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용병선언 - (3)
“자! 일단 한 점 내고 가자!!”
선취점 기회를 맞은 다이이치 벤치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사카 최강이라 불리던 히라카시도 우리의 상대가 못됐는데 가나가와라고 두려울 게 뭔가.
지금부터는 본선이라는 압박 때문에 잠을 설쳤지만, 초반에 좋은 기회를 잡으면서 긴장감을 떨쳐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뭐지?’
한편, 믿었던 슬라이더를 통타당한 마이키는 마음을 다스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다음 타자 이시이가 좌타라는 것. 주자가 3루에 있으니 낮은 공 승부는 부담스럽고, 철저하게 바깥쪽을 노렸다.
“스트라이크!!”
아직 살아있는 제구, 몸에서 멀어지는 투구궤적이라 이시이도 부담을 느꼈다. 어중간한 기회라면 모를까 지금은 반드시 점수를 내야 하는 상황, 코치의 사인을 확인했지만 이렇다 할 지시는 없었다.
‘이제 와서 잔재주가 통할 리가 없지.’
다이이치의 후루타 감독은 정공법을 내세웠다.
야구부 지휘봉을 잡은 이후,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여기까지 왔는가, 이시이라면 괜찮을 거라며 조급함을 다스렸다.
‘아차’
하지만 이시이는 흘러나가는 슬라이더에 끌려나왔다.
좌투가 좌타에게 줄 수 있는 최악의 악몽, 마이키는 여기서 슬라이더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했다.
깡 ~ !
“다시 바깥 쪽! 하지만 내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유격수가 잡아내면서 투 아웃, 이시이 선수는 내야 플라이로 물러납니다.”
“올 여름은 유독 각 지역을 대표하는 에이스들의 수난이 많았는데, 마이키 선수는 든든하네요. 흔들림이 없습니다.”
마이키는 후속 타자까지 범타로 처리하며 실점 없이 위기를 넘겼다.
매 경기 선취점을 내며 분위기를 주도한 다이이치 입장에선 조금 뼈아픈 일, 기본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투구를 펼치는 마이키의 진가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재미있어. 재미있다고’
이 와중에도 다카기는 팽팽한 분위기를 즐겼다.
게임도 적절한 난이도가 있어야 즐거움을 느끼는 법, 너무 쉽게 풀린 지역예선에 비하면 오늘 경기가 10배는 더 재미있었다.
‘이시다 선배도 만만치는 않을 거다.’
캡틴의 투구에 대한 믿음도 흔들리지 않았다. 150km를 넘나드는 구위는 없지만 안정성을 따지면 도내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수준, 가벼운 소란은 있었지만 이시다는 큰 위기 없이 경기를 풀어냈다.
‘우리 이번엔 제대로 놀아보자고’
경기는 흘러 3회 초 다이이치의 반격,
1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다카기가 타석에 들어섰다. 심심한 요리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조미료 같은 녀석, 마이키는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넌 고교 최고 에이스야. 애송이 상대로 도망만 다닐 거야?’
자신감이라는 놈이 마이키의 귀에 유혹을 속삭였다.
다카기가 좋은 타자라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슬라이더만 제대로 구사하면 제 까짓게 뭘 어쩌겠는가? 몸 쪽 승부는 피하라는 게 감독님의 지시지만 마이키는 오기를 부렸다.
‘노렸어?!’
하지만 다카기는 앞발을 열면서 몸 쪽 공을 잡아당겼다.
첫 타석에서 앞발을 홈 플레이트 쪽으로 밀면서 안타를 만들어 낸 것과는 반대되는 타격, 밀고 당기고 완전 자유자재라 투수 입장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허 ··· 이게 가능한 건가?’
가나가와의 무라사메 감독도 할 말을 잃었다.
앞발 위치를 바꿔가며 스윙 각을 만드는 건 프로도 하기 힘든 고급기술이다. 걸음마를 배워야 할 녀석이 뜀박질을 하고 있으니, 혹시 몸 쪽을 예상했던 건가? 아니면 순간적인 감으로? 어느 쪽이든 혼란스러웠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1루에 안착한 다카기의 표정은 만족과 거리가 멀었다.
