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용병선언 - (9)
쉴 새 없이 달려온 여름, 다이이치 야구부는 고시엔 우승 마지막 관문에 이르렀다.
상대 팀은 도쿠시마 현(시코쿠)의 하타세미 고교, 최근 20년 동안 생산인구가 1000만이나 줄어든 일본은 외국인 노동자를 적극 수용해 왔다.
본토 사정도 이런데, 사국(死國)이라 불리는 시코쿠 사정은 어떻겠는가.
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들자 하타세미 고교는 외국인 학생을 적극 수용, 특히 중국인 학생이 많은 탓에 자민당이 텃밭을 이루고 있는 시코쿠에서 고운 시선을 받지 못했다.
[외국인에게 고시엔 우승을 내 줄 수 없다!!]
[다이이치가 우승해야 한다!!]
익명 뒤에 숨은 자들은 하타세미를 타도 대상으로 규정, 하지만 끈끈한 유대 관계로 뭉친 하타세미 야구부는 헛소리에 흔들리지 않았다.
“우승해서 돌아가자!! 우리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오우 ~ !!”
야구부 캡틴, 호사카 미후네는 대기실에서 동료들과 필승을 다짐했다.
호사카는 여기서 나고 자란 순혈 일본인이지만 국적이니 핏줄이니 따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도쿠시마 현은 신분에 따라 조성된 마을 구조가 지금도 남아 있다. 대놓고 내색은 안 하지만, 주거 지역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문화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나마 젊은 사람들은 이런 의식에서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 윗세대가 문제, 사람이 없어서 경제가 안 돌아가고 마을이 없어지는 시대에 차별이 웬 말인가. 호사카는 생각이 덜 자란 윗세대의 목소리에 코웃음을 쳤다.
‘중국인이 싫어? 그럼 너희들이 열 명분 일을 하던가. 열 명은커녕 반푼이 노릇도 못하는 주제에’
그 어느 전문가도 하타세미 야구부의 고시엔 결승 진출은 예상 못했다.
결승전까지 올라온 것도 대단한 업적, 우리는 이렇게 성과를 내는데 넷상에서 입만 놀려대는 바보들은 분명 잘난 인간들이겠지? 호사카는 너희들보단 우리가 훨씬 낫다는 걸 이번 기회에 과시하고 싶었다.
“비극이든 희극이든 오늘로 끝난다.”
한편, 다이이치 야구부도 대기실에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만큼 충격은 커지기 마련, 이제 와서 떨어지기엔 너무 높은 곳까지 와 버렸다.
절대 질 수 없다는 각오는 상대팀도 마찬가지겠지, 몇 몇 학생들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무리수를 던졌다.
“다른 건 몰라도 중국인들한테 질 순 없지.”
“그래, 이건 일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가만히 듣고 있던 다카기는 코웃음을 쳤다.
저렇게 저렴한 어휘가 간사이(關西) 최고 명문고교를 자랑하는 다이이치 학생들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자기들끼리 한 말이라 감독님도 코치님도 듣지 못한 것 같은데, 다카기는 저런 놈들과 한 집단에 있다는 걸 수치스럽게 여겼다.
‘반푼이도 못 되는 것들이 ··· ’
한두 명을 제외하면 스타팅 멤버에 끼지도 못한 것들이 저런 말을 하고 있다.
경기도 못 나가면서 승패를 논하다니, 가소로워서 상대도 하기 싫었다.
* * *
“자, 1회 초 다이이치의 선공으로 결승전의 막이 오릅니다. 선두 타자는 다카기 하루요시 선수, 이번 대회에서 타율 0.800, 홈런 2개, 6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죠. 이 선수의 대단함은 보고 느끼면 됩니다.”
드디어 시작된 결승전, 선두타자로 나선 다카기는 일단 상대의 내야위치를 확인했다.
‘내가 번트는 안 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연일 무력시위를 하고 있으니 야수들이 경계를 할만도 하겠지, 일단 페이크 번트로 흔들어줬다.
사소한 몸짓 하나에도 격하게 반응하는 적 진영, 목적을 이룬 다카기는 태연하게 자세를 고쳐 잡았다.
‘여기서 물러나면 치욕이다.’
