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37화 (37/361)

37화. 용병선언 - (6)

‘길어지면 우리가 불리하다.’

이어지는 다이이치의 8회 초 공격, 후루타 감독은 제자들에게 적극적인 타격을 주문했다.

지금까진 대등한 경기를 하고 있지만 가나가와의 선수층은 다이이치의 2배 이상이다. 양 팀 모두 에이스를 교체했지만 출혈이 큰 쪽은 다이이치, 연장전이 되기 전에 승부를 봐야 했다.

하지만 가나가와의 뒷문은 단단했고, 성과 없이 8회를 흘려보냈다.

‘삼진을 많이 잡아줬으면 좋겠는데’

접전이 길어질수록 큰 경기 경험이 부족한 다이이치가 초조함을 드러냈다.

다카기의 투구 폼은 사이드 암, 체인지업보다는 슬라이더를 익히는 게 맞다. 하지만 야구부 사정을 고려하면 언젠간 선발로 뛰어야 하는 녀석, 많은 이닝 소화에 유리한 체인지업을 익히도록 했다.

7회는 체인지업이 잘 먹히면서 많은 삼진을 잡아냈지만, 8회에도 그렇게 될까.

후루타 감독은 구멍 뚫린 내야진이 은근 신경 쓰였다.

다카기가 마운드에 오르면서 2루를 보던 사토는 유격수로 자리를 옮겼고, 다무라 히로시(1학년)가 2루를 책임지게 됐다.

사토는 몰라도 다무라는 아직 불안한 전력,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으니 별 일 없이 지나가길 바랐다. 최고의 시나리오는 역시 삼진, 하지만 다무라의 생각은 달랐다.

‘저 자식만 믿고 갈 순 없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카기의 존재감만 더 높아질 뿐, 전력이 얄팍한 팀이 한 사람에 의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야 내 존재감도 높아지겠지, 크게 흔들리는 건 곤란하지만 다카기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했다.

‘이건 너무 평온하잖아.’

하지만 경기는 다무라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로 상대 타자를 몰아세우는 다카기, 너무 약이 올라서 지진이라도 일어나라는 악심을 품었다.

‘뭐?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하긴, 저 녀석을 향한 질투가 하루아침 사이에 쌓인 건 아니다.

중학교 대회에서 맞은 홈런은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건만, 가해자는 기억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피해자 입장에선 기가 막힐 일, 그래도 자존심을 버리고 야구부에 눌러 앉았다. 이대로 야구를 포기하는 건 너무 비참, 마음속의 라이벌은 아차 하는 사이 저만큼 멀어졌지만, 언젠가는 내 이름을 기억하게 해주겠다며 이를 갈았다.

‘그래, 너도 삼진만 잡을 순 없지.’

드디어 굴러온 땅볼, 기본기를 나름 갖춘 히로시는 가볍게 1루 송구를 마무리 했다.

하지만 특별함이 없으면 주목을 받기 어려운 세상, 함성은 히로시가 아니라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는 다카기에게 쏟아졌다.

“뭐야? 저 녀석 구속이 더 빨라지고 있잖아?!!”

“이러다 오늘 150km 기록하는 거 아냐?!!”

다음 공은 폭투가 나왔지만 전광판에 146km가 찍히자 환호성은 더 커졌다.

누군 좋은 수비를 해도 눈에 못 띄는데, 어떤 놈은 폭투 하나에도 관심을 받는 더러운 세상, 다카기는 동기의 질투를 뒤로 하고 8회를 깔끔하게 틀어막았다.

‘누굴 믿는 것도 쉽지 않네.’

하지만 벤치에 입성한 영웅의 표정은 그냥저냥,

폭투가 나오긴 했지만 그건 포수가 당연히 잡아줬어야 했던 공이다. 기본기가 튼튼한 시노자키 선배가 그런 실책을 저지르다니, 믿음이 컸던 만큼 배신감도 컸지만 그래도 내 공을 던졌다.

‘원 맨 팀 되는 건 사양입니다. 다들 알아서 잘 하시길’

아닌 척 했지만, 선배들도 다카기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스포츠는 실력으로 평가를 받는 무대, 여기선 경력이고 지랄이고 없다. 다카기는 지금 이시다가 물러난 마운드를 떠받치는 기둥, 후배 눈치 보기 싫으면 실력으로 입지를 다져야 했다.