지금까지 몸 쪽 공은 찍어 치라고 배웠지만, 그런 타격은 장타를 만들어 내기 어렵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배트 그립을 약간 내린 자세에서 몸 쪽 공을 걷어 올리던데, 이런 타격은 강한 엉덩이 회전이 받쳐줘야 가능하다.
앞발을 닫고 짧게 치던 버릇이 남아 있어서 아직은 완벽하지 못한 힙 턴. 여름 동안 나름대로 개선을 했지만, 연구와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걸 실감했다.
‘이렇게 돌리면 되나. 아니면 좀 더 역동적으로?’
1루에서도 쉴 새 없이 반복되는 트레이닝, 허리를 튕기는 모습은 방송 카메라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보수적인 팬들 눈엔 촐랑거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귀엽다며 좋게 봐주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 * *
“야 ~ 쳤다 하면 안타네. 쳤다 하면”
이곳은 다카기가 자주 애용하던 식당, 평소 다카기를 좋게 보던 단골손님 호리오 씨는 박수를 치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관심이 있는 건 사장과 안주인도 마찬가지, 그리고 방학을 맞아 식당 일을 도우러 온 미운 오리도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넌 수험생이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니?”
엄마가 뭐라고 해도 요지부동, 그렇게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녀석은 호리오 씨를 붙잡았다.
“저 사람, 정말 여기 자주 오나요?”
“왜? 나중에 사인이라도 받을 거냐?”
“아니요. 뭣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미운오리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야구부에 입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수 출신도 아닌 날 받아줄까? 만약 시작한다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 이 것 저 것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끈기도 없는 네가 무슨 운동이냐.”
식당 주인은 아들의 꿈에 찬물을 들이부었다.
수험생이 이 중요한 시기에 여기서 얼쩡거리고 있다니, 그래도 머리는 있어서 공부는 제법 하는 편인데 노력과 끈기가 없는 게 흠이다.
이런 식이라면 고등학교에 진학해도 뒤처질 뿐, 아들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뭐든 잘 하고 싶다면 끈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저 손님이 그러더라. 공부든 운동이든 매일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너처럼 뭐든 금방 싫증내면 될 일도 안 된다.”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요?”
“그래, 여기 호리오 씨도 증인이다.”
미운 오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머리는 길고 행동도 가벼워 보이는데, 저런 사람이 정말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있을까? 솔직히 믿기 어려웠지만 거짓말이라는 증거도 없었다.
“너 어디 가니?”
“공부하러 가요.”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놀란 안주인은 아들을 붙잡았다.
“너 또 딴 길로 새는 거 아니니?”
“엄마는 절 그렇게 못 믿어요? 저도 노력이라는 것 좀 해보려고요.”
살다 살다 이런 날이 오다니, 안주인은 아직도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사장은 입 꼬리를 슬쩍 들어올렸다.
“놔둬요. 저 녀석도 뭔가 깨달은 게 있겠죠.”
“흐흐 ~ 평소 행실이 그 모양이니 엄마가 아들을 못 믿지. 너 지금 불효하는 거다!!”
호리오 씨는 속 편한 말로 안주인의 속을 긁었다. 고등학교 수험까지 3개월도 안 남았는데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질까, 아니나 다를까 집으로 돌아온 미운 오리는 그새를 못 참고 TV를 틀었다.
[유격수가 잡아서 2루에!! 다시 1루에서 ~ 아웃입니다!! 다이이치가 이렇게 위기를 벗어나는군요.]
[이시다 선수는 참 편안하겠네요. 내야가 이렇게 안정적이라면 무서울 게 없을 것 같습니다.]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다카기의 활약은 계속됐다.
이쯤에서 실수가 나올 법도 한데 빈틈이 없는 그물망, 당연한 결과라며 도도하게 돌아서는 모습은 남자가 봐도 매력적이었다.
‘저 손님이 그러더라. 공부든 운동이든 매일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너처럼 뭐든 금방 싫증내면 될 일도 안 된다.’
마침 뇌리에 울려 퍼지는 아버지의 말씀,
노력하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TV를 껐다.
‘보고 싶은데 ··· 그 경기만 보고 공부할까?’
책상 앞에 앉아도 끊이지 않는 유혹, 그래도 꾹 참고 잡념을 털어냈다.
