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39화 (39/361)

39화. 용병선언 - (8)

“자, 이제 타석에는 다카기 하루요시 선수입니다. 오늘 2타수 1안타, 첫 타석에서 선취점의 발판이 되는 2루타를 기록했습니다.”

“지금은 주자가 2루에 있기 때문에, 타카노리 선수가 승부에 어려움을 겪겠네요.”

첫 경기에서 가나가와라는 대물을 낚은 다이이치는 순조로운 항해를 이어갔다.

다음 경기 상대는 야마나시 현의 호세이 대학 제2고등학교, 아시아선수 역사상 첫 MLB 무대를 밟은 무라카미 시게토시의 모교이다.

그만큼 야구명문으로 명성이 높지만, 물이 오른 다이이치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네가 힘이 부족하다고? 이런 거짓말쟁이’

호세이의 선발투수 타카노리는 포수와 신중히 사인을 주고받았다.

힘이 부족하다는 자식이 첫 타석부터 바깥 쪽 공을 밀어 쳐 2루타를 만들어 내나, 잘난 놈이 자기 얼굴 마음에 안 든다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과 뭐가 다른가,

철저하게 도망가는 피칭을 택했다.

까앙 ~ !!

“밀어낸 타구가 우중간으로 향합니다!!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옵니다!! 다카기 선수의 연타석 2루타!! 다이이치가 다시 한 점 달아납니다!!”

“지금은 못 던진 공이 아닌데, 이 한방은 타카노리 선수에게 충격이 크겠네요.”

앞다리가 무너졌는데 이런 타구가 나와도 되는 건가.

기술이 아니라 힘으로 만든 2루타, 여기에 긴 팔과 유연성까지 갖춰 스트라이크 존에서 벗어나는 공도 걷어내고 있다.

투수 입장에선 상대하기 정말 싫은 유형, 자존심이 상한 타카노리는 2루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홈런은 의식하지 말자.’

다카기는 2루에서 배부른 푸념을 늘어놨다.

아직 젖비린내 나는 고교야구의 한계일까. 만화처럼 스트라이크 존을 분할해서 던지는 투수는 만나지 못했다.

지금까지 상대해 본 선수 중, 가장 제구가 정교했던 선수는 가나가와의 마이키, 그래도 한계는 명확했다.

아웃코스는 일정하게 던질 수 있지만 나머지는 미지수, 거기다 슬라이더가 주무기라 낮게 들어오는 공은 많지 않았다. 초일류 고교의 에이스도 이 정도 수준인데, 다른 고교 사정은 어떻겠는가.

실력의 격차를 느끼면 도망치기 마련, 이런 투수들을 상대론 정확하게 치는 게 나았다.

‘대학 선수들은 이것보다 더 뛰어나겠지?’

고시엔에서 거둔 성과에 자신감을 얻은 걸까. 다카기는 이제 한 단계 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호세이 고교는 대학을 빼놓고 언급할 수 없다.

호세이 대학은 도쿄 야구 6연맹의 일원, 그 중에서도 44회 우승이라는 독보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다.

대학 진학은 아직 먼 일이지만 호세이에 약간 흥미를 느꼈다.

‘훗날 날 찾도록 해주겠어.’

요즘은 대학도 선수 모셔가기 경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학생이 알아서 찾아가는 콧대 높은 대학도 있기 마련, 도쿄 최강을 자랑하는 호세이가 날 찾는다면 그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또 있을까?

진학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다카기는 내 가치가 그만큼 높다는 걸 확신할 증거가 필요했다.

‘도망칠 거면 확실하게 해라.’

경기는 흘러 8회 말 다이이치의 공격, 다카기는 4번 째 타석을 맞이했다.

현재 스코어는 4대 2, 호세이 입장에선 경기를 포기하긴 이르다. 그렇다고 연타석 2루타를 날린 선수를 상대로 정면에서 대들긴 어렵겠지, 도망쳐도 좋지만 할 거면 제대로 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다시 밖으로,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이런 비유가 맞을지 모르겠지만, 다카기 선수는 꼭 외국인 선수 같습니다. 투수들이 도망치기 바쁘거든요.”

까앙 ~ !!

“말씀 드리는 사이 높게 솟은 타구!! 이번에는 우중간에 떨어집니다!! 2루 주자는 홈으로!! 타자주자는 2루까지 들어갑니다!! 스코어 5대 2!! 승부의 추가 점점 기울고 있습니다!!”

