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용병선언 - (2)
‘일이 왜 이렇게 됐을까.’
한편 다카기의 어머니는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아들이 큰 무대를 밟게 된 것도 예상 못한 일이지만, 최근 병원에서 받은 통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고등학생 자식이 둘이나 있는데 임신이라니, 남편의 유혹에 넘어간 내가 어리석었다며 후회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4개월입니다. 건강에 특별히 신경 써 주십시오.”
“아들이 고시엔에 나가는데 응원가는 건 괜찮겠죠?”
“글쎄요 ··· 그 더운 날에 장시간 서 있는 건 위험합니다.”
아들을 응원가려 했지만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최고 37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속에 임산부가 응원전을 펼치다니, 특히 더위는 태아에게 좋지 않다며 반대를 표했다.
하지만 고시엔이 어떤 무대인가. 평생 한번 겪기도 어려운 일본의 전국적 행사, 그런 곳에 아들이 출전한다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게 부모의 마음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발목이 잡히다니, 당분간 비밀로 하겠다며 남편에게 소심한 복수를 해버렸다.
‘미사키한테도 비밀로 해야겠지?’
그래도 자식은 마음에 걸렸다.
딸이 대학 입시 준비로 바쁜데 엄마라는 사람이 임신이라니, 별로 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챙겨 줄 게 많은 시기라 비밀에 붙였다.
‘우리 아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엄마가 되서 응원도 못 가주다니, 뱃속에 있는 자식도 중요하지만 먼 곳에 있는 아들이 더 마음에 걸렸다.
“아가 ~ 저기 형 나오네.”
아쉬운 대로 TV를 보며 뱃속의 자식과 교감을 나눴다.
아들인지 딸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기왕 태어날 아이라면 아들이 좋겠지, 형처럼 뭐든 잘하는 아들이 되라며 배를 어루만졌다.
* * *
“지금부터 개막식을 시작하겠습니다.”
4만 7천 관중이 집결한 구장에서 제 99회 고시엔 대회의 막이 올랐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을 제외하면 매년 반복된 행사, 집행위원장을 맡은 마이니치 신문의 사장이 축하연설을 하는 동안, 다카기는 푸른 하늘을 올려봤다.
‘그분도 이 자리에서 나와 같은 하늘을 보고 있었겠지?’
할아버지의 형님 이후, 이 무대를 밟는 건 무려 50년 만의 집안 경사다.
그 정도로 서기 어려운 자리, 여름방학도 반납하고 훈련에 열중하면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안 했을까?
이 그라운드는 유혹을 이겨낸 승자들에게 주어진 자리, 그렇게 생각하면 여름동안 흘린 땀과 노력이 아깝지 않았다.
[이 동료들과 하루라도 더]
그렇다고 여기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등록망촉이라는 고사성어도 있지 않은가. 사람이란 욕심이 있어야 발전이 있는 법, 고시엔 본선에 진출했으니 내친 김에 끝까지 가보는 것도 좋겠지, 뭣보다 지금 동료들과 하루라도 더 함께 하자는 대회 슬로건이 가슴 깊숙한 곳에 박혔다.
‘모두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부모님, 동료들, 그리고 이 자리를 거쳐 간 많은 선배들에게도’
대표자가 개회선언을 하는 동안, 나름대로 준비해 온 각오를 다잡았다.
이 그라운드엔 수많은 학생들의 희로애락이 서려 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내던지며 연출한 드라마가 없었다면 고시엔이 국가적 대회로 명성을 누릴 수 있었을까?
별은 언젠간 수명을 다하지만 하늘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그런 것들이 하나 둘 쌓여 환상적인 밤하늘을 연출하는 것처럼, 학생들의 노력과 추억이 쌓여 오늘의 고시엔을 만들어 낸 것 아닐까.
나 하나는 보잘 것 없지만 모두가 함께라면 멋진 밤하늘을 연출할 수 있겠지. 그게 훗날 이 자리에 설 후배들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다카기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책임감이라는 것을 느꼈다.
‘지금부터는 진지하게 한다.’
지역예선에선 뭔가 진지하질 못했다.
그런 것들이 후배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야구 원로들이 날 좋게 보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겠지. 지금부턴 진지해지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회장님, 여기 앉으십쇼.”
“고맙네.”
한편, 다카기의 친할아버지 고영길은 친분이 있는 신문사 관계자들과 특별석에 자리를 함께했다.
