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38화 (38/361)

38화. 용병선언 - (7)

깡 ~ !

“높게 뜬 타구!! 중견수가 내려오면서 잡아냅니다!! 경기 종료!! 다이이치의 돌풍은 본선에서도 이어집니다!! 승리의 함성!! 그리고 ··· 패배의 눈물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좋은 경기였습니다. 이런 말이 위로가 될 진 모르겠지만, 모두 가슴을 폈으면 좋겠습니다.”

다이이치 야구부가 승리의 함성을 부르짖는 동안, 반대편에선 통곡이 흘러나왔다.

역전의 빌미를 제공한 미야기는 동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할 뿐, 무사 주자 만루에서 쿠라다에게 역전 희생타, 추가 적시타까지 쿄헤이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 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끝났다 ··· ’

7회까지 2실점 역투를 펼친 가나가와의 에이스 마이키 요시토모는 덤덤히 결과를 받아들었다.

남들은 평생 한 번도 맛보기 힘든 고시엔 우승, 마이키는 신입생 때 선배들과 그 영광을 맛 봤다. 하지만 그때는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고, 올해는 내 손으로 후배들에게 그 영광을 맛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미약했던 실력, 패배를 자기 탓으로 돌리는 후배들을 위로했다.

“너희들은 아직 기회가 있어. 여기서 무너지면 지는 거다.”

“선배 ··· ”

“울어도 괜찮아, 하지만 극복하지 못하면 영원한 패배자로 남을 뿐이지. 다시 일어서면 돼.”

동료들을 다독인 마이키는 그라운드에서 상대 팀에 예의를 갖췄다.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선택한 볼넷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이야, 동료들 앞에선 괜찮은 척 했지만 꾹 눌렀던 아쉬움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남들이 볼까 얼른 훔쳐 냈고, 후배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3학년 마지막 여름을 마무리 했다.

“감독님, 오늘 결과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죠.”

경기가 끝난 후, 가나가와의 무라사메 감독은 기자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다이이치의 경기는 훌륭했고 패배도 겸허히 받아들였지만, 3연속 볼넷을 물고 늘어지는 기자에겐 불쾌함을 느꼈다.

“다카기 선수가 2안타를 치고 이후에 볼넷만 3개를 얻어냈는데, 감독님이 직접 지시하신 겁니까?”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는 알겠습니다. 제가 그 선수의 재능을 인정하고 칭찬하길 바라시겠죠. 하지만 제가 진심으로 칭찬하고 싶은 건 우리 선수들입니다. 그 아이들도 자존심이 있는데 승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비겁해 보였을 수도 있지만, 누가 뭐래도 우리는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뿐입니다.”

무라사메 감독은 여기서 인터뷰를 끊었다. 내 입으로 적을 칭찬하다니, 패배했어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굽히진 않았다.

‘너희들과 마주할 면목이 없다.’

빳빳이 세운 고개는 제자들 앞에서 무너졌다.

명문 야구부의 지휘봉을 잡았다고 이런 비극을 안 겪었겠는가? 곱씹을수록 씁쓸함이 배어나오는 패배의 아픔, 여기서 제자들과 이별의 인사를 나누고 싶진 않았다.

“ ··· 도쿄로 돌아가면 다시 한 번 모이자.”

헤어지더라도 그동안의 추억이 물든 학교가 낫겠지, 학생들은 감독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은 끝났지만 하루라도 더 이 동료들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 * *

“이 기세로 우승까지 가자!!”

“오우 ~ !!”

한편, 다이이치 야구부는 대기실에서 미처 풀지 못한 여흥을 즐겼다.

도쿄 최강 가나가와를 꺾다니, 우승에 버금가는 성과 아닌가. 대기실 밖에서 감독님을 붙잡고 있는 기자들이 들을 수 있도록, 있는 힘껏 자신감을 내비쳤다.

“너 오늘 정말 고생 많았다.”

“뭐 ··· 제가 오늘은 힘 좀 썼죠.”

다카기는 캡틴의 격려를 장난으로 맞받아쳤다.

이 녀석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이시다도 딱히 부정은 하지 않았다.

“저는 됐으니까 저 분 좀 어떻게 해보세요.”

다카기의 손은 구석에서 울고 있는 사나에를 가리켰다. 평소 씩씩한 모습만 보여주던 매니저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승리의 기분에 들 떠 있던 학생들도 그 곁으로 몰려갔다.

