가 그렇게 약해 빠진 거였나, 아무렇지도 않다며 웃어 넘겼다.

[너 정말 괜찮은 거냐? 무리해서 퇴원하는 거 아니지?]

[암초에 걸려 뒹구는 것도 인생이죠. 선배도 올해 겪으셨잖아요?]

아픈 곳을 찔린 마이키의 얼굴은 굳어졌다. 역시 나는 괜한 걱정을 한 건가? 이어지는 문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겨내셨으니, 선배도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렇다고 방심하진 마세요. 저도 곧 따라갈 테니까요]

마이키는 이제 다카기의 캐릭터를 이해했다.

말은 밉게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녀석, 그리고 이렇게 건방을 떨길 바랐던 건 나 아닌가? 어서 돌아오라며 위로의 답장을 보냈다.

[보고하는 것도 순서가 있죠. 감독님 먼저 찾아뵐 게요]

[그래]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이키는 건강히 돌아온 라이벌의 어깨를 툭툭 치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럼 내일부터 다시 출장하는 거냐?”

“아니요. 감독님이 쉬라고 하시더라고요.”

다카기가 교체된 후, 유격수 자리는 기무라가 채웠다. 공격과 수비에서 흠 잡을 곳이 없는 활약, 여유가 생긴 아카마츠 감독은 다카기를 무리시키지 않았다.

명예회복을 꾀하는 다카기 입장에선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 하지만 지금은 몸을 쉬게 하는 게 우선이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역시 대표 팀 출전한 건 잘한 것 같네요.”

“그게 무슨 소리냐?”

“다들 성장한 느낌이랄까. 발악하는 게 눈에 보여요.”

다카기는 합숙훈련을 치르면서 훈련에 임하는 학생들의 각오가 대단하다는 걸 확인했고, 그 결과는 첫 경기부터 드러났다.

‘난 고시엔 MVP라고’

이런 건방진 생각을 하고 출전을 거부했다면 어땠을까.

처음부터 일본의 명예가 아니라 실력향상을 위해 내린 결정, 첫 단추를 잘못 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남이 강해질수록 나도 강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 아닌가, 한발 앞서나간 경쟁자들 덕분에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는 의지는 더 강해졌다.

“넌 팀 동료까지 경쟁자로 보는 거냐?”

“당연하죠. 선배도 절 라이벌로 보면서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훗 ~ 그래, 맞는 말이다.”

“앞으로 더 활약해 주세요. 그런 선배를 넘어섰다는 건 제 실력이 그만큼 향상됐다는 뜻이니까요.”

건방진 도전이지만, 마이키는 그러겠다고 답했다.

다이이치의 캡틴 이시다의 기량이 몇 달 사이 급성장 한 이유가 뭘까? 여론은 그 이유에 여러 가지 근거를 대고 있지만, 마이키는 진짜 이유를 알아냈다.

이 정도 실력과 각오를 가슴에 품은 후배가 뒤에서 쫓아온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다카기가 다이이치가 아니라 가나가와 고교를 택했다면, 나도 자극을 받아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가나가와 고교가 다카기를 스카우트 하려 했던 게 사실이라, 조금은 아쉬웠다.

‘도장은 내 손으로 찍는다. 반드시’

다음 날, 다카기는 감독의 예고대로 벤치에 앉아 경기를 관람했다.

일본의 지역예선 2번째 상대는 스리랑카, 2013년 세계청소년 대회에서 인도네시아에게 28대 0으로 질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었지만, 한국의 김재용 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실력이 급등했다.

2015년 대회에서 인도네시아를 17대 8로 격파하며 지난날의 패배를 설욕, B조 2위로 본선까지 진출했다.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전력, 그래도 야구강국 일본과의 격차는 경기 초반부터 드러났다.

까아앙 ~ !!

“이 타구는 우측으로!! 더 높게!! 멀리!! 담장을 넘어갑니다!! 후지타 겐고로의 투런 홈런!! 대만전에 이어 일본의 공격을 이끌고 있습니다!!”

“벌써 이번 대회 4타점 째네요. 다카기 선수의 공백은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후지타는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카기의 투쟁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건 눈치 채지 못했다.

그 눈빛을 알아 본 건 다카기를 잘 알고 있는 이시다와 마이키 정도, 굶주림에 지친 저 맹수가 다음 경기에서 어떤 피의 살육을 벌일까.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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