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용병선언 - (4)
깡 ~ !
“유격수 막고 2루에! 1루는 던지지 못합니다!! 기무라의 좋은 수비! 다이이치의 첫 득점은 다음 기회로 미뤄집니다!!”
좋은 수비가 나왔지만 기무라는 웃지 못했다.
이 위기는 내가 저지른 실수에서 비롯된 일, 병살이 나왔다면 좋았겠지만 공이 글러브를 맞고 튀면서 시간이 지체됐다.
그리고 1사 주자 1, 3루 위기는 현재 진행 중, 마운드로 돌아간 마이키도 깊은 한숨으로 긴장을 다스렸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어.’
웃지 못하는 건 1루에 안착한 이시다도 마찬가지, 그래도 안타가 될 만한 타구였다는 걸 위안으로 삼았다.
게다가 다음 타자는 오늘 첫 타석에서 안타를 뽑아낸 쿠로다, 두 번째 타석에서도 아웃은 됐지만 좋은 타구를 날렸기에 더욱 기대가 됐다.
‘슬라이더’
마이키는 이시하라 포수와 신중히 사인을 주고받았다.
나는 왜 저 녀석에게 안타를 맞은 걸까?
슬라이더는 좌투가 좌타, 우투가 우타를 잡아내는데 특화된 구질이다. 쿠로다는 우타, 그럼 슬라이더는 쓰면 안 되는 거였나? 하지만 쿠로다는 다운스윙에 최적화 된 타자, 위에서 아래로 찍어 치는 타입이라 횡으로 휘는 슬라이더가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 그저 운이 안 좋았던 건 아닐까? 마이키는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
초구부터 슬라이더를 던져 헛스윙을 유도했다.
여기서 바깥쪽을 한 번 질러주면 좋겠지, 하지만 쿠로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이키는 구속으로 타자를 윽박지르는 유형은 아니다. 슬라이더를 연속으로 던진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다음 공은 대략 짐작이 됐다.
까앙 ~ !!
“외야로 뻗어나가는 타구!! 중견수!! 중견수가 펜스 근처에서 잡아냅니다!! 그 사이 3루 주자는 홈으로!! 들어옵니다!! 1대 0!! 팽팽했던 균형이 여기서 흔들립니다!!”
“오늘도 타점이네요. 사실 쿠로다 선수가 존재감이 있던 선수가 아닌데, 이번 대회에서 유독 타점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깎여 맞으면서 생각보다 멀리 나간 타구, 발이 빠른 사토가 홈으로 들어 올 여유는 충분했다.
부 캡틴이지만 말 수가 없어 존재감도 없고 그렇다고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득점권 기회만 되면 타점을 빨아들이는 선수, 모두가 그 불가사의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지역예선을 포함해 벌써 11타점 째, 후속 타자가 아웃되면서 공수교대가 진행됐지만 부원들은 생수를 뿌리며 쿠로다를 괴롭혔다.
‘이 자식들이 ··· ’
적당이라는 걸 모르는 바보들, 내가 말 수가 없다고 만만해서 이러는 건가? 하지만 좋은 분위기에 찬물 끼얹기도 그렇고, 쿠로다는 오늘도 바보가 됐다.
‘관심 없음’
다카기는 소란과 거리를 뒀다.
쿠로다 선배와 친한 것도 아니고, 무리하게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왜 그러고 있어. 주인공이 못 돼서 서운해?”
주변을 살피던 사나에는 다카기에 시비를 걸었다.
평소 주인공 노릇만 하던 녀석이라 쿠로다에게 쏠린 관심이 탐탁지 않은 건 아닐까? 아니, 그것보다 평소 쿠로다와 말을 섞지 않는 게 신경 쓰였다.
혹시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건 아닌 지, 팀 분위기를 책임지는 매니저라 그냥 넘기지 않았다.
“선배도 부원들하고 다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잖아요?”
“내가?”
“그렇잖아요. 사토 선배하고 말 섞는 거 거의 못 봤는데요.”
사나에는 흠칫했다. 둘 사이에 어색한 일이 있었던 건 사실, 그래도 나름 티 안 나게 노력했는데 헛수고가 돼 버렸다.
“그러니까 제 인간관계는 이 정도면 충분해요.”
사나에가 답을 망설이는 동안 다카기는 쐐기를 박았다.