“선배, 이겼는데 왜 우세요?”

“ ··· 불안해서 그래”

고시엔 진출도 꿈만 같은데 본선에서 가나가와 고교를 잡다니,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마법이 내일이라도 연기처럼 흩어지는 건 아닌지, 사나에는 벌써부터 패배를 염려했다.

“선배 보기보다 인생 답답하게 사시네요.”

“뭐?”

“한 번 삶을 얻었으면 언젠간 죽잖아요. 잠시 머물다 갈 이 세상, 즐길 건 즐기세요.”

다카기의 말에 분위기는 조용해졌다.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고 죽은 오다 노부나가, 하필이면 그 생을 대표하는 아츠모리를 인용할 줄이야, 우승을 앞두고 미끄러질 다이이치 야구부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아 ··· 이거 결승전 패배복선인가?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야!! 너!!”

“입 다물어!!”

사방에서 달려든 부원들은 다카기의 입을 봉인했다.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 순간 식은땀을 흘렸지만, 덕분에 사나에의 울음은 뚝 그쳤다. 통일을 앞두고 자만하다 부하의 배신으로 생을 마감한 영웅, 야구부의 군기반장답게 사나에는 부원들의 흐트러진 정신을 다잡았다.

“이 정도로 자만하면 안 돼. 고시엔 우승까지 아직 갈 길이 멀어, 다들 정신 바짝 차리자. 나도 이제부턴 눈물 안 보일 거야.”

“예 ~ ”

“목소리에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더 힘차게!!”

“예!!!!”

드디어 원상복귀 된 분위기, 마침 인터뷰를 마친 후루타 감독이 대기실에 입성했다.

“다카기, 너 나가봐라.”

“저요?”

6이닝 2실점 역투를 펼친 캡틴을 제쳐두고 날 먼저 부르다니, 순서가 약간 잘못 된 것 같지만 일단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다카기 선수, 일단 승리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오늘 집중견제를 받으면서도 팀 승리에 결정적인 활약을 하셨는데, 평정심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도 있는 겁니까?”

“글쎄요. 저는 오늘 제법 성급했다고 생각합니다만 ···”

볼넷을 3개나 얻어냈으니 누가 보면 침착했다고 느낄 만도 하다.

하지만 첫 두 타석에서 안타를 때려낸 다카기는 승부를 피하는 배터리에 초조함을 느꼈다.

배트가 따라 나오지 않은 건 투수가 노골적으로 승부를 피했기 때문, 조금 더 적극적으로 승부를 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지도 모른다는 답을 내놨다.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닙니까?”

“겸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직 보완해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부분이 말입니까?”

“오늘 두 번째 타석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몸 쪽 공이 들어와서 장타를 노렸는데 생각만큼 멀리 나가질 않았어요. 아직 힘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기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칫 약점을 드러낼 수도 있는 말인데 이렇게 공개해도 되는 건가? 하지만 다카기는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감춰봤자 언젠가는 드러날 약점이죠. 그리고 실전도 연습이나 다름없습니다. 투수들이 몸 쪽 공을 던져줘야 저도 대응할 방법을 찾고 성장하겠죠. 약점을 파고 들어준다면 저야 환영할 일입니다.”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거기까지 내다보고 발언을 할 줄이야.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 *

[오늘 아주 멋졌다.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자랑스럽긴요.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이날 밤, 다카기는 숙소에서 할아버지와 전화통화를 나눴다.

설마 직접 경기를 관전하셨을 줄이야. 지난 1년 동안 외부 활동이 없던 분이라 조금 놀랐다.

“이제 건강은 괜찮으신 거죠?”

[허허 ~ 그러니까 널 보러갔지, 오랜만에 아주 즐거웠다. 수명이 몇 년은 더 늘어난 것 같구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삶의 의욕을 잃었던 할아버지, 병도 분명 거기서 왔을 거다. 몸은 몰라도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겠지, 다카기는 그 속마음을 슬쩍 어루만졌다.

“이제 곧 할머니 기일이죠?”

[오 ~ 그걸 기억하고 있었냐?]

“당연하죠. 대회 끝나면 내려가려고요.]

