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용병선언 - (12)
‘이제 집이다.’
고시엔 일정을 마친 다카기는 시즈오카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말총머리는 이제 자신의 상징처럼 굳어졌지만, 할머니 기일에 이런 차림은 아니라는 생각에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미지가 달라진 덕분일까. 알아보는 사람은 없는 느낌, 조용한 걸 싫어하는 성격이 아니라 개의치 않았다.
‘그때 내가 소학교 6학년이었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일본은 매년 기일을 챙기는 게 아니라 1년, 3년, 7년 이렇게 주기를 둔다. 모든 절차는 유골을 모신 신사에서 주관하고 유족들은 신관의 행동에 따라 합장하거나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게 전부, 의식이 끝나면 식사를 하며 그동안 전하지 못한 안부를 나누고 헤어진다.
정말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이는 친지들, 동생들도 많이 컸을 텐데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지? 쓸데없는 고민을 중얼거렸다.
[기차 탔니?]
[네]
그새를 못 참고 문자를 넣은 어머니, 뱃속에서 커가는 자식도 있는데 다 큰 아들이 그렇게도 보고 싶으셨을까. 하지만 근 반년 만에 이뤄지는 모자상봉,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뒤에 누구 따라오는 사람은 없니?]
[없어요]
아들이 유명인이 됐다고 이런 과민반응을 보이다니, 알아보는 사람 한 명 없다며 다독여드렸다.
[없다니까 엄마가 오히려 서운하네]
[엄마 ··· 제발요 ··· ]
어제부터 왜 이렇게 의미 없는 문자를 넣으시는 건지, 아직 어린 아들은 이게 관심과 애정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저기 ··· 혹시 다카기 하루요시 선수 아닌가요?”
이때, 한 승객이 조심스럽게 접근해왔다. 평소 이런 일을 당해봤어야지, 겁이 없는 다카기도 조금은 당황했다.
“어 ··· ”
“망설이는 거 보니까 맞네요. 실례지만 사인 하나 부탁해도 될까요?”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은 가방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조그만 수첩을 내밀었다.
프로야구 선수도 아니고 이런 때를 대비해 사인 연습을 한 것도 아닌데 참으로 난감한 일, 망설이던 다카기는 자기 이름을 정자로 적었다.
‘풉!!’
사인을 확인한 팬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소학생이 잃어버리지 말라고 물건에 자기 이름을 써넣은 느낌, 그림처럼 잘생긴 얼굴과 건장한 체격에 비해 하는 짓은 귀여웠다.
“실제로 보니까 정말 잘생기셨네요. 연예인 같아요.”
“또 부탁하실 거 있나요?”
본심을 찔린 팬은 사진촬영을 요구했다. 까짓 거 못 해줄 것도 없겠지, 촬영을 마친 다카기는 평온한 분위기에서 기차 여행을 만끽했다.
[지금 내 앞에 다카기 하루요시가 있어. 감동!! 잘 생겼고 엄청 친절함, 실물이 더 멋짐!!]
-> U - 18 세계청소년 야구대회 출전하나요? 물어봐 줘요
-> 제발 나가줘. 일본은 네가 없으면 안 된다.
-> 질문을 했으면 답을 해라. 우리는 팬으로서 답을 들을 권리가 있다.
여성 팬은 그 자리에서 SNS에 사인과 기념촬영 사진을 올렸다.
반응은 폭발적, 이런 저런 질문을 해달라는 요청이 쏟아졌지만 여성 팬은 차마 그렇게까지 하진 못했다.
[잔다]
대신 다카기가 잠든 틈을 노려 사진 하나를 더 찍었다.
여름동안 그 거사를 치렀으니 피곤하기도 하겠지. 그건 생각 안 하고 국가대표로 나가라는 독촉을 쏟아 붓던 팬들은 반성의 시간을 보냈다.
* * *
“세상에 ~ !! 너 정말 하루 맞니?”
“네, 그동안 별 일 없으셨죠?”
“어휴 ~ 기특해라. 우리 아들 이제 다 컸네 ~ ♡”
4년 만에 돌아온 할머니 기일, 다카기는 미국에서 날아온 고모의 관심을 독차지 했다.
그 어린 아이가 이렇게 훤칠하고 멋지게 자라다니, 친아들이라도 만난 것처럼 얼굴을 어루만지며 애정을 표했다.
‘흥 ~ 제 아들이라구요.’