‘내년에 같은 학교에서 봅시다. 선배님’
다이이치에 입학하면 그 사람과 당당히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겠지, 지금은 범접할 수 없는 거리에 있지만 언젠간 따라잡겠다는 다짐을 세웠다.
* * *
“자, 이제 경기는 5회 초 다이이치의 공격입니다. 선두 타자는 사토 요시시게, 오늘은 아직 1루를 밟지 못했다.”
경기는 어느덧 중반에 접어들었다.
사토는 그동안 다이이치의 리드오프를 책임진 핵심전력, 지역예선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오늘은 9번에 배치됐다.
발 빠르고 짧게 치는 선수를 리드오프로 기용하는 건 일본야구에서 당연한 일, 하지만 후루타 감독은 지역예선부터 일부 선수를 제외하고 타순에 변화를 줬다.
마이키는 공은 빠르지 않지만 좌타자들에겐 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면모를 보인다.
핵심선수에 좌타자가 많은 다이이치에겐 까다로운 상대, 사토를 하위타선에 배치하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녀석은 감독의 지시에 순순히 응했다.
다카기에게 밀려 유격수에서 2루로 이동했는데, 타순까지 바닥을 치다니, 솔직히 자존심 상했지만 마이키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으니 감독의 결정이 틀리다곤 할 수 없었다.
까앙 ~
“유격수 정면 ··· 아 ~ 여기서 공을 더듬는군요!! 그 사이 타자는 1루를 밟습니다!!”
“글쎄요. 직접적인 비교는 자제해야겠지만, 앞선 이닝에서 보여준 다이이치의 수비에 비하면 뭔가 아쉽습니다.”
사토가 실책으로 출루하면서 분위기는 다이이치 쪽으로 기울었다.
거기다 무사 주자 1루에 다음 타자는 다카기, 그동안 안정적인 수비를 보여준 기무라였기에 가나가와 벤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침착해라.’
무라사메 감독은 일단 학생들을 다독였다.
사토는 주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선수, 설마 여기서 번트를 대진 않겠지만 런 앤 히트 작전은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후루타 감독이 다카기를 믿는다면 정공법으로 가겠지, 고심 끝에 후자에 초점을 맞췄다.
“다카기!! 다카기!! 다카기!!”
“여러분들도 따라해 주세요!!”
한편, 타카코 선생님이 이끄는 응원단도 목소리를 높이며 주위의 호응을 끌어냈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 여기서 점수를 내지 못하면 오늘 경기는 어렵다는 걸 직감했다.
“왜 도망가는 건데?!!”
초구가 볼이 되자 모토즈미 스즈에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발을 구르며 응원막대까지 휘두르다니, 내가 뭔가에 이렇게 열중한 적이 있었던가? 이젠 자기 멋대로 예정에도 없는 구호까지 만들어 냈다.
“진검승부!! 진검승부!! 진검승부!!”
주위의 학생들도 전염되면서 그라운드는 승부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들썩였다. 하지만 무라사메 감독은 이런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다음 타자는 이시다, 좌타자에 확실한 강점이 있는 마이키의 특성에 도박을 걸었다.
‘정말 야구 재미없게 하네.’
투 볼이 되자 다카기는 방망이를 거꾸로 잡고 타석에 섰다.
관중들은 지금 진검승부를 요구하고 있다.
상대는 칼도 안 뽑았는데 내가 칼을 들고 예의를 지켜야 하나, 분명 진지하게 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건만, 나름대로 불만을 표출했다.
“방망이 똑바로 잡게.”
주심이 주의를 주자 다카기는 별 수 없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심판한테 대들어 봤자 얻을 건 없고, 그저 투수가 지금 행동에 조금이라도 자극을 받길 바랐다.
‘정정당당한 패배자보다 비겁한 승자가 되겠어.’
하지만 마이키는 볼넷을 택했다.
타자가 배트를 거꾸로 잡았으니 오늘 일은 승패에 상관없이 사람들 기억 속에 남겠지만, 부끄러움보다 승리에 대한 열망이 더 강했다.
‘여자는 야구공이다. 때로는 강하게 ··· 때로는 부드럽게 ··· ’
물론 이런 작전은 이시다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코치의 가르침, 초구가 들어오자 이시다는 거침없이 배트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