마운드를 지키는 호사카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겨우 페이크 번트에 호들갑을 떨다니, 다카기는 고시엔에서 8할을 치고 있는 선수다. 의식을 안 한다면 거짓말이지만 속마음을 들킨 건 부끄러운 일,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 정면 돌파를 택했다.
“음 ··· 다시 볼입니다. 지금 볼만 3개를 던지고 있는데, 호사카 선수가 뭔가 압박을 받는 걸까요?”
“글쎄요. 여기까지 올라온 학생들의 투지를 생각하면 실례되는 말이겠지만, 역시 결승전이라는 무게는 무시할 수 없거든요. 이겨내는 건 본인의 몫입니다.”
호사카는 긴장한 얼굴을 오른손으로 쓸어내렸다.
땀이 흐를 만큼 공을 많이 던진 것도 아닌데, 상대를 너무 의식하느라 자기 공을 던지지 못했다.
‘나도 그 기분 알지.’
한편, 관중석에 앉은 한 소년은 호사카를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정체는 다이이치를 상대로 호투를 펼친 가나가와의 에이스 마이키 요시토모, 탈락했으니 도쿄로 돌아가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부원들과 함께 여름의 끝을 지켜봤다.
“지금 들어가면 맞는다.”
“네?”
경기에 집중하던 후배들은 선배의 혼잣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좌중간에 떨어지는 안타, 예지력이라도 발휘하신 걸까? 후배들은 선배를 경의의 눈으로 바라봤다.
“선배, 어떻게 아셨어요?”
“그야 ··· 저 자식한테 많이 당해봤으니까.”
솔직담백한 고백에 부원들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7이닝 2실점이면 못 던진 게 아닌데, 마이키 선배는 다카기를 봉쇄하지 못해 역전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아무리 고교 야구라도 8할 타자라니, 이게 가능한 수치인가? 부원들은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다.
“선배는 저 자식이 야구를 잘하는 이유를 아세요?”
“모르겠어. 어쨌든 어중간한 실력으로 덤빌 상대가 아니라는 건 분명해”
그 날, 마이키는 다카기를 상대로 실투를 거의 던지지 않았다.
원하는 곳에 던졌는데 안타를 맞다니, 우연이라 할 수 없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을 곱씹으며 나름대로 원인을 찾았다.
‘내 단점은 다양한 공을 던질 줄 모른다는 거야.’
그 날도 스트라이크 존 구석을 찌르는 제구는 흔들리지 않았다.
힘과 기술이 떨어지는 아마추어라면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일정한 구속으로 같은 곳을 찌르는 패턴은 한계에 부딪쳤다.
“100개를 던지면 100개가 전부 다르게 보인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구종을 다 끌어 모아도 20개는 안 될 거다.
그런데 던지는 공이 타자 눈에 전부 다르게 보인다니, 이건 완급조절이 그만큼 뛰어다나는 걸 의미한다.
나는 그 레벨에 올라 설 수 있을까? 그날의 패배는 치욕적이었지만, 덕분에 마이키는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았다.
‘저런 공으로는 못 잡아. 내가 아주 잘 알지.’
다카기는 제구가 된 공도 안타를 만들어내는 괴물, 나보다 기량이 떨어지는 호사카가 저 녀석을 잡을 수 있을까?
예지력을 발휘한 게 아니라 이런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
“저 자식 잘 봐둬라, 내년에도 너희들 앞을 막아설 벽이니까.”
선배의 충고에 가나가와 부원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일본 고교 최강의 에이스라 불리는 마이키 선배가 두들겨 맞다니, 상상도 해 본 적 없다. 그런데 우리가 저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 패배보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게 더 분했다.
‘또?!!’
그 사이, 호사카는 이시다에게 안타를 허용했다(무사 주자 1, 2루).
움츠러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스트라이크를 넣었는데 초구를 통타당할 줄이야, 도망갈 곳이 없어지면서 심적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적은 우릴 기다려주지 않는 법, 서둘러 정신을 수습했다.
‘이걸 어떻게 풀어야 되나.’
한편, 다이이치의 3번 타자 쿠로다는 숙제를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이번 고시엔에서 한 경기 희생플라이 3회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쿠로다는 본래 땅볼 생산에 특화된 선수다.
