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용병선언 - (10)
‘긴장이 풀리니까 신호가 ··· ’
이곳은 고시엔 구장 외야석,
다이이치 고교와 연습게임을 치렀던 도우묘 고교 야구 클럽도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방금 전까진 괜찮았는데 다이이치가 앞서나가면서 긴장이 풀린 탓일까, 캡틴 마이타케 카즈노리는 다리를 배배 꼬며 식은땀을 흘렸다.
“야, 어디 가?!!”
“화장실!!”
오늘따라 붐비는 외야석, 마이타케는 좁은 길을 지나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모든 것을 내려놨다.
‘별 일 없겠지? 없었을 거야.’
발등의 불이 꺼지자 온 신경을 귀에 집중시켰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4만 관중이 가만히 있겠는가. 가벼운 마음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몰래 마시고 가야지.’
비웠으니 다시 채우는 건 인간의 본성, 마침 목이 말랐던 마이타케는 매점 앞에 늘어선 줄에 자리를 잡았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다이이치의 선전은 기쁜 일이지만 왠지 마음이 복잡했다.
앞으로도 계속 연습경기를 치르기로 했지만 스파링 상대도 수준이 맞아야 되는 거 아닌가. 우리도 수준을 높여야 할 텐데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와아아 ~ !!”
“뭐야? 또 쳤어?!!”
때마침 구장을 뒤흔드는 환호성, 매점 앞에 몰린 인파는 하나 둘 TV 앞에 모여들었다.
“저 친구는 쳤다 하면 안타네.”
“이러다 9할까지 가는 거 아냐?”
1회 초 첫 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한 다카기는 두 번째 타석에서도 깨끗한 안타를 만들어 냈다. 보는 입장에선 그저 경이로울 뿐, 마이타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아니야. 이건 뭔가 아니야.’
다이이치 야구부는 실전에서 경험을 쌓으며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한가롭게 주스나 마시고 있다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이타케는 뭔가 잘못 됐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관중석으로 이동, 심각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야,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아파?”
“ ···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
“뭐?!! 잘 안 들려!!”
관중의 환호 때문에 부원들과 제대로 된 의사소통은 불가능, 그래도 마이타케는 목이 터져라 목소리를 높였다.
“이대로 괜찮겠냐고?!! 스파링 상대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거잖아!!”
부원들은 침묵에 빠졌다.
다이이치가 여기서 고시엔 우승을 차지하면 연습경기 파트너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우리처럼 수준 낮은 야구 클럽을 언제까지 상대해 줄까? 적어도 5 ~ 6라운드는 버텨줘야지, 1라운드에 TKO를 당할 순 없었다.
“맞아, 거기까진 생각을 안 해봤네.”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
도우묘 야구 클럽은 비교적 한가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방법을 두고 논의를 거듭했다.
* * *
“자 ··· 이렇게 승부가 기울어지나요.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이이치가 역시 강하네요. 여기까지 올라 온 게 우연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이이치는 어느덧 정상에 훌쩍 다가섰다.
오늘 경기 전까지, 다이이치 타선은 고시엔 본선에서 경기당 3.5점을 기록했다. 6점에 가까웠던 지역예선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하락, 하지만 결승전에서 다시 살아났다.
여기에 단단한 마운드는 건재, 오늘 3득점을 책임진 다카기는 벤치에서 동료들과 승리의 세리머니를 주고받았다.
“선배는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죠?”
“왜 나한테 시비야?”
이 와중에도 사나에 선배의 심기를 건드렸다.
여장부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눈물이 많은 사람, 우승을 해도 이게 마지막이라는 서러움이 터져 나오는 건 거의 확실했다.
“솔직하게 말해요. 이 경기가 연장 18회까지 가길 원하죠?”
“얘가 누구 말려 죽일 일 있나.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그럼 약속해요. 우리가 우승해도 울기 없기.”
“흥 ~ 누가 언제 울었다고 그래?”
사나에는 뽀로통한 얼굴로 돌아섰다. 눈만 감으면 뭐가 찔끔 흘러나올 정도로 예민해져 있지만, 후배 앞에서 또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얘가 이젠 날 가지고 노네.’
