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용병선언 - (11)
“이제 속 시원하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학생들이 한덩이로 뭉친 이 와중에도, 다카기는 덤덤한 목소리로 쿠로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평소 친하게 지낸 건 아니지만, 이 사람이 부 캡틴이라는 짐을 지고 흘린 땀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제는 그 부담을 내려놓을 때, 가려운 곳을 긁힌 쿠로다는 눈물을 훔쳤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그게 네가 할 말이냐?!!”
이시다는 후배의 위로에 격한 목소리를 내질렀다.
1학년 주제에 캡틴을 위로하다니, 하지만 이 녀석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캡틴이라면 우리에게 믿음을 달라는 이 녀석의 따끔한 충고가 있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소리를 지른 게 무안할 지경,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녀석의 머리를 격하게 쓰다듬었다.
“고생 많았다 인마!!”
“알긴 아시네요.”
마지막까지 뻔뻔한 녀석,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후배에게 이시다는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도 그동안 고생 많았다.”
한편, 후루타 감독은 벤치에 앉아 울고 있는 사나에를 다독였다.
아버지 상이다 뭐다 이런 저런 이유로 자리를 비운 못난 감독을 대신해 팀 기강을 바로잡고, 발로 뛰며 부원들과 함께한 야구부의 실세, 그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울지 말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나는 이게 뭐냐.’
그에 비해 요시다는 슬픔과 기쁨 어느 것도 표출하지 못했다.
다 이긴 경기에서 심판과 말싸움이나 벌이다 꾸중이나 듣고,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울고 있는 매니저 옆을 얼쩡거릴 뿐, 정렬하자는 캡틴의 손짓을 보고서야 그라운드로 자리를 옮겼다.
‘이런 못 난 자식, 그래도 안고 가야지.’
이시다는 미운오리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재능과 열정은 있는데 과신과 경솔이 문제, 캡틴의 위로를 받고서야 요시다는 반성의 눈물을 쏟아냈다.
“ ···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인마”
양 팀 학생들이 서로 고개를 숙이면서 유달리 더웠던 여름은 막을 내렸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지만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한 하타세미 고교 입장에선 통탄할 일, 이시다는 그 앞에서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저건 지난 3년 동안 이날을 위해 발악했던 내 모습 아닌가?
그래도 난 마지막에 웃을 수 있었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회를 뒤로 하고 야구를 접는 학생도 있겠지.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고개만 숙여도 됐을 텐데, 이시다는 기꺼이 허리를 굽혔다.
멋진 라이벌들이 있었기에 더욱 더 추억에 남을 경기, 위로보다 진심 어린 감사를 택했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돌아서는 이시다는 눈물을 쏟아냈다. 방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이 눈물이라니, 당황한 동료들이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한 번 터진 눈물샘은 수습할 수 없었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사나에는 그런 캡틴을 보고 다시 오열, 다카기는 전염되는 눈물 바이러스를 박멸하기 위해 오른손을 꼬집었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라고’
인간이란 타인의 감정에 동조하고 무리를 지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생존 프로그램일 뿐, ‘나는 승리 밖에 모르는 기계다.’라는 마인드 컨트롤로 위기를 넘겼다.
“지금부터 우는 사람은 허공에 던져버리죠.”
헹가래를 쳐준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해야 하나. 동료들이 하나 둘 마음을 다스리자 다카기는 분위기 전환에 필요한 희생양을 물색했다.
“우리 사나에 선배 한 번 던져주죠.”
“그래!!”
아직도 끅끅 거리는 매니저,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사나에는 격하게 저항했지만 수컷들의 힘을 이겨내진 못했다.
“꺄악 ~ !! 엄마아 ~ !!!!”
가벼워서 유달리 높이 뜨는 몸, 겁에 질린 소녀는 눈물 대신 살려달라는 비명을 내질렀다. 애원해서 겨우 땅을 밟았지만 아직도 다리가 후들후들, 하늘 높이 솟아오를 때 정신도 같이 빠져나갔다.
“어느 분이 또 우시나? 감독님도 하늘 공기 맛 좀 보실래요?”
“아니 ··· 난 요즘 심장이 안 좋아서 ··· ”
적당이라는 걸 모르는 녀석들, 흠칫한 후루타 감독은 사악한 미소 앞에 손사래를 쳤다. 평소 제자들에게 엄격하게 굴었던 다나카 코치는 이미 벤치 뒤로 피신, 이때 요시다가 빈틈을 파고들었다.