지금까지 서로 간섭 안 하고 잘 지내왔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이 사람 저 사람 친한 척 하는 건 적성에 안 맞고, 인간관계는 서로 마음을 열 수 있는 소수정예면 충분했다.
“그래도 친해지면 좋잖아. 가서 장난도 걸고 그래, 받아줄 거야.”
“싫어요. 장난 칠 거면 선배한테 하는 게 낫죠.”
다카기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쿠로다 선배는 사람이 너무 얌전해서 건드려도 재미가 없을 것 같고, 반응이 바로 오는 사람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것보다 저 물 좀 주실래요?”
“그래”
사나에는 아무 의심 없이 생수병을 건넸다. 그리고 다카기는 선배가 잠시 방심한 틈에 목덜미에 찬물을 흘려보냈다.
“히이익 ~ !!”
그렇잖아도 더운 날씨, 몸 이곳저곳을 타고 다니는 찬물에 사나에는 비명을 질러댔고, 범인은 바로 도주해버렸다.
‘불만 있으면 잡아보시죠.’
공수교대 중인데 매니저가 그라운드에 난입하는 게 말이 되나, 다카기는 이런 것도 계산하고 범행을 저질렀다. 이닝 끝나면 두고 보자는 눈빛이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무시했다.
‘지금 위험했던 거 아냐?’
관심 없는 척 했지만, 사토는 곁눈질로 다카기를 살폈다.
1학년 때 사나에에게 고백했다가 사이가 어색해진 일이 있는데, 그래도 지금은 많이 개선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 뿐, 사나에는 끝내 답을 주지 않았고 지금도 약간 미묘한 관계로 남아있다.
그런데 다카기 저 녀석은 입부 초부터 매니저와 잘 붙어 다녔다.
내 자리였던 유격수를 차지한 건 이제 신경 쓰지 않지만, 야구부의 마돈나까지 손을 대는 건 좌시할 수 없었다.
“저한테 무슨 할 말 있으세요?”
마침 자기 자리에서 몸을 풀고 있는 다카기와 눈이 마주쳤고, 사토는 이쯤에서 견제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아무리 편해도 선배한테 그런 장난 하는 거 아니다.”
“네 ~ 알겠습니다.”
다카기는 몇 마디 하지 않았다.
저 사람이 매니저 선배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예전부터 눈치 챘다. 본인은 접근도 못하는데 어린놈이 치근덕거리는 게 못마땅했겠지, 뭣보다 저 사람은 장난이라는 걸 잘 모른다.
장난을 모르는 사람한테 대들어 봤자 결과가 보이는데 뭐 하러 말을 덧붙이나, 친해질 생각도 없고 그냥 잘못을 인정하는 게 나았다.
***
‘걔는 왜 틈만 나면 장난을 치는 거야?’
한편, 대기실로 자리를 옮긴 사나에는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아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열 받는 상황, 너무 편하게 대해주니까 날 만만하게 보는 건가? 지금이라도 선배의 위엄을 바로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녀석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자 분노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냥 말 한 마디라도 더 걸어보고 싶었던 거 아닐까?’
그제야 사나에는 본심을 깨달았다.
나는 왜 별 것도 아닌 일로 다카기에게 시비를 걸고 계속 말을 걸었던 걸까? 그 녀석에게 애정이 있어서 그랬던 거겠지, 뭣보다 그 녀석은 분명 예고도 했다.
“장난 칠 거면 선배한테 하는 게 낫죠.”
“그것보다 물 좀 주실래요?”
장난친다고 경고했는데 눈치를 못 챈 나는 뭔가.
뭣보다 사나에는 지금까지 예고 없이 후배에게 장난을 쳐 왔다. 귀엽다며 시도 때도 없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겨도 씩 웃고 말던 녀석, 그런데 내가 정색을 하면 분위기가 어떻게 될까.
지난날을 떠올리면 오늘 당한 장난은 애교로 넘어가도 될 수준이었다.
‘후우 ~ 이번 여름이 진짜 마지막이구나.’
사나에는 잠시 감상에 젖어들었다.
힘은 들었지만 나름 즐거웠던 야구부 매니저, 정든 야구부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울적해졌다.
오늘 당한 장난도 훗날 좋은 추억으로 남겠지,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나에는 서둘러 벤치로 복귀했다.