학기 초만 해도 주도권은 분명 사나에가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후배가 날 잡고 흔드는 느낌, 그래도 기분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나에게 치근덕거리는 동생을 상대하는 기분? 날 그만큼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한편으론 기뻤다.
‘정신 차리자.’
입을 꾹 다물고 눈은 부릅떴다. 지난 3년 동안 간절히 바랐던 순간, 야구부의 군기반장이자 실세로서 중심을 지켰다.
‘이 경기의 마침표는 내가 찍는다.’
경기는 흘러 8회 말, 후루타 감독은 요시다를 마운드에 올렸다.
요시다는 지금까지 선발과 중간계투를 오가며 9경기(지역예선 포함)를 소화, 4승 무패 평균자책점 0.96이라는 놀라운 투구를 선보이고 있다.
내용만 따지면 MVP급 활약, 하지만 여론의 관심이 다카기에게 집중됐으니 조금 더 분발해야겠다는 의욕을 불태웠다.
‘땅볼은 절대 안 돼. 삼진으로’
땅볼을 유도하면 다카기가 눈에 띌 기회를 제공할 뿐, 145km를 넘나드는 구위로 윽박질렀다.
깡 ~ !
하지만 첫 타석부터 유격수 땅볼이 나왔다.
빠른 공이라도 일정하게 던지면 타이밍이 읽히는 법, 완급조절 능력이 떨어지는 요시다는 본선에서 내야수의 신세를 지는 일이 잦아졌다.
‘내년에 캡틴 될 사람이 좀 잘해보십쇼.’
팀 동료지만 다카기는 요시다를 높게 평가하진 않았다.
분명 빠른 공은 도내에서 손꼽히는 수준, 하지만 그것뿐이다.
지역예선에선 압도적인 투구를 펼쳤지만, 본선에선 맞아나가는 타구 비율이 확실히 높아졌다. 냉정히 따지면 운이 좋았던 편, 다음 대회에서 이시다 캡틴만큼 안정성을 발휘해 줄 수 있을까.
다카기는 그 질문에 일단 물음표를 붙여뒀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내가 더 낫지.’
타격, 수비, 주루, 투구, 내가 저 사람보다 떨어지는 게 뭐가 있나.
본인은 아직 인정을 못하는 것 같은데 인정을 하든 말든 내가 더 낫다는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다.
까앙 ~ !
“다시 한 번 유격수 ··· 잡아서 1루에 ~ !! 아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수비!! 고시엔은 다카기 선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맨손으로 타구를 잡았는데,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청소년대회가 남아있거든요.”
메이저리거 급 플레이에 관중석은 발칵 뒤집혔다.
일반적으로 땅볼을 처리할 땐, 글러브를 낀 손과 앞으로 나가는 발의 방향이 일치해야 한다.
이래야 송구에 힘을 실어줄 수 있고 정확도도 높아지지만, 아무래도 동작이 하나 추가 되다보니 송구가 늦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급하니까 생략해’
하지만 다카기는 맨 손으로 공을 잡아 그대로 1루에 던져버렸다.
불안정한 자세에서 던지기 때문에 강한 어깨와 균형 감각이 받쳐줘야 가능한 플레이, 프로선수도 하기 어려운 플레이는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조금 아프지만 태연한 척’
남자는 멋짐이 생명, 오른손이 심하게 쓰렸지만 팔짱을 낀 채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유지했다.
‘그건 제가 하나 양보하죠.’
다음 타구는 사토 선배에게 넘겼다.
혼자 다 해먹는 게 양심에 찔려서가 아니라, 오른손을 타고 흐르는 전기가 아직 가라앉질 않았다.
“너 왜 그런 짓을 했어?”
“그냥 보내는 게 나았다는 거예요?”
사나에는 벤치로 돌아온 다카기를 꾸짖었다.
5대 1이면 안심할 수 없는 점수 차지만, 그렇다고 부상위험이 높은 맨 손 캐치까지 해야 했을까? 하지만 다카기는 잘못한 거 없다며 근심 어린 걱정을 물리쳤다.
‘나도 이젠 통제가 안 되네. 아니, 누구도 못 말린다는 게 정확하겠지.’
