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용병선언 - (5)
“후우 ~ ”
5회 말을 마치고 내려온 이시다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지역예선에선 잘 통했던 체인지업, 오늘도 초반까진 잘 먹혀들어갔지만 다카기의 말대로 노림수에 걸려들었다.
내 공이 알고도 못 치는 수준에 이르진 못했다는 뜻이겠지, 지역예선에서 자신감을 얻었지만 오늘 새로운 숙제를 떠안았다.
‘내 책임인가.’
하지만 사토는 그런 캡틴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내가 실수만 안 했어도 역전으로 이어지진 않았을 텐데,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사나에의 근심 어린 시선도 신경 쓰였다.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하지만 다카기는 이제 시작이라며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상대는 도쿄 최강 가나가와, 경기가 쉽게 풀릴 거란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나는 이 팀의 스타팅 멤버, 경기가 뒤집혔다고 음침한 분위기를 내뿜으면 불안도 전염될 거 아닌가. 아직 절망할 상황도 아닌데 초조해 하는 선배들, 그렇다고 별 말은 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바꾸는 것, 기회가 오면 음침한 분위기도 걷힐 거라며 넘어갔다.
하지만 다이이치의 6회 초 공격은 삼자범퇴로 종료, 경기가 후반에 접어들면서 선수들의 얼굴엔 쫓아가야 한다는 초조함이 드러났다.
‘괜히 걱정시키지 마세요.’
그나마 다행인 건 이시다가 6회 말을 실점 없이 막아냈다는 것, 캡틴이라면 우리에게 믿음을 달라는 다카기의 목소리에 자극을 받았다.
“자, 이제 다이이치의 7회 초 반격으로 이어지겠습니다. 선두 타자는 사토 선수, 오늘 3번 째 타석에서 실책으로 출루했습니다.”
“오늘 모든 득점이 내야수의 실책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기무라 선수는 만회를 했는데, 사토 선수가 어떻게 마음을 다스렸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다이이치 벤치는 여기서 기대를 걸었다.
선두타자가 살아나간다면 다카기로 이어지는 타석, 마이키의 투구에 묶인 좌타 라인을 고려하면 여기서 반드시 성과를 내야했다.
“스트라이크!!”
“와아아 ~ !!”
하지만 후반에 들어서도 마이키의 제구는 흔들리지 않았고, 가나가와를 응원하는 팬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사토의 어깨는 더욱 위축됐다.
여기서 끝내겠다고 달려온 여름이 아니지 않은가.
이대로 끝나면 난 그동안 흘린 땀을 앞으로도 추억할 수 있을까? 청춘의 한 조각이 잊고 싶은 악몽으로 남는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것도 없겠지,
그렇다고 본인이 영웅이 될 생각도 없었다.
감독님이 날 9번에 배치한 건 다카기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라는 것, 선배라는 자존심도 잊고 타격에 임했다.
깡 ~ !
느린 내야 땅볼,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달리던 사토는 두려움도 잊고 1루에 몸을 내던졌다. 하지만 결과는 아웃, 흙을 움켜쥔 주먹을 그라운드에 몇 번 내리치며 아쉬움을 표했다.
무서울 정도의 적막이 감도는 벤치, 사토는 그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까지 충분히 잘해왔는데 못한 것만 계속 떠올리면서 쪼그라든 자신감, 다카기의 타격을 지켜볼 여유도 없었다.
‘난 너와 무리해서 승부할 이유가 없다고’
다시 마주한 천적, 마이키는 이번에도 도망치는 투구를 펼쳤다.
다이이치를 응원하는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 한 성깔 하는 스즈에는 천박한 말을 쏟아냈다.
“구슬 떼서 던지나, 뭐가 저렇게 오래 걸려?”
투구 전, 마이키는 낭심보호대에 손을 대는 버릇이 있다.
피하는 투구를 하는 주제에 저게 무슨 행동인지, 더는 못 봐주겠다며 불만을 중얼거렸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흥 ~ 들을 테면 들으라고 해. 다른 사람들 생각도 나랑 똑같을 걸?”
친구가 주의를 줬지만 막무가내, 스즈에가 목이 터져라 진검승부를 외치자 관중들도 이에 호응했다.
‘잘 했다.’
하지만 결과는 볼넷, 무라사메 감독은 마이키에게 박수를 보냈다.
