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용병선언 - (13)
[사양하겠습니다.]
설득은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이제 곧 개학, 집에서 쉬는 게 나을까 아니면 독이 든 성배를 쥘까. 다카기는 답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마음도 이해하네. 하지만 자네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기 좋게 한방 먹여줄 기회가 아닌가?”
아카마츠 감독은 다카기의 자존심을 슬쩍 건드려봤다.
본인이 일본을 우승으로 이끌면 여론의 반응도 달라지겠지. 너의 가치는 스스로 증명해 보라는 뜻이었지만, 돌아온 반응은 냉담했다.
[뭘 인정받으라는 거죠? 실력이라면 고시엔에서 증명하지 않았나요?]
“아니 ··· 그게 아니라 자네를 일본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 ”
[하하 ~ 언제부터 청소년야구대회가 국적을 인정받는 자리가 된 거죠?]
아카마츠 감독은 순간 아차 했다.
국적은 내가 정하는 거지 남들에게 인정받을 일인가? 첫 단추부터 잘못 끼면서 민감한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린 꼴이 됐다.
[제가 듣고 싶은 말은 간단합니다. 제가 대표 팀에 필요합니까? 그게 아니라면 사양하겠습니다.]
“ ··· 필요하네. 필요하니까 이렇게 전화를 하지 않았나.”
[제 입장이라는 것도 있으니, 생각해보고 전화 드리겠습니다.]
할 말 다한 다카기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인정을 받으라니, 뭘 더 증명하라는 건가?
내가 필요해서 부른 건 그 쪽인데 자존심을 툭툭 건드리며 길들이려 하다니,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여기는 내가 뿌리를 내려야 하는 곳인가?’
다카기는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을 거듭했다. 요즘 사회가 침체기에 접어든 일본은 자국을 찬양하는 일에 급급한데, 다 비참한 현실을 덮기 위한 허상에 불과하다.
‘위대한 일본? 그럼 거기에 소속된 나도 위대한 거네?’
자신에 대한 확신, 자존심이 없는 놈들은 선동에 흔들리기 쉽다.
내가 초라하기 때문에 어떤 집단의 위상에 기대어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것, 당연히 ‘위대한 일본’이라는 개념에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거기에 맞지 않는 자들은 차별한다.
순수하지 못한 일본인이 국가대표가 되는 걸 거부하는 것도 그런 이유겠지, 그런 하찮은 놈들의 기준에 맞춰줄 필요는 없었다.
‘난 너희들하고 달라. 능력이 있으니 뭐든 선택할 수 있다고, 필요하면 국적도 말이지.’
아직 고등학교 1학년, 새 출발을 하기엔 늦지 않았다.
미국 본토에 자리를 잡은 친척들도 있고 차근차근 적응하면 되겠지, 학교를 자퇴하고 유학을 하겠다는 뜻을 굳혔다.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들의 폭탄선언에 다카기의 어머니는 얼어붙었다.
일본인으로 키우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하지만 독기를 품은 아들의 눈을 정면으로 막아설 자신은 없었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한 거 아니니?”
“저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에요. 미국에 저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 고모도 계시니까 이 기회에 넓은 곳으로 나가보고 싶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이 귀여울수록 여행을 시키라는 말도 일리는 있고, 이제는 내 통제를 받을 녀석도 아니다. 내 품 안고 젖가슴을 물린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커버린 아들, 대견하고도 서운한 감정이 흘러나왔다.
“엄마, 지금 우시는 거예요?”
“ ··· 아니야.”
뱃속에 동생도 있는 분인데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다카기는 서둘러 뒷수습에 나섰다.
“엄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전 지금 저만의 왕국을 세우는 중이니까요.”
“왕국?”
“네, 그렇게 되면 엄마도 이민 오세요. 제가 황태후로 대우해 드릴게요.”
당찬 포부에 다카기의 어머니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일본인으로 살라고 했는데 이젠 나라 하나를 세울 기세, 그만한 능력과 의지가 있는 녀석이라 농담처럼 들리진 않았다.
* * *
“지금 자퇴라고 했나?!!”
“예”
다카기의 거침없는 행보는 다이이치 고교를 발칵 뒤흔들었다.