다나카 코치도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저 녀석의 운동 신경, 기술, 야구 지능은 이미 감독과 코치가 컨트롤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코치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켜보는 것 뿐, 후루타 감독도 같은 생각이었다.
“5대 1은 불안하니까 한 점 더 가죠.”
9회 초,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을 앞둔 다카기는 동료들을 독려했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건 선배들이 할 일이지만, 고시엔에서 거둔 성과와 자신감은 애송이를 지휘자로 만들었다.
3학년이 은퇴하면 그 자리를 대체해야 할 2학년 입장에선 바람직하지 않은 일, 위기를 느낀 요시다는 타석에서 분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본업이 투수라고 해도 본선에서 17타수 4안타는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 이번 대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타석, 땅볼을 때렸지만 죽기 살기로 1루로 돌진했다.
“아웃!!”
“이게 아웃이라고요?!!”
흥분한 요시다는 1루심과 의미 없는 언쟁을 벌였다.
잔칫상은 차려졌고 이제 먹기만 하면 되는데 숟가락을 던지다니, 벤치에서 튀어나온 다나카 코치는 요시다의 팔을 잡아끌었다.
항의가 허용되지 않는 고시엔에서 퇴장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행위,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다보니까 흥분한 겁니다.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하하 ~ 알겠습니다.”
다행히 1루심은 이해해주는 분위기, 다나카 코치는 요시다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2학년이라는 놈이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고시엔 우승이 확정 되도 잔소리를 생략할 생각은 없었다.
“9회 말은 다카기 네가 나가라.”
“예”
후루타 감독도 실망한건 마찬가지, 요시다를 벤치에 앉혔다.
이시다가 은퇴하면 저 녀석에게 캡틴을 맡길 생각이었는데, 저렇게 경솔히 행동한다면 생각을 다시 해봐야 했다.
‘하아 ~ 내가 왜 그랬지?’
요시다는 그제야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고시엔 우승을 앞두고 있지만 이시다 캡틴은 굳은 표정으로 전방을 응시, 후배의 추태에 실망한 게 분명했다.
“자!! 마지막이다!! 이제 다 왔어!!”
성과 없이 끝난 9회 초 공격, 이시다는 박수를 치며 분위기 전환에 나섰다. 마운드에는 다카기, 여름동안 절대적인 믿음을 준 녀석이라 의심 따윈 하지 않았다.
“들어갑니다!! 144km!! 꿈틀거리며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합니다!!”
“다카기 선수를 축구 선수로 비유하면 공격수와 수비수, 골키퍼를 혼자서 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또 잘 해내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안타깝다는 생각도 드네요.”
해설위원은 자기도 모르게 아쉬움을 표했다.
선수층이 얇은 다이이치가 아니라 개개인의 역할이 분담된 야구부에서 뛰었다면,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팀 사정에 따라 여기저기 굴려 다니다 이도 저도 아닌 선수가 되는 건 아닌지, 장래가 촉망되는 선수라 뭔가 안타까웠다.
그 사이 다카기는 선두 타자를 좌익수 플라이, 후속 타자는 1루 땅볼로 처리하며 대망의 첫 고시엔 우승을 눈앞에 뒀다.
‘마지막까지 완벽해야 돼.’
1학년이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임한 대회, 승리를 앞두고 주인공을 비웃으며 히죽거리는 삼류 악당처럼 굴지 않았다.
까앙 ~ !
“3루수 잡아서!! 1루에!! 이렇게 경기가 마무리 됩니다!! 2017년 나츠의 최종승자는 다이이치!!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막을 열리는 순간입니다!!”
“이름에 걸맞은 여름이네요. 이제 정말 다이이치(第一)가 된 것 같습니다.”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다카기는 정면에서 달려오는 시노자키 포수와 격한 포옹을 주고받았다.
그 다음은 3루수 쿠로다의 방문, 지역예선에서 본선까지 무려 14타점을 올렸다.
본래 주전 3루수였던 이토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채워주는 활약, 그래도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뜨거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내가 정말 이토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까?
짊어진 부담이 컸던 만큼 결과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