300여 고교가 고시엔 진출을 놓고 경쟁하는 도쿄, 그 중 최강이라 불리는 가나가와 고교의 에이스를 맡을 정도면,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승산이 없는 싸움을 하는 건 용기가 아니라 고집, 애송이에게 2안타를 내준 마이키는 자존심을 내려놨다.
타인의 눈엔 비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건 높게 평가받을 일, 무라사메 감독은 너야말로 진정한 승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광으로 알아라. 마이키가 볼넷을 두 개나 준 녀석은 네가 처음이다.”
한술 더 떠, 가나가와의 1루수 토자와(3학년)는 다카기를 도발했다.
여기서 다이이치가 패해도 네 명성은 올라갈 거라는 건가? 다카기는 코웃음을 쳤다.
“뭐 그런 바보 같은 논리를 자랑처럼 늘어놓으시나? 그쪽 감독은 야구를 그렇게 가르치나 보죠?”
“ ······ ”
“적에게 등을 보이면 목덜미를 물리는 법입니다. 기억해 두시죠.”
경고를 날린 다카기는 1루에서 멀어졌다. 반드시 쫓아가 목덜미를 물어뜯겠다니, 다카기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한 토자와는 입을 다물었다.
‘혹시 뛸까?’
마이키는 주자를 의식했다.
초반은 몰라도 지금은 도루가 나올 수 있는 타이밍, 마이키는 자신의 투구 폼이 도루에 취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좌투수가 견제에 유리한 건 상식이지만 따져보면 마냥 그렇지도 않다.
지금 타석에는 좌타 이시다, 포수가 주자의 움직임을 살피며 견제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결국 투수가 발을 묶어줘야 하는데, 이것도 한계가 있다.
좌완이 좌타자 상대로 바깥쪽을 던지려면 그만큼 릴리스 포인트를 끌고 나와야 하는데, 마이키처럼 발이 1루로 향하는 크로스 파이어는 그 정도가 더 심해질 수 있다.
투구 폼이 커지는 만큼 타이밍을 뺏기면 도루를 내줄 위험이 크다는 뜻, 잦은 견제로 주자의 발을 묶어줄 수밖에 없었다.
“우우 ~ 우 ~ ”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볼넷은 그렇다 쳐도 이 늘어지는 전개는 뭔가. 고시엔은 빠른 전개가 특징, 주심이 경기속행을 요구하면서 마이키는 압박을 받았다.
까앙 ~ !!
“받아 쳤고!! 이 타구는 중견수 옆에 떨어집니다!! 1루 주자는 2루를 돌아 3루!! 3루까지 밀고 들어갑니다!! 1사 주자 1, 3루!! 다이이치가 동점 기회를 잡습니다!!”
“지금은 몰렸고, 이시다 선수가 놓치질 않았네요.”
실투를 던진 마이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활발히 움직이는 주자를 의식했는지 팔을 마지막까지 끌고 나오질 못했고 결국 이런 결과를 초래, 볼넷 작전에 발목이 잡힌 꼴이 됐다.
‘좋지 않군.’
무라사메 감독의 마음도 초조해졌다.
현재 상황은 1사 주자 3루, 타자는 1루로 느린 땅볼만 굴려줘도 된다.
거기다 다음 타자는 마이키의 공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고 있는 쿠로다, 병살 작전을 가기도 애매하고, 생각이 깊어지면서 아무 지시도 내리지 못했다.
까앙 ~ !!
쿠로다는 다시 한 번 외야로 타구를 보냈다(희생플라이).
역전만큼 뼈아픈 동점, 홈을 밟은 다카기는 실의에 빠진 마이키를 응시하며 벤치로 향했다.
‘그렇게 도망만 치더니, 목덜미 물린 기분이 어떠신가?’
그렇게 주자를 의식할 거면 볼넷은 뭐 하러 내준 건가.
도망치면 결국 몰리는 건 투수, 그런 간단한 논리도 모르면서 일본 최강을 자랑하다니, 우리도 너희들 못지 않다는 눈빛을 보냈다.
“잘 했다!!”
한편, 후루타 감독은 벤치 입구까지 나와 다카기를 맞이했다.
마이키의 실투를 끌어낸 건 다카기가 열심히 움직여 준 덕분이다. 팀이 원하는 걸 해줄 수 있는 녀석, 편애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유독 예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하고 친한 사람만 터치하세요. 어색한 사람은 사양합니다.”
다카기는 손을 높이 들고 벤치에 입성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장난이라니, 동료들이 경쟁적으로 하이파이브를 권하자 다카기는 일찍 손을 치워버렸다.