고시엔을 주최하는 마이니치 신문은 중도좌파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우익의 시선이 곱지 않은 건 당연, 일본에 나만의 왕국을 세운 고영길은 좌파 성향이 강한 신문사와 연대를 이어왔다.
권력만큼 무서운 게 여론, 잊을 만하면 달려드는 벌레들을 쫓아내기 위해 일찌감치 방패를 세웠다.
[스기토모 그룹 직원 400명을 죽이겠다]
지난 1997년, 한 우익은 고영길이 이끄는 기업 관계자들을 죽이겠다는 협박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조선 놈이 이끄는 기업이니 사원은 다 자이니치겠지, 당연히 죽여도 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벌레 같은 놈들, 감히 내 영역을 침범해? 전쟁이다.”
고영길은 친분이 있는 기자들에게 정보를 흘려 우익이 지원하는 단체와 학교의 비리를 파헤쳤다.
유통, 호텔, 부동산, 스포츠, 신문 등 많은 사업에 손을 대다보니 정보망이 넓어지는 건 당연한 일.
우익 산하 단체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연일 쏟아지는 충격보도에 우익의 지지율은 크게 흔들렸다.
오죽하면 총리가 직접 진화작전에 나섰을까.
그 사건으로 고영길은 다시 한 번 존재감을 드러냈고, 든든한 후원자를 얻은 좌파성향신문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후쿠시마 원전 재가동, 주변국과의 대립을 이용해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현 정부의 태도,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문제 등, 우익이 주도하는 일에 지속적으로 반대를 표해왔다.
이런 현실 때문에 극우 우익은 마이니치 신문이 주최하는 고시엔을 폐지해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올해도 대회는 이어졌다.
“흥 ~ 죽어도 입은 살아 움직일 놈들이군.”
고영길은 고시엔 폐지 주장에 코웃음을 쳤다.
학생들이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겨루는 자리에 정치논리를 늘어놓다니, 할 줄 아는 게 선동 밖에 없는 놈들이라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이거 의외군요. 회장님의 1년 만의 공식행보가 야구 관람이라니 ”
“이 사람아. 내가 야구협회 교토 본부 회장도 지냈던 사람이야. 여기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하하 ~ 아닙니다. 천천히 즐기십시오.”
참견 많은 친구의 물음도 능숙하게 넘겼고,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경기 시작을 기다렸다.
“플레이 볼!!”
“와아아 ~ !!”
주심의 콜과 함께 고시엔 본선 무대의 막이 올랐다.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을 안고 있는 다이이치는 압도적인 응원을 받았고, 다카기의 이름이 호명되자 함성은 더욱 높아졌다.
[다카기 하루요시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해 15살, 1학년, 하지만 존재감은 3학년 이상입니다.]
[지역예선에서 이 선수가 출루하면 거의 다 득점으로 이어졌거든요. 마이키 선수가 어떻게 승부를 할지 지켜봐야겠습니다.]
마이키는 이시하라 포수와 신중하게 사인을 주고받았다.
몸 쪽 승부는 자제하라는 게 감독님의 의견, 하지만 슬라이더에 자신이 있는 마이키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바깥쪽으로 가다가 카운트가 유리해지면 슬라이더를 던지자.’
단순하지만 계획대로 되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겠지, 하지만 이런 패턴은 다카기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빙고’
앞발을 홈 플레이트에 붙이면서 타격, 타구가 우중간에 떨어지면서 다카기는 고시엔 통산 첫 안타를 만들어냈다.
‘이게 안타를 맞는다고?’
포수가 던져 준 공을 받은 마이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코스로 던진 공에 이런 타구가 나올 수 있는 건가? 거기다 허리가 빠지면서 밀어냈는데 생각보다 멀리 가는 타구, 다음 타석은 확실하게 빼야겠다는 부담을 느꼈다.
‘초구부터 간다.’
다음 타자 이시다는 초구를 노리고 들어갔다.
상대가 병살을 노린다면 원활한 송구를 위해 유격수가 2루 커버를 들어오겠지. 좌타자 입장에선 밀어치는 타격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이시다는 그런 타격에 어려움을 느꼈다.
“공은 여자랑 비슷한 거다.”
“여자요?”
“그래, 때론 강하게 어떨 땐 살살 달래줘야 하지. 그래서 야구가 여자만큼 어렵고 섬세한 거다.”
“에이 ~ 코치님이 그런 말씀 하시니까 전혀 설득력이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도 타카코 선생님한테 존댓말 쓰시잖아요.”