그렇다고 외야진을 저렇게 끌어내리다니, 이럴 땐 공을 띄우는 게 최선이지만 요행이 반복되길 바라진 않았다.
‘난 볼을 굴려야 결과가 좋아. 내 방식대로 풀자.’
마음을 정리하고 맞이한 타석,
초구부터 낮게 떨어지는 공이 들어오자 쿠로다는 체크 스윙을 했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너무 긴장하셨나?’
상황을 살피던 2루 주자 다카기는 3루로 뛰었다.
무사 주자 1, 2루라 보내기 번트가 나올 줄 알았나본데, 히타세미의 3루수는 무작정 전진 스텝을 밟다 3루를 비우고 말았다.
급히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이런 상황에서 포수가 어떻게 송구를 하나, 다카기는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3루를 접수, 동료의 어이없는 실책에 쿠리하라 포수는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괜찮아. 신경 쓸 것 없어.”
이 와중에도 호사카는 동료들을 위로했다.
3루수 리(李) 죠케이는 중국에서 넘어온 히키아게샤(타국에서 머물다 일본으로 돌아온 사람)의 후손이다.
그렇잖아도 쓰레기들이 인신공격을 퍼붓고 있는데, 내가 저 녀석을 끌어안지 않으면 누가 안아주겠는가.
호사카는 캡틴으로서 넓은 마음을 베풀었다.
“오늘 참 덥지?”
이때 죠케이는 다카기의 기습질문을 받았다. 그냥 평범한 인사, 받아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실책을 저지른 대역죄인은 답을 거부했다.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 이제 마지막이니까 우리 함께 즐겨보자고”
하지만 질문공세는 계속됐다. 우린 진지한데 놀이라니, 그 정도로 우승할 여유가 있다는 건가? 자극을 받은 죠케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너 인터뷰 하는 거 봤어. 지역예선 베스트 나인에도 뽑혔잖아.”
“아 ··· 진짜 ··· 좀 조용히 할 수 없냐?”
“왜 그렇게 화를 내? 내가 그렇게 싫어? 열 내지 마. 3루를 비운 건 너잖아. 난 정당하게 이 자리를 차지했을 뿐이라고”
죠케이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날 자극하고 놀리려는 게 분명, 다시는 놀아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번엔 자리 비우지 마라. 이시이 선배는 밀어치는 성향이 있거든, 나라면 절대 안 움직일 거야.”
오지랖도 유분수지 이젠 훈수까지 두고 있다. 정말 짜증나는 자식, 죠케이의 반응을 살피던 다카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짜증 좀 났겠지? 그럼 됐어.’
녀석이 중국의 피를 이었다고 비웃을 생각은 없었다.
나도 한국의 피를 이었는데 이 자식을 비하할 자격이 있을까, 하지만 이건 냉정한 승부의 세계. 속을 살살 긁어주며 붕괴를 유도했다.
까앙 ~ !
때맞춰 나온 희생플라이,
다카기는 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홈으로 향했다. 화는 나는데 내색은 못하겠고, 죠케이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그냥 인사 좀 나눈 거예요.”
다나카 코치는 걱정되는 마음으로 다카기를 붙잡았다.
그렇잖아도 집중 견제를 받는 입장인데, 쓸데없는 말로 빈볼을 부르는 건 아닌지, 하지만 다카기는 맞고 나가면 도루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냥 놔두게”
“하지만 감독님, 저런 행동은 별로 좋을 게 ··· ”
“상대를 자극하는 것도 기술이야. 인정해 줘야지.”
후루타 감독은 이제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다.
일단 나가면 어떻게든 홈으로 들어오는 녀석, 실력도 대단하지만 상대를 자극하는 기술까지 갖췄다.
감독 입장에선 경기를 편안하게 해주는 녀석, 미워할 수가 없었다.
“3루를 노려야 돼요. 저 자식 지금 흥분해서 대응이 안 될 걸요?”
“그래?”
아니나 다를까 다카기는 동료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를 제공했다.
그렇잖아도 3루는 강습타구가 많이 나오는 자리, 냉정을 잃은 죠케이는 내야의 구멍으로 전락했다.
다이이치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1회에만 3점을 추가, 오늘도 산뜻한 출발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