‘뭐야, 언제 이렇게 됐어?’
하지만 그 사이 그라운드 분위기는 심각해졌다.
4회까지 안정적인 피칭을 선보인 이시다는 연속 안타를 내주며 무사 주자 1, 2루 위기에 몰렸고, 여기에 진루타가 이어지면서 안타 하나에 역전까지 내줄 수 있는 위기에 몰렸다.
‘그 실수는 내가 만회한다.’
타석에는 이제 기무라, 앞선 이닝에서 실점으로 이어지는 실책을 저질렀으니 의욕을 앞세우는 건 당연했다.
까앙 ~ !
“3루수 옆을 빠져 나갑니다!! 3루 주자는 홈으로!! 2루 주자는 3루에 멈춰섭니다!! 1대 1 동점!! 가나가와가 바로 경기의 균형을 맞춥니다!!”
“역시 도쿄 최강답네요. 이런 게 경험의 차이겠죠.”
매년 고시엔을 들락거린 가나가와는 선취점을 내준 정도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 비해 다이이치는 이렇다 할 어려움 없이 본선에 진출한 팀, 여기서 흔들리면 와르르 무너질 위험도 안고 있었다.
‘지쳤나? 그럴 리가 없는데’
제자를 지켜보는 후루타 감독의 마음도 초조해졌다.
이시다는 지역예선에서 4승을 책임졌지만 무리를 했다고는 할 수 없다. 요시다와 다카기가 부담을 덜어준 것도 있고, 마지막 경기에선 투구 수도 제한했다.
체력적인 문제를 의심하긴 어려운 상황, 일단 다나카 코치를 보내 흐름을 끊었다.
“죄송합니다.”
“신경 쓸 거 없다. 던지다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지.”
다나카 코치는 일단 당황한 제자를 다독였다.
가나가와의 마이키도 몇 번이나 위기를 맞이했지만 결국 버텨내지 않았던가. 너도 할 수 있다며 용기를 불어넣었다.
‘글쎄, 과연 그럴까.’
하지만 다카기는 좋지 않은 기운을 느꼈다.
승부를 피하는 투수를 높게 평가하고 싶진 않지만, 마이키의 안정성은 확실히 탁월하다.
좌타자에게 던지는 슬라이더는 헛스윙 비율은 높지 않지만 장타를 억제하고 있고, 우타자에 대한 약점은 안정적인 제구로 커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시다 선배는 어떤가?
안정적인 제구를 앞세우는 건 마이키와 비슷하지만 결정구가 체인지업이라는 차이가 있다.
체인지업이 좌타자 승부에 효과가 없다곤 할 수 없지만 노림수에 취약한 것도 사실, 내가 가나가와 입장이라면 어떤 공을 노리고 들어갈까? 고심 끝에 훈수를 뒀다.
“빠른 공으로 밀고 가죠. 계속 체인지업만 노려 치고 있잖아요.”
안타를 맞은 공은 다 체인지업, 냉정히 말해서 캡틴의 체인지업은 헛스윙을 이끌어 낼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이진 않다.
어디까지나 타이밍을 뺏는 정도, 여름 동안 구속도 올랐는데 빠른 공에 좀 더 자신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드러냈다.
“낮게만 던지세요. 우리 내야 튼튼한 거 아시잖아요.”
후배의 참견에 이시다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내가 불안해 보였다니, 괘씸하다는 생각보다 미안함이 앞섰다.
“미안하다. 보기 불안했냐?”
“네, 괜히 걱정시키지 마세요.”
할 말 다한 다카기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운 그라운드, 캡틴이 중심을 지켜줘야지 불안에 떨면 어쩌자는 건가. 확실히 하라는 압박의 눈빛을 보냈다.
‘OK, 왔어.’
유격수 정면, 페이크 송구로 3루 주자를 붙잡아 둔 다카기는 차분하게 2루 송구를 완료했다.
하지만 사토는 글러브에서 공을 빼다 떨어뜨리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 사이 3루 주자는 홈으로 내달렸다.
이렇게 어이없이 역전을 내주다니, 하지만 다카기는 책망의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돌아섰다.
캡틴도 아쉬움을 삼키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동료를 탓하겠나.
친하게 지내진 못해도 서로 얼굴 붉힐 이유도 없는 관계, 글러브에 주먹을 박아 넣으며 투지를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