“누가 그래 인마?”
그땐 장난처럼 웃고 떠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다카기 저 녀석은 툭 밀어도 공이 뻗어나가는데 나는 왜 그게 안 되는 걸까. 그래도 살살 달랜다는 느낌으로 공을 밀어냈다.
‘이건 너무 약하나? 조금 더 강하게?’
하지만 뒤로 밀린 타구(파울). 이 놈의 공은 뭐가 이렇게 까다로운 건지, 그래도 꾹 참고 달래기에 나섰다.
깡 ~ !
[다시 파울, 이시다 선수가 끈질긴 승부를 펼치고 있습니다.]
[마이키 선수는 지금처럼 멀리 던져야 됩니다. 그게 최선이에요]
가나가와의 이시하라 포수는 노선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좌타자 상대에 최적화 된 투구 폼을 가지고 바깥 쪽 승부를 안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커트는 커트일 뿐,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깡 ~ !
[밀어낸 타구가 유격수 정면!! 2루!! 1루에는 던지지 못합니다! 1루 주자만 아웃 되면서 1사 주자 1루가 됩니다.]
[지금은 2루수가 우측에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에 커버가 조금 늦었죠. 역동작으로 송구를 해야 했기 때문에 병살은 어려웠습니다]
최악은 면했지만 1루에 안착한 이시다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나는 다카기처럼 칠 수 없는 건지, 노력이라면 부족하게 한 적 없다. 거기다 저 녀석보다 2년이나 많은데 기술에서 밀리고 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다.
“저 좀 도와주세요.”
한편, 벤치로 돌아온 다카기는 선배들의 활약을 독려했다.
첫 타석에서 안타를 만들었으니 투수는 확실하게 빼는 투구를 하겠지, 선배들이 날 보호해주지 못하면 볼넷이나 얻어낼 뿐이라며 앓는 소리를 늘어놨다.
“넌 볼넷이 그렇게 싫냐?”
“당연하죠. 볼넷은 기껏해야 1보 전진이잖아요.”
다카기는 볼넷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볼넷은 잘해봤자 1보 전진, 하지만 일단 치면 그 이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강타자가 볼 몇 개 지켜보다 나가는 게 팬들을 위하는 길인가.
볼넷이야말로 야구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요소, 다카기는 볼넷을 없애야 야구의 역동성이 살아난다고 생각했다.
“저는 볼넷이 아웃이나 마찬가지에요. 장타를 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리는 거잖아요.”
근처에 있던 다나카 코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허풍이 지나치다고 주의를 주고 싶지만, 성과가 확실한 놈이라 태클을 걸 생각은 없었다.
‘헛소리는 아니군.’
후루타 감독도 다카기의 목소리에 고민을 거듭했다.
여기서 후속타자들이 무력시위를 해주지 못하면, 다카기는 볼넷이나 얻어내게 될 거다. 장타를 칠 수 있는 선수의 타석을 그런 식으로 낭비할 순 없는 법, 나 좀 보호해 달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여기서 슬라이더를 섞어주겠지?’
그 사이, 다음 타자 쿠로다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쿠로다는 지역예선에서 10타점을 올렸지만 장타에 재능은 없다. 테이블 세터가 출루하면 짧은 안타와 희생타로 타점을 쓸어 담았을 뿐, 거기다 1사 주자 1루라 안타가 나와도 득점은 어렵다.
여기서 투수가 슬라이더를 아낄 이유가 있을까?
다카기라면 몰라도 난 조금 얕잡아 보겠지, 철저하게 슬라이더를 노리고 들어갔다.
까앙 ~ !
[유격수 옆을 빠져나가는 타구!! 1루 주자는 2루를 지나 3루!! 3루까지 들어갑니다!! 1사 주자 1, 3루!! 다이이치가 선취점 기회를 잡습니다!!]
[좋은 타격이네요. 지금은 슬라이더를 노리고 친 것 같습니다]
1루에 안착한 쿠로다는 양손을 높이 들며 세리머니를 펼쳤다.
이 팀엔 다카기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경고의 메시지, 다이이치가 이 정도로 강한 팀이었던가? 도쿄 최강을 자랑하는 가나가와도 등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무라사메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쿠로다가 이런 타격을 보여줄 줄이야. 다이이치는 그동안 이시다가 이끄는 원 맨 팀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런데 이런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 내다니, 후루타 감독의 지도력을 인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