‘도움만 받는 건 사양이라고’

이어지는 9회 초 다이이치의 반격, 선두타자 사토는 마음속에 배수진을 쳤다.

오늘 실책으로 출루한 걸 제외하면 팀에 도움이 된 게 없다.

거기다 캡틴이 짊어진 무게를 1학년이 넘겨받다니, 선배들 중 얼마나 인재가 없으면 이런 그림이 연출되겠나.

[다카기 하루요시(1학년), 다이이치의 상승세를 이끌다]

얼마 전 기자들이 이런 기사를 썼지만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게 사실, 후배에게 신세지는 건 더는 사양하고 싶었다.

까앙 ~ !!

“때렸고!! 라인 안쪽에 떨어집니다!! 사토 선수는 1루를 지나 2루까지 들어갑니다!! 다이이치가 다시 한 번 득점권 기회를 맞이합니다!!”

“사토 선수가 지역예선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는데 오늘은 안타가 없었거든요. 그래도 4번째 타석에서 하나 해내네요.”

마음의 짐을 던 사토는 다이이치 벤치에 주먹 세리머니를 날렸다.

하지만 기뻐하기엔 아직 이른 상황, 결승주자가 될 때까지 마음을 놓지 않았다.

“다카기!! 다카기!! 다카기!!”

다음은 오늘 경기 전 타석 출루(2안타, 2볼넷)를 기록하고 있는 다카기, 다이이치를 응원하는 팬들은 이대로 승리의 히어로가 돼 달라는 응원을 보냈다.

설마 1루가 비었다고 또 볼넷을 지시하진 않겠지, 다카기가 대기타석에서 몸을 풀자 진검승부를 요구하는 함성은 더욱 높아졌다.

‘여기서 도망치면 창피를 당하는 건 우리다.’

가나가와의 무라사메 감독은 승부를 지시했다.

다카기를 걸러봤자 오늘 2타점을 올리고 있는 쿠로다가 4번에 버티고 있다. 한 타자에게 고의사구 3개를 지시하는 것도 창피한 일, 더는 도망치지 않았다.

‘일단 발 한 번 풀자.’

마운드를 지키는 미야기는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초구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되는데 악어 입에 머리통을 밀어 넣는 기분다. 목구멍으로 마른 침을 넘기며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후우 ~ 이 자식 진짜 스트레스네.’

이시하라 포수도 미야기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여름동안 흘린 땀이 이 공 하나에 결정된다면? 그런 시나리오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으음 ··· 다시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킨타 마사시게 위원이 고시엔에서 한 경기 고의사구 4개를 얻어낸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 장면이 재현되고 있는 느낌이네요.”

“여기서 다카기 선수가 출루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한 경기 5출루면 고시엔 신기록 아닌가요?”

“글쎄요. 제 기억엔 6출루가 최고기록인 것 같은데,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3구도 볼이 되자 관중석에서 거센 야유가 터져 나왔다.

도쿄 최강이라는 놈들이 이런 식으로 야구를 하다니, 그렇잖아도 가나가와 고교는 인재들을 싹쓸이한다는 이유로 오사카 팬들에게 좋지 않은 눈길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도망질이라니, 양심도 배짱도 없는 놈들이라는 말이 쏟아졌다. 하지만 결과는 볼넷,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미야기는 고개도 들지 못했다.

‘안 되겠군.’

무라사메 감독은 여기서 다시 투수를 교체, 이미 팀 체면은 구겨졌고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이겨야했다.

“와아아 ~ !!”

하지만 바뀐 투수 쿄헤이도 볼넷을 내주고 말았다.

이제 무사 주자 만루, 오늘 혼자 2타점을 올린 쿠로다가 타석에 들어서자 환호성은 더욱 높아졌다.

까앙 ~ !!

“외야로 뻗어나가는 타구!! 중견수 옆에 떨어집니다!! 3루 주자 사토는 홈으로!! 홈으로!! 들어 ~ 옵니다!! 재역전!!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명승부를 보고 계십니다!!”

“쿠로다 선수 정말 대단하네요. 오늘 팀 타점을 혼자서 책임지고 있습니다.”

분위기를 탄 다이이치는 후속 타자 이시이의 적시타로 스코어를 4대 2로 벌렸다.

사실상 쐐기 타, 패배를 직감한 가나가와 야구부가 당혹감이 뒤섞인 슬픔을 삭이는 동안, 보호 펜스 밖으로 뛰쳐나온 다이이치 선수단은 서로 얼싸안고 승리 분위기를 만끽했다.