하지만 다카기의 어머니는 못마땅한 표정, 아들 아들 하며 애정을 표하는 건 상관없는데, 방심할 만 하면 미국 유학을 권하는 건 마음에 안 들었다.
다카기의 고모는 일본에서 고교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넘어가더니, 그대로 눌러 앉아 미국인과 결혼까지 했다.
아들이 저 유혹에 넘어가 미국문화에 물드는 건 아닌 지, 아들을 일본인으로 키우려는 어머니 입장에선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내 아들은 누가 뭐래도 일본인이야. 아무도 다른 말 못해’
일본인들은 순혈을 그렇게 따지는데, 이미 다 섞이고 섞인 피 아닌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쓰고 그 문화에 익숙해졌으면 일본인, 다카기의 어머니는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외도를 허용하지 않았다.
“집에서 한국어 쓰면 안 된다. 물론 밖에서 하면 안 돼요.”
“왜요?”
“엄마가 하는 말을 믿으렴, 우리 아들은 착하고 똑똑하니까 엄마 말 들을 거지?”
“ ··· 네”
하지만 다카기는 성장하면서 할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지금은 한국어로 할아버지와 대화가 가능한 정도, 고모도 그렇고 주위 사람들 때문에 정체성을 상실할까 염려됐다.
“안녕 ~ 오빠 기억해?”
물론, 엄마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아들은 동생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고모가 결혼 9년 만에 어렵게 얻은 쌍둥이 자매, 대략 10살 전후로 보이는데 낯을 많이 가리는지 엄마 뒤에 숨어 경계태세를 유지했다.
“고모, 얘들 왜 이래요?”
“네가 일본어로 말하니까 그렇지.”
“아 ~ 그럼 우리 영어로 대화해 볼까?”
별로 유창하지도 않은데 손짓발짓 다하는 모습이 가상했던 걸까. 한 녀석이 씩 웃더니 엄마 귀에 뭔가를 소곤거렸다.
“쟤 뭐라고 하는 거예요?”
“호호 ~ 너 발음이 형편없다는데?”
배려 없는 폭로에 다카기는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나름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원어민의 실력은 넘을 수 없다는 건가. 자존심이 상한 다카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역시 영어는 본고장에서 배워야 하나.”
다카기의 어머니는 뜨끔했다. 이러다 정말 아들의 진로가 유학으로 기울어지는 건 아닌지, 다행히 다카기는 적당한 때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오빠 발음이 그렇게 형편없어? 그럼 너희들이 가르쳐 주면 되겠네.”
말없이 배시시 웃기만 하는 녀석들, 주도권을 잡은 다카기는 어느새 동생들 옆자리를 차지했다. 집에선 막내아들 학교에선 신입생, 늘 아랫사람 취급을 받는 입장이라 이쪽에서 먼저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했다.
“이제는 발음 괜찮아?”
“나름 들어줄만 하네요.”
“그래? 그럼 나도 3개 국어 능력잔가?”
동생들과 그세 친해진 다카기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할아버지에게 배운 한국어, 일본어 그리고 동생들이 가다듬어 준 영어까지, 이 정도면 잘난 척 할 만 하지 않느냐며 고개를 세웠다.
“그래도 영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유학을 가는 게 좋지 않겠니?”
하지만 고모는 본심을 숨기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그 먼 길을 날아왔는가. 어머니 기일도 기일이지만, 재주 많은 조카를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하겠다는 목적도 있다.
“고모, 엄마가 싫어할 말만 하시네요.”
“호호 ~ 그걸 내가 왜 모르겠니. 그래도 자식이 귀여울수록 여행을 시키라는 말이 괜히 있겠니? 넓은 곳에서 나가서 그만큼 성장해서 돌아오면 네 엄마도 기뻐하실 거다.”
다카기는 고민에 잠겼다.
해외 유학이라니, 뭔가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가볍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자퇴를 하고 입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익숙해진 학교와 친구들을 뒤로하고 또 다른 도전을 한다?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 * *
‘하아 ~ 이대로 끝나는 건가.’
한편, 모토스미 스즈에는 얼마 남지 않은 방학을 의욕 없이 흘려보냈다.
방학 막바지에 야구부 응원단이라는 멋진 경험을 했건만, 얻은 건 구슬 따는 소녀라는 웃기지도 않은 별명뿐이다.
‘남자도 남자 나름이지, 너희들 구슬은 트럭으로 가져다 줘도 싫어.’