“너 한 번 던져보자!!”
“그래!! 이리 와!!”
동료들은 다카기를 2차 희생양으로 삼았다. 대회 내내 선배들을 긴장하게 만든 건방진 후배, 버릇을 고쳐주겠다며 있는 힘껏 내던졌다.
“유후 ~ !! 더 높게!! 더!!!!”
겁을 먹기는커녕 신난다며 환호성을 지르다니, 거기다 왜 이렇게 무거운 건가. 매니저를 던질 때와는 차원이 다른 부담, 맥이 빠진 녀석들은 재미없다며 하나 둘 돌아섰다.
“MVP 확정되면 한 번 더 하는 거죠?”
“됐어!!”
그러고 보니 MVP 수상이 남아있었지, 유력수상자의 능글맞은 목소리는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개구쟁이들의 속을 뒤집어 놨다.
‘무서운 자식 ··· 기어이 저기까지 올라갔구나.’
한편, 가나가와 고교의 에이스 마이키는 착잡한 마음으로 다이이치의 우승을 지켜봤다.
다카기의 저 무서운 성장속도를 고려하면 누군가가 한번 밟아놨어야 했다. 하지만 밟히기는커녕 까마득한 선배들까지 초토화시킨 괴물, 고시엔에서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만 여기가 아니라도 부딪칠 곳은 많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강력한 적, 왠지 그렇게 될 것 같은 운명을 예감했다.
‘조만간 다시 만나자. 물론 그 때는 내가 이길 거다.’
* * *
“꺄아아 ~ !! 우리 아들!! 축하 해!!”
이곳은 시즈오카 현, 계획에도 없던 임신 때문에 직관을 가지 못한 다카기의 어머니는 TV를 통해 아들의 우승 소식을 접했다.
국가대표 제의까지 받은 아들의 운동실력이야 의심하지 않았지만, 설마 우승까지 할 줄이야, 대회 MVP 수상이 유력하다는 것도 주체 못할 감동으로 다가왔다.
마침 눈에 들어온 자랑스러운 아들의 얼굴, 박수를 치는 것만으론 부족했는지 손 키스까지 퍼부었다.
‘대회도 끝났으니까 이제 곧 내려오겠지?’
방학도 얼마 안 남았는데 여름동안 고생만 한 아들, 어머니는 아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 채비를 차렸다.
‘잠깐, 수상하는 건 보고 가야지.’
정신이 없어서 앞뒤가 바뀐 순서, 다시 TV 앞에 앉은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이 호명되길 기다렸다.
[지금부터 폐막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승 팀은 하나뿐이지만 이 무대를 빛낸 별들은 차고 넘칠 정도, 그라운드에 선 학생들은 이런저런 감정을 가슴에 품었다.
더 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동료들과 함께 한 잊을 수 없는 추억,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잡았다.
‘난 이제 뭐 하지?’
최종승자에게도 나름의 고민은 있었다.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임했지만, 정말 고시엔 우승까지 차지할 줄은 몰랐다. 고교야구에 입성한 목표는 이룬 셈, 앞으로도 야구를 계속할 이유가 필요했다.
‘미련 없이 은퇴? ··· 그건 아니지.’
학업이 어중간한 편이라 고시엔 우승을 차지한 지금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질 부원들을 생각하면 약간 마음이 흔들렸지만 뭐든 어중간한 건 싫었다.
“할아버지는 충분히 잘 싸우셨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쉬세요.”
“그럴 순 없다. 내가 약해지고 무너지길 바라는 놈들이 있으니까.”
이때,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일본인들에게 맞아죽을 위기를 넘긴 고조할아버지가 가업을 일으키고 8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본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고 몸을 지킬 방패막이도 세웠으니 이제 전쟁은 끝난 건가?
하지만 할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면 마냥 그렇지도 않았다.
“할아버지는 왜 개명을 안 하셨어요?”
“치열하게 싸워 온 나만의 훈장이란다.”
자손들은 다카기라는 성을 쓰게 하면서 왜 본인은 그러지 않으셨을까? 고영길은 머리가 일찍 트인 손자의 의문에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평생을 차별과 싸워왔다. 물론 어렸을 땐 한국 성을 쓰는 게 창피했지만, 여기서 굴복하면 지는 거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져요? 누구한테요?”