오늘 경기 장타만 3개 째,

이게 인터뷰에서 힘을 싣는 기술이 부족하다는 엄살을 떤 선수의 활약인가? 궤변의 희생양이 된 호세이 야구부는 말없이 울분을 삼켰다.

‘뭐 ··· 이젠 놀랍지도 않다.’

다이이치의 후루타 감독은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활약도 적당히 해야지 매 경기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녀석, 이젠 당연한 일이라 별 감흥이 없었다.

“우리 오늘 뭐 먹어요?”

여유를 얻은 다카기는 저녁밥 안부를 물었다.

경비를 관리하는 건 매니저 몫, 고시엔 결승까지 바라보는 사나에는 허리띠를 졸라맸지만 다카기는 반찬투정을 부렸다.

“쓰고 다시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얘가 미쳤어. 그걸 어떻게 다 써?”

“매일 그렇게 먹고 어떻게 힘을 써요?”

“힘 잘 쓰면서 뭘 ··· ”

“쳇 ~ 구두쇠”

사나에가 핏대를 세웠지만 다카기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응원단 지원에 들이는 돈만 여기로 돌려도 식사 레벨이 달라질 텐데 이게 뭐하는 짓인지, 할아버지가 용돈으로 쓰라고 준 저금통을 깨버렸다.

“제가 쏠 테니까 오늘은 고기 먹어요.”

“너한테 그런 돈이 어디에 있다고 그래?”

“오늘은 제가 저녁 삽니다!!”

매니저 선배가 뭐라 하든 말든 시원하게 저질러 버렸다. 갑자기 고기를 먹자니, 선배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믿는 구석이 있는 다카기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이것만 끝나면 밥이다.’

배고픈 맹수만큼 사나운 게 또 있을까.

9회 초, 마운드에 오른 다카기는 남은 힘을 쥐어짜냈다. 공복에 하는 운동이 효과가 좋다는 말도 있지만, 여름방학 동안 쉴 새 없이 몸을 굴린 사람에겐 의미 없는 말장난이다.

악만 남은 공에 타자들은 추풍낙엽. 패자들이 고시엔 흙을 쓸어 담으며 훗날을 기약하는 동안, 다카기는 관심과 주목을 누렸다.

“다카기 선수, 분명 힘을 싣는 기술이 아직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글쎄요. 제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오늘 경기에서 한 단계 더 성장했다는 뜻이겠죠.”

여유 있는 표정과 말솜씨는 여전, 이때 한 기자가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

“오늘 하마다 해설위원께서 다카기 선수를 두고 외국인 선수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람의 생각은 역시 비슷한 건가. 얼마 전 동료들에게 비슷한 말을 들은 다카기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렇잖아도 선배들이 외국인 선수 같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하하 ~ 그렇습니까? 그 별명이 마음에 드시나요?”

“글쎄요. 답을 하기가 조금 애매하네요.”

외국인 선수는 팀 성적을 위해 존재한다.

그럼 비외국인 선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본질을 따져보면 둘 다 팀 성적을 위해 존재하고 필요가 없으면 버림받는다.

다카기는 그런 기준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굳이 따지고 들겠다면 사람들을 납득시킬 답을 가지고 있었다.

“외국인과 비외국인 선수는 같은 입장이지만, 사람들에게 받는 기대치는 다릅니다. 제가 외국인 선수 같다는 건 그만큼 기대치가 높아졌다는 뜻이겠죠. 그러다 버림받으면 좀 씁쓸하겠지만, 상관없습니다. 필요 없으면 버림받는 건 세상의 이치니까요.”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명문고 학생이라 생각의 깊이가 다른 건가. 더 많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다카기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지금 배가 고프거든요. 더 질문 받으면 짜증 낼 것 같으니까 그만하시죠.”

“하하 ~ 알겠습니다.”

그렇게 끝난 인터뷰, 예고대로 다카기는 저녁을 사려 했지만 동료들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40명이 넘는 인원이 고기를 먹는데 그 돈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 건지, 고시엔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야구부가 먹튀를 한다면 얼마나 기가 찰 일인가.

뭣보다 다카기가 평소 돈 있는 척을 했던 것도 아니라, 다들 앞으로 나서질 않았다.

‘다들 속고만 사셨나.’

한 턱 쏜다는 반응이 이러면 맥이 빠질 일,

하지만 다카기는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내가 사회적으로 명성이 있고 그만한 수입원이 있다면 다들 의심하지 않고 따라나섰겠지. 지금 내가 의지하는 건 할아버지가 준 용돈 뿐, 왠지 나 자신이 초라해보였다.