뭐라 불리든 상관없는데, 다카기와 가까워질 계기가 없었다는 건 속상했다.
그동안 야구부를 지탱해 온 사나에라는 매니저가 은퇴했다는데,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갈 생각도 해봤다. 타카코 선생님이 미소녀 부와 야구부의 합병을 추진하고 있지만 쉽게 될 것 같진 않고,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걔는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고향으로 내려간 거야?’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1학년이 고시엔 우승, 그것도 MVP까지 차지했으니 신문이나 방송국에서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다카기는 모든 취재를 사양하고 고향으로 귀환, 손을 뻗어도 닿지 않던 운명의 남자가 더 멀리 도망쳐 버리자 스즈에는 의욕을 상실해 버렸다.
[너 오늘 기사 봤어?]
이때 날아든 친구의 문자, 스즈에는 의욕 없는 답장을 보냈다.
[나 그런 거 관심 없는 거 알잖아]
[다카기에 관한 건데? 지금 난리 났어. 얼른 봐]
그제야 스즈에는 기사를 들춰봤다.
1년 만에 공식 활동을 재개한 고영길은 여론의 관심을 받았고, 마침 그 행적을 취재하던 기자가 특종을 수확했다.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지만 할아버지를 따라 신사에 들어서는 소년은 다카기가 분명했고, 여론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럴 수가!! 춍이었다니!!]
[이 자식을 응원한 내 혀를 자르고 싶다]
-> 잘라, 아무도 뭐라고 안 해.
[오랑캐의 도움으로 우승해봤자 의미 없다.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의 피는 깨끗해야 한다.]
-> 이런 정신 나간 말을 하는 인간들이 아직도 있네.
-> 일본이 이래서 발전이 없는 거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비결이 능력 있는 외국인을 적극 등용했기 때문이라는 거 모르냐? 고시엔에서 0.857 친 선수를 외면한다면 그게 웃기는 거다.
-> 외국인이라고 할 수도 없지. 일본 국적에 일본어를 쓰는데 일본인이 아니면 뭐야?
-> 이제 외국인 천 만 시대다. 순혈주의 운운하는 건 의미도 없고, 다카기에게 일본을 대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맞다.
격렬히 대립하는 여론 속에서 스즈에는 생각을 정리했다.
좋아하는 남자가 한국인이라면 그게 큰 장애가 되는가?
아니,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이름, 일본어를 쓰는 사람을 외국인이라고 하는 것도 웃기다. 지지를 해주는 놈들도 잘 보면 다카기를 외국인 취급하는데, 욱해서 댓글까지 달았다.
[일본을 대표할 기회를 주자고? 그럼 거부하면 일본인이 아니라고 할 거야?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다 있어? 다카기는 일본인이야. 대표 팀에 뽑히든 안 뽑히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내 말이 틀려?]
스즈에의 댓글엔 격렬한 논쟁이 덧붙었다.
일본인이라는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하는가. 핏줄? 문화? 제멋대로 뒤섞여 난장판을 벌이는데, 스즈에는 더는 놀아줄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한국의 핏줄? 귀신의 자식이라도 상관없어.’
잘 생기고 집안도 좋은 남자는 드라마 속에서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왕자님이었을 줄이야. 내 남자로 만들겠다는 의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 * *
‘신경 쓸 것 없지.’
한편, U-18 일본 대표 팀을 이끌게 된 아카마츠 감독은 수많은 협박편지에 시달렸다.
선수차출은 감독의 고유권한, 그 녀석은 반드시 뽑겠다고 다짐했건만 다카기가 고영길의 손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여론은 크게 뒤흔들렸다.
[일본의 이름을 더럽히지 마라.]
[춍을 대표 팀에 뽑는다면 너도 같은 부류로 보겠다.]
[일본은 오랑캐의 도움 따윈 필요 없다. 순혈로 우승해야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국제전을 치르면서, 순수 일본인으로 대표 팀을 꾸린 게 몇 번인가?
스포츠 계에 자이니치가 많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 본인이 밝히지 않았을 뿐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뭘까? 말만 앞세우고 실천은 하지 않는 사회의 쓰레기들,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다카기는 뭐라고 하나?”
“아직 아무 답이 없습니다.”
“그래 ··· 역시 신경이 쓰이겠지.”
이런 때야 말로 내가 녀석의 체면을 세워줘야겠지, 아카마츠 감독은 주위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카기와 접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