[방학도 얼마 안 남았는데 쉬지도 못하고 ··· 피곤하면 안 와도 된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할머니가 절 얼마나 예뻐하셨는데요. 당연히 가야죠.”

[그래, 네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오늘 정말 좋아했을 텐데 ··· ]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의젓하게 자란 손자의 대견함 교차하는 순간, 고영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손자, 이 녀석이 가는 길을 좀 더 지켜봐야 나중에 만날 아내에게 해 줄 말이 있지 않을까? 오래 살아야겠다는 의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그 날은 머리도 단정하게 하고 갈게요.”

[하하 ~ 말이 나와서 말인데, 머리는 왜 그렇게 기른 거냐?]

“할아버지, 이 스타일 아무나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말총머리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어울림은 별개의 문제다.

스타일과 얼굴이 받쳐줘야 따라오는 멋짐, 곧 할머니 기일이라 단정히 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주위 사람들도 다 멋지다고 그러냐?]

“네, 특히 여자애들한테 호응이 좋아요.”

[하하 ~ 그래? 그럼 자르면 안 되지. 그냥 그대로 내려와라.]

완전히 업 된 할아버지의 기분, 목적을 이룬 다카기는 가벼운 마음으로 통화를 마쳤다.

‘축하전화인가.’

내려놓자마자 울리는 휴대폰 소리, 발신 번호를 확인한 다카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 엄마”

[우리 아들 오늘 수고 했어 ~ ♡]

오늘따라 애교가 넘치는 목소리, 상대가 애인도 아니고 아들 된 입장에선 약간 부담스러웠다.

[엄마가 왜 전화했는지 안 궁금해?]

“그야 고시엔에서 좋은 활약했으니까 그렇겠죠.”

[뿌우 ~ 틀렸어]

오늘 따라 왜 이렇게 기분이 업 되신 건지, 다카기는 일단 그 장단에 맞춰드렸지만 몇 번을 도전해도 어머니는 정답을 외치지 않았다.

“이제 그만 알려주세요. 저도 지치네요.”

[조만간 동생 생길거야.]

다카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동생이라니, 아들이 오사카로 유학을 간 사이 부모님은 그렇고 그런 일을 벌이셨단 말인가? 하지만 가슴 속에 휘몰아치는 감정은 당혹감이 아닌 기쁨이었다.

“코하루!! 걔 이름은 코하루예요!!”

다카기는 집에서 ‘하루’라고 불리고 있다. 내 동생이니 작은 하루라고 불리는 게 옳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어머니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코하루면 여자이름 아니니? 엄마는 아들 하나 더 낳았으면 좋겠는데 ]

“저는 여동생이 좋아요. 남동생이면 기쁨이 반감 돼서 싫어요.”

어머니는 여동생을 간절히 바라는 아들의 뜻에 굴복했다.

동생이 태어나도 이렇게 좋아하는데 나중에 결혼해서 자식을 보면 어떨지, 손자가 태어났을 때 누구보다 환한 미소를 짓던 시아버지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아버지도 엄마 임신한 거 아세요?”

[아직은 비밀로 하고 있어.]

“그건 ··· 뭔가 순서가 바뀐 거 아닌가요.”

다카기는 그건 예의가 아니라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버지가 나중에 알면 얼마나 서운하게 생각하실까, 못들은 걸로 할 테니 지금 당장 알려드리라며 통화를 마쳤다.

‘할아버지한테도 알려드려야지.’

아버지도 아직 모른다면 할아버지는 말 할 것도 없겠지. 핏줄이라면 끔찍하게 여기는 분이라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할아버지, 오래 사셔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네요.”

[응? 그게 무슨 소리냐?]

“방금 엄마하고 통화 나눴는데요. 조만간 손주 한 명 더 보실 것 같네요.”

손자가 고시엔에서 활약한 것도 기쁜데 손주가 하나 더 늘어날 줄이야, 연타석 홈런에 고영길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너무 기뻐서 심장마비가 재발할 지경,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라며 격한 기쁨을 표출했다.

[허허 ~ 너 결혼하는 것까지만 보고 죽으려고 했는데, 정말 오래 살아야겠구나.]

“이름은 제가 코하루라고 정했어요. 할아버지도 그렇게 알아두세요.”

손자의 당돌함에 고영길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비를 제쳐두고 제멋대로 이름을 짓다니, 그렇다고 들뜬 목소리에 훈수를 둘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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