‘나 아직 못했는데 ··· ’
사나에는 다카기 근처를 맴돌았다. 세리머니하면서 어색한 분위기 좀 깨보려고 했는데, 손 주인이 생각보다 일찍 장사를 접으면서 기회를 놓쳐버렸다.
“안 치고 뭐하세요?”
이때 다카기가 슬쩍 화해의 손길을 건넸다.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재주는 탁월한 녀석, 사나에는 믿음직한 손에 거친 신뢰를 표했다.
“7회 말은 네가 올라가라.”
“예”
동점이 되자 다이이치 벤치는 분주해졌다.
이시다는 오늘 102개를 던지며 제 몫을 다했다. 요시다는 다음 경기 선발로 예정 돼 있고, 후루타 감독은 다카기에게 뒷문을 맡겼다.
“자, 이제 가나가와의 7회 말 반격을 이어지겠습니다. 다카기 선수가 마운드에 오르는군요. 지역예선에선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제로, 14이닝 동안 볼넷 없이 삼진은 15개를 잡아냈습니다.”
“타격에 가려서 그렇지 투구에서도 빼어난 재능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특히 삼진을 잡아내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다카기는 초구부터 범상치 않은 빠른 볼을 보여줬다.
밖으로 흘러나가는 궤적이라 우타자 입장에선 치기 어려운 공, 어려움을 느끼는 건 시노자키 포수도 마찬가지였다.
‘브레이크도 안 밟고 꺾냐?’
이시다와 달리 좌우로 움직이는 빠른 볼, 폭투가 될 위험이 적어 몸이 덜 피곤한 건 좋은데, 빠르게 휘는 공이라 포수 입장에선 받아내기 쉽지 않다.
역동적인 투구 폼도 인상적, 유연성이 좋은 만큼 팔을 뒤로 크게 당겼다가 풀어내는데, 암 스윙이 워낙 빨라 타자 입장에선 공이 잘 안 보였다.
“스윙!!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확실히 이시다 선수와는 정 반대의 스타일이죠. 보는 입장에서도 시원시원하네요.”
다카기는 숨 고르는 과정도 생각하고 바로 볼을 던졌다.
타자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패턴, 뭣보다 이시다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라 천하의 가나가와 야구부도 쉽게 대응하진 못했다.
“스윙!! 첫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가다가 떨어지죠. 저 공이 타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변종 빠른 볼로 평가했지만, 다카기는 체인지업을 던졌다.
일반적인 체인지업보다 더 빠르고 덜 떨어지는 공, 사실 체인지업은 투심과 그립이 비슷하고 둘의 차이를 명백히 구분하는 건 힘들다.
선수에 따라 움직임도 천차만별, 다카기도 5월 즈음엔 체인지업을 떨어뜨리는데 집중했지만 이내 방향을 수정했다.
체인지업은 빠른 볼을 던질 때와 투구 폼이 비슷해야 먹히는 구종, 팔각도를 무리하게 바꾸지 않고 나만의 특징을 살려줬다.
“지금은 145km가 나왔습니다. 구속이 점 점 빨라지고 있는데요.”
“지역예선에선 이 정도 구속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역시 본선이라 리미터를 해제한 것 같습니다.”
사이드 암이 145km라니, 프로에서도 나오기 힘든 광경 아닌가.
곳곳에 자리 잡은 프로구단 관계자들의 눈은 흥미로 반짝거렸다.
‘단품을 시켰는데 풀코스가 나왔군.’
‘투수가 좋겠지, 저 정도 구속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한 거 아냐?’
‘야수가 좋겠어, 저런 운동능력을 갖춘 선수를 투수로 쓰는 건 낭비야.’
타격, 수비, 투구, 주루, 스타성,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원석 아닌가. 아직 우리 선수는 아니지만, 기용방법을 두고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나도 공부 좀 시켜달라고’
그 사이 다카기는 두 번째 타자도 범타로 돌려세웠다.
빠른 볼로 밀어붙이고 체인지업으로 낚는 패턴, 지역예선부터 이 방법을 고수하고 있지만 깨뜨린 타자는 아무도 없다.
위기가 와야 투구에 대해 고민하고 수정방향을 찾을 텐데, 다들 나가떨어지고 있으니 공부가 되질 않았다.
‘어서 날 괴롭혀 봐, 그리고 내가 가야할 길을 알려 줘’
정면에서 달려들어도 반응이 없다니, 실망한 다카기는 남은 타자도 범타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