학교를 유명세에 올린 학생이 자퇴라니, 거기다 이사회는 얼마 전, 학교에 막대한 기부금을 낸 사람이 다카기의 친할아버지 고영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출석만 해줘도 고마운 보물단지가 제 발로 기어나가겠다니, 콧대가 높은 이사회도 자퇴신청 수리를 보류했다.
“설득을 해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하지. 자퇴를 하다니 말도 안 돼”
다이이치 고교는 다이이치 대학의 부속고교, 당연히 이사회가 두 곳을 모두 총괄하고 있다.
다이이치 대학은 일본에서 손꼽히는 사립대학, 실력이 확실한 만큼 다른 대학과 교환학생을 주고받는 비율도 높다.
다카기가 대학입학 추천장을 받을 성적을 유지한다면, 유학이라고 못가겠는가? 자퇴는 너무 성급한 결정이라며 붙잡았다.
“절대 안 돼!!”
다이이치 야구부 입장도 다르지 않았다.
후루타 감독은 이사회로부터 다카기를 설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고시엔의 피로가 풀릴 틈도 없이 시즈오카로 달려갔다.
“그런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 말에 귀 기울일 필요 없다.”
집에 바퀴벌레가 있으면 박멸을 하는 게 정답 아닌가. 후루타 감독은 바퀴벌레를 피해 집을 비우지 말라는 조언을 건넸다.
“그래, 그건 감독님 말씀이 옳다.”
내심 아들이 일본에 남았으면 하는 어머니도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벌레 때문에 집이 썩어버렸다면 다시 지을 필요도 있지 않을까? 다카기는 지금 일본이 딱 그런 상황이라고 봤다.
“그럼 네가 다시 지으면 될 거 아니냐.”
“제가요?”
감독님의 아부에 다카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일본을 다시 세우라니, 나중에 정치가라도 되라는 건가? 어린 제자의 체면을 세워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집을 짓는 건 당분간 보류해야겠네요.”
“보류?”
“네, 당분간은 감독님 밑에서 용병으로 뛰죠 뭐”
왕국이 하루아침에 이뤄지는가.
그리고 다카기는 자신만의 왕국을 세운다고 다짐했기에, 할아버지의 명성과 재산에 의지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날 필요로 하는 사람들 밑에서 용병으로 뛰며 입지를 다져야겠지, 감독님의 충고대로 일단 자퇴는 철회했다.
‘그렇다고 국가대표에 나간다는 건 아니다.’
자퇴철회와 국가대표 출전은 별개의 문제, 국가대표가 나라의 위신을 위해 짊어지는 일인가.
당장 프로야구 선수들만 해도 국가대표 출전을 두고 협회와 줄다리기를 벌이지 않는가. 아직 어린 학생들은 비교적 순수한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겠지만, 다카기는 그럴 입장이 못 됐다.
‘이건 날 위해서야’
그래도 고심 끝에 출전으로 방향을 잡았다.
고시엔에서 대활약을 했지만 세상의 넓이를 깨닫기엔 역부족, 국가대표로 나가면 나보다 더 뛰어난 녀석들이 있을 거다.
성장이란 강한 상대와 부딪치며 이루는 것, 고시엔에서 활약한 선수들이 기량을 키우는 동안 여기서 놀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자신의 발전을 위해 국가대표를 받아들였다.
[훈련은 비공개로 진행해주겠네]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카마츠 감독은 선수의 입장을 배려했지만, 다카기는 그것도 차별로 받아들였다.
이미 다 밝혀진 것들인데 내가 왜 숨어야 하는가. 언제까지 피할 수도 없고, 기자들이 어떤 질문을 하든 받아칠 준비를 했다.
“후우 ~ ”
통화를 마친 아카마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내가 필요해서 거둔 선순데, 가슴을 짓누르는 이 답답함은 뭔가. 다카기를 뽑고도 패했을 때 뒤따를 비난 여론에 겁을 먹은 건가?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래 ··· 딱 그 기분이야.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군.’
한때 정말 좋아해서 사귀는 여자가 있었지만, 만날수록 피곤함이 쌓였고 결국 헤어졌다.
다카기는 분명 대표 팀에 필요한 선수, 하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뚜렷해 다루기가 쉽지 않다.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도도한 미인, 딱 그런 녀석이다.
그럼 나는 괜한 구애를 한 건가? 그렇다고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고, 일이 잘 풀리길 기원했다.
