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밤하늘에 점 하나를 찍어 봐 - (1)
“너희 학교 미소녀 부는 응원 안 오냐?”
“아르바이트비 주면 오겠지.”
U-18 일본대표팀의 합숙훈련 3일 차,
어색한 분위기에서 말도 잘 나누지 않았던 학생들은 이제 각자 무리를 지어 평범한 일상을 공유했다.
그 중에서도 다이이치 고교의 미소녀 응원단은 화제의 중심, 고시엔 1차전 패배가 아직 가슴에 남아 있는 마이키 요시토모(가나가와 고교, 3학년)는 이시다에게 도발을 날렸다.
“야, 응원단만 없었어도 너희는 우리한테 졌어.”
“그게 승패와 관계가 있는 거야?”
“당연하지, 여자의 응원은 없던 힘도 끌어낸다고”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시다는 씩 웃어넘겼다. 다 친해지자고 하는 말이겠지,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 없었다.
“그런데 그 자식은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드냐?”
화제는 이내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응원단보다 더 신경 쓰이는 존재는 단연 다카기, 하지만 그 녀석은 훈련이나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방에서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음탕한 짓 하는 거 아니냐는 시답잖은 농담이 흘러나왔지만, 마이키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야, 너 다카기하고 같은 방 쓰잖아. 뭐 아는 거 있냐?”
“알지. 숨이 막힐 지경이야.”
다카기의 룸메이트 기무라(가나가와 고교)는 진실을 털어놨다.
대표 팀 숙소에서 공부라니, 학업 명문고 학생이라고 유별을 떠는 것 같아 괜히 눈에 거슬렸지만, 큰 소리를 낼 배짱은 없었다.
건드리면 정말 한대 칠 분위기, 숨이 막힐 지경이라 그냥 피해버렸다.
‘붙임성이 별로 없는 녀석인가.’
마이키는 생각에 잠겼다.
잠깐 모이고 흩어지는 대표팀, 그래도 기왕이면 잘 지내는 게 좋지 않을까. 잠깐이라도 대화를 나누는 게 좋을 텐데, 자기 페이스대로 움직이는 그 자식이 은근 신경 쓰였다.
“야, 다카기는 어떤 녀석이냐?”
“어떤 녀석이라니?”
“내가 보기엔 붙임성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일단 다카기와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 이시다를 심문했다.
이시다가 본 후배는 평범한 고등학생, 인관관계가 넓은 건 아니지만 한번 맺은 관계는 깊게 파고드는 편이다. 그리고 농담과 웃음도 많은 편, 네가 생각하는 그런 녀석이 아니라며 변호했다.
“우리 학교는 내신이 좋아야 담임선생님의 추천장을 받을 수 있거든, 1학년이라고 방심할 수가 없어.”
“야, 그런데 넌 3학년이 여기서 이러고 있냐?”
마이키의 참견에 이시다는 방패막이를 세웠다.
성적이라면 지금까지 잘 관리했고, 뭣보다 이번에 이사회가 특기생을 인정하면서, 고시엔 우승을 달성한 이시다는 대학 진학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결승선이 코앞이라 마음은 한결 가벼운 편, 그래도 긴장을 놓지 않는 후배에게 자극을 받은 건 사실이다.
“야, 너도 공부 좀 해라. 3학년이 1학년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냐?”
“내가? 풉! 이제 와서?!!”
마이키의 참견에 기무라는 코웃음을 쳤다.
처음부터 프로야구 선수 외에 다른 길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드래프트에 응시할 예정, 1라운드는 몰라도 3라운드 안에 들 자신은 있다며 큰소리를 쳤다.
‘대회 끝나면 스카우트 제의 들어오겠지.’
남들에겐 비밀이지만 마이키도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다.
고등학교를 마치면 프로에 진출할 예정이었지만, 고시엔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공부라면 평범한 수준이고 대학교에서 손을 내밀길 바라야 하는 입장, 전국 고교 최강의 에이스라는 명성을 날렸으니 제의는 들어오겠지만, 확신은 하지 않았다.
“야, 다음에는 다카기도 데려 와라.”
“내가 왜?”
“룸메이트잖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렇게 그 자식한테 관심이 있으면 나랑 방을 바꾸던가.”
기무라의 기습 제안에 마이키는 고민에 잠겼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공부에 집중하는 녀석에게 이런 저런 말 걸기도 어렵고, 훈련을 마치고 쉬는 이 타이밍을 노렸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
“ ··· 그래 바꾸자.”