‘결국 나는 아직 애송이라는 거네.’

고시엔에서 이름을 날렸어도 아직 신분은 학생, 갈 길이 멀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알았어요. 관둘 게요.”

“훗 ~ 역시 농담이었지?”

“아니요. 다들 절 못 믿으시는 것 같은데, 상관없어요. 나중에 제가 성공하면 선배들 반응도 달라지겠죠.”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나. 그제야 선배들은 뭔가 잘못 됐다는 걸 깨달았지만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 * *

‘투자를 해야 하나.’

한편, 고영길은 기부금 투척을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다이이치가 고시엔에서 좋은 활약을 하고 있지만, 이 기세가 앞으로도 이어지려면 투자가 필요했다.

‘투지? 야구에 대한 애정? 그런 건 다 부수적인 것들이지.’

야구협회 교토본부회장을 지냈으니, 고교야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훤히 꿰고 있다.

강팀이 되기 위한 조건은 뭔가. 이런 저런 요건을 다 갖춰도 돈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

요즘 야구 명문고가 연습장을 두 세 개 씩 짓고 전문 스카우터, 전력분석 팀까지 두는 건 돈 낭비인가? 길게 보면 B 클래스의 반란은 일시적인 돌풍에 불과, 결국 A 클래스가 제 자리를 찾아간다.

게다가 다이이치는 전국의 수재들이 모이는 만큼, 운동에 재능 있는 학생들이 모여들기 어려운 구조다. 3학년이 은퇴하면 전력 충원에 애를 먹겠지, 내년에도 돌풍이 계속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이기는 경기를 해야지. 그렇고말고’

고영길은 손자가 매번 지역예선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멋진 패자라고 해봤자 패자일 뿐, 기왕 하는 운동이라면 이기는 게임을 하도록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개입하는 건 룰 위반인데’

그렇다고 제 3자가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있는가.

기부금은 어디까지나 학교 발전을 위한 성의 표현이다. 돈을 무기로 간섭한다면 그것만큼 꼴불견도 없겠지, 아무리 돈이 많고 손자가 귀여워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지켰다.

‘돈을 내면 알아서 투자 하지 않을까?’

결국 익명으로 기부금을 내기로 했고, 예상 밖의 지원에 놀란 다이이치 고교 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도대체 누군데 이 많은 돈을 기부한 건가?”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단, 학교의 발전에 보탬의 됐으면 하는 뜻을 전하셨습니다.”

졸업생들도 기부를 안 하기로 유명한데 도대체 누굴까. 어쨌든 목돈이 생긴 이사회는 투자를 두고 이런저런 방안을 논의했다.

“부활동에 투자하는 건 어떤가? 그 다카기라는 학생 말대로 요즘은 공부 잘하는 학생이 운동도 잘하는 시대 아닌가.”

이때 한 위원이 대안을 제시했다.

학업으로 유명한 우리 학교가 고시엔 돌풍을 일으키다니, 그 어느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거기다 다카기가 인터뷰에서 한 말 때문에, 다이이치는 운동과 공부를 겸비한 완전체들의 집합소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덕분에 학교 명성도 올라갔고, 이 돌풍이 일회성에서 끝나지 않으려면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난 동의 못하네.”

물론 반대 의견도 적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학업으로 명성을 이어왔는데 우연히 일어난 깜짝 이벤트에 돈을 투자하다니, 기부금을 낭비하는 짓이라며 반대했다.

“야구부가 학업을 게을리 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내가 알기론 다른 부활동보다 평균점수도 높은 걸로 알고 있는데 ··· ”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다이이치는 교칙에 일정 점수를 넘기지 못하면 부활동을 금지하는 조항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 야구부가 유지가 됐다는 건 학생들이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뜻, 지금 일으키고 있는 돌풍을 깜짝 이벤트라 폄하할 근거는 없었다.

“우리도 이젠 특기생을 받아야하네. 학교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바꾸면 지원하는 학생도 늘어나지 않겠나?”

“으음 ··· ”

다이이치 고교의 재학생은 다른 곳에 비해 적은 편이다.

비싼 등록금과 수업료로 버티고 있지만 학생 수가 매년 줄고 있는 흐름을 따져보면 개혁은 불가피, 일단 여론의 관심을 끌고 있는 야구부에 투자를 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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