“꺄아아 ~ !!”

“다카기!! 다카기!!”

타카코 선생님이 이끄는 응원군단 93명은 홈을 밟은 다카기를 향해 열렬한 환호성을 보냈다.

도도한 얼굴로 그라운드를 누비는 야구부의 황태자, 그 고결한 플레이를 보고 어느 누가 반하지 않겠는가.

그동안 야구에 관심이 없는 소녀들도 다카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야구부 전용 응원단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제자들의 반응을 살피던 타카코 선생님은 뭔가를 떠올렸다.

애인은 야구부 코치, 본인은 고시엔에 진출하면 야구부를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본심은 아닐 거다.

슬쩍 밀어주면 코치는 계속 하겠지,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제자들과 친분을 쌓고 좀 더 나은 화장법을 연구하기 위해 결성한 미소녀 부, 그런 제자들은 이제 야구부 팬이 됐다.

야구부 전용 응원단이 돼도 화장법은 연구할 수 있고, 규모가 커지면 이사회의 관심도 따라오지 않을까? 서로에게 득이 되는 통합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뭣보다 그 사람하고 방과 후 활동을 같이 할 수 있잖아.’

애인과 감질나게 만나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 고시엔이 끝나면 야구부와 미소녀부의 통합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녀와라!!”

“예”

드디어 9회 말, 후루타 감독은 마운드로 향하는 다카기의 등을 어루만졌다.

내 제자들이 가나가와 야구부를 꺾는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꿈이라면 깨지 말라며 눈을 부릅떴다.

“야, 나 손 좀 잡아줘.”

맨 정신으로 보기 어려운 지 몇 몇 학생은 옆에 있는 동료의 손을 꼭 붙들었다. 그렇게 얽히고설킨 고리, 사나에가 이끄는 매니저 군단도 그 사이에 끼었다.

‘제발요. 우리 그동안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사나에는 눈을 질끈 감고 기도를 올렸다.

난 누구에게 이렇게 애원하는 걸까. 신? 애원해 봤자 들어주지도 않고, 그런 거에 의지해 본 적 없다.

지금 누구보다 의지할 수 있는 건 바로 저 녀석, 다카기라면 분명 해낼 거라 믿었다.

“스윙!! 삼진입니다!! 오늘 경기 3번 째 탈삼진!! 다카기 선수가 팀을 승리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제 누구도 이 선수의 실력에 물음표를 달 수 없겠네요. 누가 뭐래도 가나가와는 도쿄, 더 나아가 일본 최강의 야구부입니다.”

다음 타자는 2구만에 땅볼 처리, 남은 아웃 카운트는 하나, 자리에서 일어난 시노자키 포수는 양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방심하지 말고 하나만 더 잡자!!”

말 안 해도 알고 있는데 동네방네 소문을 내다니, 그래도 다카기는 그 마음을 이해했다.

고교 3년 동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겠는가.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다들 대성통곡할 일, 어깨에 짊어진 동료들의 기대를 외면하지 않았다.

‘후우 ~ 미치겠네.’

캡틴 이시다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렸다.

마치 아기가 태어나길 기다리는 아빠의 모습, 승전보가 전해졌으면 좋겠는데 마지막을 지켜볼 엄두는 안 나고,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까앙 ~ !!

“엇?!!”

마침 들려오는 경쾌한 타격음, 이시다는 급히 보호 펜스에 달라붙었다. 다행히 결과는 파울, 보는 입장에선 심장이 오그라들었던 광경이지만 다카기는 표정 없는 얼굴로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홈런 맞아도 4대 3이야, 피할 생각 없어.’

파울에 놀란 시노자키가 신중한 승부를 요구했지만 다카기는 고개를 저었다. 정면승부만이 있을 뿐, 맥이 빠지는 연출은 사양했다.

“헛칩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다이이치가 고시엔 무대 첫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글쎄요. 다카기 선수가 계속 힘으로 승부를 걸고 있는데, 여기서 한 번 변화를 주지 않을까요?”

타석에 선 기무라는 생각을 정리했다.

타이밍 상 변화구가 들어올 만한데 냉정히 따지면 힘에서 밀리고 있다. 다음 공도 분명 빠른 볼이겠지, 이 도박에 3학년 여름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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