“진심?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다.”
“그래”
다음 날, 마이키의 부탁을 받은 대표 팀 관계자들은 학생들이 훈련에 열중하는 동안 임무를 완수했다.
하루아침 사이에 바뀐 룸메이트, 하지만 다카기는 상대의 사생활에 관심주지 않았다. 그래도 고시엔에서 한 판 붙었던 사이인데 이렇게 냉정하게 나오다니, 자기 자리에 누운 마이키는 곁눈질로 다카기를 살폈다.
‘와 ~ 어떻게 조금도 안 움직이냐.’
1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저 자식은 여전히 공부에 집중하고 있다.
이쪽은 30분만 지나도 몸이 배배 꼬이는데, 혹시 인형이 아닐까? 그렇다고 말을 걸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고, 왜 기무라가 숨이 막힌다는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됐다.
‘이러다 내가 잠들겠네.’
침대 위에 누워있다 보니 눈꺼풀도 스르르 잠기고, 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마이키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으음 ~ ”
이때 미동도 하지 않던 인형이 기지개를 켰고, 갈 길 가던 마이키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디 가시게요?”
“ ···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만둬야겠다.”
말을 걸 타이밍만 재고 있었는데 먼저 말을 걸어주다니, 마이키는 다시 침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너 기무라랑 같이 있을 때도 이러고 있었냐?”
“네. 그래도 말을 건 적은 없어요.”
“왜?”
“글쎄요 ··· 별로 할 말도 없고, 관심이 안 가더라고요.”
마이키는 피식 웃었다. 본인이 관심 없는 인간은 상대도 안 한다는 건가, 인터뷰를 할 때도 느꼈지만 이 자식은 자기 페이스로 움직이는 인간이라는 걸 확인했다.
“그럼 나한테는 관심이 있다는 거냐?”
대답대신 미소만 짓는 녀석, 말문이 트이면서 대화가 시작됐다.
“너 솔직히 네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그날 충분히 느끼셨잖아요. 결과를 생각해 보세요.”
마이키는 끓어오르는 마음에 참을 인을 100번 이상 새겨 넣었다. 3학년이 1학년을 라이벌로 정하다니 이게 뭘 뜻하겠는가. 마음속으로 인정한 건 괜찮은데, 저 자식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참기 어려웠다.
“너 어디서 야구 배웠냐? 누구한테 전문적으로 배운 적 있어?”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이름 있는 사람에게 배운다고 그 기술이 모두 자기 것이 되는가?
어떤 환경에서 누구에게 야구를 배웠든, 내 실력은 노력으로 가다듬은 것들이다. 가나가와 고교의 캡틴이자 고교야구 최강의 에이스라 불렸던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다니,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냐는 질문과 다를 게 없었다.
‘와 ~ 이 자식 진짜 피곤하다.’
무슨 말이든 받아치는데 상대하는 입장에선 짜증, 하지만 이시다는 이 녀석이 붙임성이 좋고 농담도 잘 하는 성격이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도발은 내가 먼저 했고, 저 자식은 아쉬울 게 없다.
“공부하고 운동 병행하는 거 어렵지 않냐?”
“어렵죠.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려고요.”
“너도 뭔가 목표가 있을 거 아냐. 야구를 그렇게 잘 하는데 운동에 집중할 생각은 안 해봤냐?”
“목표는 있어요. 다만 그걸 실행할 방법을 못 찾았을 뿐이죠.”
다카기의 목표는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거다.
그게 바로 나만의 왕국이겠지, 하지만 공부와 운동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지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고시엔에서 우승을 했으니 운동으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 건가? 하지만 공부도 수재들만 모인 곳에서 나름대로 분전했고, 조금만 노력하면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다.
벌써부터 자신의 한계를 정해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 언젠가는 결단을 내려야겠지만 지금은 때가 일렀다.
‘나는 어떻지? 잘 가고 있는 건가?’
다카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마이키는 생각에 잠겼다.
가나가와 고교는 야구만 따지면 일본 최고의 명문, 그런 곳의 스카우트를 받았다는 건 엄청난 일 아닌가? 그때부터 야구에 집중한다는 이유로 학업은 뒤로 미뤘다.
좋게 생각하면 자기가 갈 길을 일찍 찾은 거지만, 자신의 가능성을 너무 일찍 단정 지은 게 아닌지,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그러고도 졌다는 게 더 충격적이다.’