“음 ··· 차별을 받는 입장이지만 너희들보다 더 열심히 치열하게 싸워서 이만한 성과를 이루었다는 걸 과시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어린 시절의 다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일본 성을 쓰고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나는 싸우지 않아도 되는 걸까? 어쨌든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할아버지를 위로하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잘 싸워오셨잖아요. 이제는 편히 쉬어도 되지 않을까요?”
어린 녀석에게 위로를 받다니, 평생을 치열한 전투로 보낸 고영길은 그때부터 손자를 더욱 각별한 존재로 받아들였다.
“하하 ~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구나.”
“왜요?”
“내가 약해지고 쓰러지길 바라는 놈들이 아직 많이 있다. 내가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 너도 편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럼 저도 같이 싸울게요. 할아버지가 가족들을 위해 싸우신다면 저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돼야죠.”
“ ··· 어허허 ~ 고맙구나.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고영길은 의욕이 넘치는 손자를 다독였다.
지긋지긋한 싸움은 내 시대에 끝내야겠지, 무엇 때문에 자손들에게 다카기라는 성을 쓰게 했는가. 나는 치열하게 살다 가도 후손들은 일본인으로 평안한 삶을 이어가길 바랐다.
‘내 몸에 흐르는 피를 부정할 생각은 없어. 인정 못하겠다면 싸우는 수밖에.’
하지만 다카기는 평화와 반대되는 길도 짊어질 각오를 세웠다.
지금까진 어떻게든 숨겼지만 언젠간 드러날 일이다. 할아버지가 세운 부와 명성에 의지하며 살 마음은 없지만, 싸워야 할 때가 온다면 그 뜻을 계승할 생각은 있었다.
“중요한 건 국적과 출신이 아니다. 능력을 갈고 닦아 너만의 왕국을 세워라.”
고조 할아버지부터 내려오는 가훈, 다카기는 그 말을 다시 한 번 가슴에 되새겼다.
이제 정상의 자리에 올랐으니 내 목을 노리는 자들이 많아진 건 당연, 몇 번을 덤비든 철저하게 밟아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MVP는 ··· 다이이치의 다카기 하루요시 선수입니다!!”
잡념에 빠진 사이 성큼 다가온 왕위 수여식.
우승 트로피를 받아든 이시다 캡틴은 자리를 비켜줬고, 4만 관중은 단상에 오르는 신성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어지는 집행위원장의 축하와 기념촬영, 카메라 앞에서 한껏 포즈를 취한 다카기는 기자들이 내민 마이크를 마주했다.
“다카기 선수, MVP가 된 소감에 대해 한 말씀해주시죠.”
“음 ··· 이 자리에 올랐다는 건 누군가의 목표이자 적이 됐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저는 도망치지도 물러서지도 않을 겁니다. 도전이든 뭐든 받아들일 테니 기다리겠습니다.”
관중석에서 다시 한 번 환호가 터져 나왔다.
저 자리에 서면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마련인데, 어디 덤벼보라니, 야구팬들의 흥미를 끌어낼 스타성은 확실했다.
‘이거 내년이 더 기대되는데’
고시엔 주최를 책임지는 마이니치 신문 관계자들은 벌써부터 입 꼬리를 들썩였다.
다이이치와 다카기의 약진이 내년에도 계속된다면 대회 흥행은 확실, 이번 고시엔은 97만 명을 기록했지만 내년에는 100만을 넘길 거란 확신을 얻었다.
‘이제 다른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
타카코 선생님이 이끄는 응원군단은 다카기의 매력에 완전히 넘어갔다.
그건 모토즈미 스즈에도 마찬가지, 예전부터 눈 여겨 봤지만 이번 대회에서 저 남자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거란 확신을 얻었다.
‘절대 안 뺏겨’
경쟁자들이 많다는 게 문제지만 그게 뭐 대수겠는가. 군계일학이라고 멋진 여자는 경쟁자 속에서도 매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문제는 다가갈 수 있는 계기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독기를 품었다.
“너무 적을 많이 만든 거 아니냐?”
“적을 만들어야 저도 방심하지 않고 노력을 하죠. 아닌가요?”
한편, 후루타 감독은 시상을 마친 제자에게 애정 어린 조언을 건넸다. 하지만 다카기는 이것도 재치 있게 받아쳤고 후루타 감독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