* * *
시간은 흘러 국가의 부름을 받은 학생들은 합숙훈련이 열리는 후쿠오카에 집결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여론의 관심을 끄는 한 녀석, 기자들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넘어온 스카우터들도 다카기를 주목했다.
일본에는 세계에서 2번째로 큰 프로야구 리그가 있다. 이곳의 유망주를 체크하지 않는다는 건 스카우터의 직무 유기, 고시엔에서 타율 0.857을 기록한 다카기는 미국에서도 꽤 많은 관심을 받았다.
“훈련은 언제 끝납니까?”
“기다리세요. 끝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취재 열기는 벌써부터 치열, 대표팀 관계자가 흥분한 기자들을 다독이는 동안, 아카마츠 감독은 훈련을 지도했다.
여기 모인 학생들은 전국을 대표하는 인재, 그라운드에 풀어놓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역시 물건은 틀림없군.’
그래도 유독 한 녀석에게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흠잡을 데 없는 스텝과 빠르고 정확한 송구, 저 정도 수비력에 공격력까지 갖춘 유격수를 어디서 구하나. 미인은 구애를 청하는 남자 앞에서 잘난 척 할 자격이 있는 법, 저 녀석도 그럴 자격이 있다는 걸 인정했다.
‘이건 기대 이상이군.’
훈련이 거듭될수록 스카우터들의 의심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키는 제법 크지만 한눈에 봐도 호리호리한 체형, 저런 몸으로 장타를 뿜어내는데 경이롭다는 말 외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하드 펀처군. 걸리면 누구라도 TKO 되겠어.’
한 스카우터는 다카기를 이렇게 비유했다.
보디빌더처럼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것도 아닌데, 격투기 선수들은 어떻게 주먹 한 방으로 사람을 때려눕히는 걸까.
펀치는 팔 근육만 키운다고 강해지는 게 아니다. 허리 - 등 - 어깨 근육의 협동 그리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훈련이 결과를 만들어 낸다.
매년 20만 명이 넘는 야구 유망주가 쏟아져 나오는 미국, 그곳에서 넘어온 전문가들은 다카기의 장점을 놓치지 않았다.
까아앙 ~ !!
부드럽게 이어지는 하체와 상체의 협력, 그리고 반복훈련으로 얻은 기술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워, 동양인이 저런 스윙을 할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웠다.
‘올해 15살이라고? 와우 ~ 마음에 들어. 계약금은 얼마나 줘야 할까.’
아직 먼 일이지만, 한 스카우터는 진지하게 계약을 고민했다.
CBA 규정이 개정되면서 예전처럼 국제 유망주가 수천만 달러를 받고 MLB에 입성하는 일은 사라졌다.
그래도 상위권 유망주가 최대 400 ~ 500만 달러 계약금을 받는 건 사실, 다카기는 아직 검증된 유망주는 아니지만 어린 나이와 현재 기량을 따져보면 훗날 상위 50명 안에 들 선수라고 평가했다.
“다들 수고 했다.”
“예!!”
드디어 끝난 훈련, 오랜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다카기는 기자들의 관심에 둘러싸였다.
“다카기 선수, 왜 그동안 진실을 숨긴 거죠?”
“진실이라뇨?”
“할아버지가 스기토모 그룹의 ··· ”
“제가 지금까지 받은 질문 중 가장 수준 낮은 질문이네요. 당신은 친구들하고 사귈 때 가족관계까지 다 들춰내고 만나나요? 숨길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드러낼 일도 아닌 것 같은데요?”
공격적인 태도에 질문을 던진 기자의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고시엔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당장이라도 한 판 붙어보자는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국가대표로 뽑히셨는데, 어떤 각오로 경기에 임하실 겁니까?”
“세상의 넓음을 깨닫고 싶을 뿐입니다. 국가의 위신이니 명예니, 그런 거창한 이유 앞세울 생각 없습니다. 이런 저를 욕하겠다면 그것도 자유입니다. 아니, 외국인으로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프로야구도 용병을 쓰는 시댄데, 국가대표에 용병이 못 뛴다는 법도 없죠. 이상입니다.”
사전에 예고한 10분이 지나자, 다카기는 그대로 벤치로 향했다.
완벽한 마이 페이스, 여론은 지금이라도 저런 놈은 당장 국가대표에서 쳐내야 한다며 들끓었지만, 싸우는 길을 택한 다카기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