상대는 운동과 학업을 병행해 온 1학년, 그런데도 난 이 녀석에게 졌다. 길을 일찍 정한 건 둘째 치고 학업을 내려놓은 만큼, 나는 운동에 최선을 다한 걸까?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 ··· 너 애인은 있냐?”
“아니요.”
“나는 있어. 너처럼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건 몰라도, 걔는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예고에도 없는 스토리 전개에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성공해도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겠지, 뭣보다 가족을 우선시 하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 분도 선배를 많이 사랑하나요?”
“ ··· 뭐?”
“사랑도 기브 앤 테이크죠. 나는 사랑을 주는데 그쪽이 반응이 없다면 투자할 가치 없는 거 아닌가요?”
마이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대기업 회장의 손자 아니랄까 인간관계를 거래로 따지다니, 그것보다 애인은 내가 주는 만큼 사랑을 돌려주는 걸까?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더 무서웠다.
“됐다. 너랑 더 얘기하면 안 될 것 같다.”
“네”
다카기가 다시 공부에 집중하는 동안, 벽을 보고 누운 마이키는 애인에게 사랑의 뜻이 담긴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반응은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은 더해졌다.
“투자는 잘 하고 계세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그 녀석의 목소리, 마이키는 어렸을 때 본 공포영화에 버금가는 충격을 받았다.
그럴 리 없겠지만 이쪽 사정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기분, 그렇잖아도 무서운 자식인데 이제는 트라우마가 될 것 같았다.
* * *
시간은 흘러 9월 3일, U-18 일본대표팀은 지역예선 첫 경기를 치렀다.
상대는 대만, 한국만큼 부담스러운 상대는 아니지만, 일본은 지난 청소년대회 지역예선에서 대만에게 5대 1 패배를 당했다.
일본 입장에선 그날의 패배를 갚아줘야 하는 게임, 물론 다카기의 대표 팀 입성을 곱게 보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퍼부었다.
[한국전에서 실책을 남발할 스파이를 대표 팀에 뽑다니, 아카마츠도 자이니치 출신인가?]
[3전 전패로 져버려라. 그리고 그대로 일본을 떠나]
[이기든 지든 관심 없다. 이건 일본 대표 팀이 아니야]
-> 관심 없다면서 댓글 다네? 지면 다시 기어 나와라 벌레야
[일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뛴다는 놈이다. 마음에 안 들지만, 본인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겠지]
-> 난 그것도 못 믿겠어. 왠지 중요한 순간에 실책을 할 것 같아. 그것도 의도적으로 말이지
-> 이제 와서 의심하면 뭐 어쩌자는 거냐. 일단 지켜봐라
논란 속에서 치르는 첫 경기, 대표팀의 1번 타자로 낙점된 다카기는 덤덤한 표정으로 투수와 얼굴을 마주했다.
까앙 ~ !!
“초구를 때렸지만! 유격수 정면, 1루에 송구하면서 아웃됩니다. 다카기 선수의 첫 타석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네요.”
“글쎄요. 다카기 선수가 고시엔에서 적극적인 타격으로 성과를 냈지만, 여기선 조금 신중했으면 좋겠습니다.”
해설위원의 반응은 왠지 미적지근했다.
초구 타격은 고시엔 지역예선부터 해왔던 건데 이렇게 말이 바뀌다니, 일부 팬들은 줏대가 없다며 비판했지만, 다카기의 몰락을 바라는 자들은 해설위원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 자식은 참을성이라는 게 없는 건가]
-> 원래 춍은 참을성이 없잖아. 빨리빨리 몰라?
-> 더러운 말 여기에 적지 마라. 너도 자이니치 인증당하고 싶냐?
[공만 보면 달려드는 개네. 감독이 훈련을 제대로 시켰어야지]
-> 그럼 공 던져주던가. 대신 네 이빨이 무사할지는 장담 못한다.
-> 네, 자이니치 인증하셨습니다.
[춍은 여기서 나대지 마라. 다 죽여야 돼]
반면 아카마츠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웃은 됐지만 타구 질은 좋은 편, 볼을 때린 것도 아니라 질책할 이유는 없었다.
‘너는 네 방식대로 해라.’
다카기의 장점은 적극적인 타격, 후루타 감독도 그 점을 살려 고시엔에서 성과를 거두지 않았던가. 지켜보면 평균은 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