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32화 (32/361)

32화. 용병선언 - (1)

“모두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시상식이 끝난 후, 다이이치 야구부는 식당에서 소소한 회포를 풀었다.

감독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호성을 지를 기회를 노리는 학생도 있지만,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영혼도 있기 마련,

우린 정말 고시엔 본선에 진출한 건가? 양분화 된 분위기 속에서 다카기는 중립을 지켰다.

“에 ··· 그리고 또 ··· ”

“고시엔 제패를 위하여 건배!!”

“건배!!”

감독님의 연설이 장기전으로 이어질 기미가 보이자 다나카 코치가 선수를 쳤다. 후루타 감독은 코치에게 눈치를 줬지만 흥겨운 분위기에 그대로 휩쓸렸다.

“야, 주역인 네가 왜 그러고 있냐?”

“그래, 이런 자리에선 조금 더 잘난 척 하라고”

선배들은 말없이 음료수를 기울이는 다카기를 걸고 넘어졌다.

실전에선 한껏 잘난 척하며 관심을 끌던 녀석이 연회석에서 중후한 얼굴이 웬 말인가. 하지만 다카기는 선배들의 시비를 가볍게 털어냈다.

“이 자리에 주역 단역이 어디 있어요. 고생한 건 다 마찬가지잖아요.”

“야, 넌 요즘 일본인이 아닌 것 같다. 마치 스케토(助っ人) 같은 느낌?”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용병을 스케토라고 부른다.

선배들은 장타를 뻥뻥 때려내는 모습이 그만큼 이상적이었다는 뜻으로 한 말이겠지만, 스케토는 그렇게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다.

팀이 일원이라기보다는 당장의 성적을 위해 고용된 청부업자 정도랄까, 하지만 다카기는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용병이라 ··· 하긴 틀린 말도 아니지.’

한국 피를 타고 났으니 굳이 따지자면 용병이나 마찬가지, 그래도 일정기준을 채우면 일본 선수와 동등한 대우를 받지 않는가.

일본에서 태어나 15년을 살았는데, 누가 날 스케토라고 부르겠는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쪽이 비정상 아니겠는가. 기분 나쁘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너 진짜 혼혈 아니냐?”

“맞아, 이 자식은 뭔가 수상해.”

그냥 넘어갈 것이지 분위기에 올라탄 선배들은 무리수를 던졌다.

1학년 주제에 180이 훌쩍 넘는 키, 이국적인 마스크 여기에 괴물 같은 운동센스까지 갖추다니 뭔가 숨기는 게 틀림없다며 후배를 몰아세웠다.

‘그냥 털어놔 버려?’

다카기는 슬쩍 분위기를 살폈다.

이대로 장난으로 넘긴다면 굳이 말할 필요 없지만, 진실을 밝힐 생각도 있었다.

자이니치라는 걸 별로 부끄러워한 적도 업고 그게 계속 숨길 일인가. 뭣보다 겨우 그 정도로 날 무리에서 밀어낼 인간들이라면 가깝게 지낼 가치도 없지 않은가.

선배들이 한 번 더 치고 들어오면 반격을 가하기로 했다.

‘왜 안 치고 들어오지?’

싱겁게 시리 찔러보다 내빼버리는 선배들, 치고 들어온 건 오히려 감독이었다.

“다카기, 이 자리에서 말 해둘 게 있다.”

“네. 말씀하십쇼.”

“결과는 좋았지만 오늘 홈 스틸은 조금 위험했다. 결과를 떠나서 그런 플레이는 앞으로 자중해라.”

주축 선수가 도루나 주루 플레이로 부상을 당하는 일은 흔하다.

다카기는 이제 야구부에서 대체 불가능한 전력, 도루를 할 거면 차라리 영웅스윙을 하라며 잔소리를 덧붙였다.

“감독님 말씀도 이해는 됩니다만, 그런 플레이가 잘못 됐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어째서?”

“감독님은 프로선수로 뛸 때 지금만큼 야구가 즐거우셨나요? 아마 아니었을 겁니다. 프로니까 책임질 것도 많고 그만큼 부담도 되셨겠죠.”

허를 찔린 감독은 할 말을 잃었다.

신인왕 후보에 오르고 올스타에도 뽑혔으니, 인생의 황금기를 논한다면 그때가 틀림없다. 하지만 야구를 정말 즐겼던 때는 언제인가?

부상과 부진에 시달리다 벗어던진 유니폼, 코치직 제안도 있었는데 나는 왜 고교야구를 택한 걸까.

혹시 야구를 진심으로 즐겼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저는 지금이 야구를 가장 즐길 수 있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감독님께서 절 아껴주시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어중간하게 보내고 싶진 않습니다.”

다카기의 속마음은 다나카 코치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었다.

나는 학창시절 저렇게 열정적으로 야구를 즐긴 적이 있었는가. 아직 어려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남은 시간은 충분하다며 자만한 적은 없었던가? 프로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한 건 역시 썩어빠진 정신 상태였다.

‘나는 재능이 없어. 여기까지가 한계인 건가?’

한계에 부딪치면 내 재능부터 탓했다.

하지만 그런 변명은 꿈에서 도망치기 좋은 구실만 제공할 뿐, 발전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저 녀석은 어떤가. 다카기가 어떤 중학생 시절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실력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을 지는 대략 짐작이 됐다.

평소 웃고 장난도 잘 치는 녀석이지만 훈련 때만큼은 진지해지고,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자신감과 실력은 재능이 아니라 그동안 흘린 땀과 눈물에 비례하는 것 아닐까요?”

이게 어린 녀석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여론은 다 저 녀석을 천재라고 띄워주고 있지만, 그 뒤에 얼마나 깊은 인고의 세월이 있었겠는가. 오늘따라 녀석의 얼굴이 더욱 빛나 보였다.

“그래, 하고 싶은 거 다 해 봐라.”

후루타 감독은 다카기의 플레이를 인정했다.

고교야구는 투수가 10 ~ 12초 내에 공을 던지기 때문에 벤치가 작전을 두고 고심할 여유가 별로 없고, 이런 특수성 때문에 머리싸움보다 감이 더 큰 영향을 발휘할 때가 적지 않다.

무모하긴 했지만 홈 스틸이 경기 흐름을 바꿔놨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리고 내가 가장 야구를 즐길 수 있는 때는 지금이라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 이상의 참견은 무의미했다.

* * *

한편, 고시엔 본선진출을 이룬 각 지역의 야구부는 하나 둘 결전이 벌어지는 오소카에 집결했다.

다카기를 영입하려 했던 가나가와 고교도 그 중 하나, 유력 우승 후보였던 하라카시 - 키타마치가 연달아 탈락했지만 3류 악당처럼 미소는 짓지 않았다.

‘실력이 있으니 올라왔겠지.’

다이이치는 지역예선 9연승을 달리는 동안 15실점, 62점이라는 완벽한 공수조화를 보여줬다.

이게 정말 대진운이 좋아서 얻어낸 결과일까?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3류 악당, 고시엔에서 쓴 맛 단 맛 다 경험한 무라사메 감독은 타격 코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다카기의 타격 영상을 돌려봤다.

“보십쇼. 이 타이밍에도 자세가 고정 돼 있습니다.”

“으음 ··· 확실히 그렇군.”

스트라이드가 넓은 타자는 변화구에 약점을 드러내는 게 상식, 하지만 다카기는 변화구 타이밍에 발을 뻗을 때까지 안정된 밸런스를 보였다.

한 마디로 비상식적, 타격 기술도 수준급이라 약점이 안 보였다.

‘마이키가 다카기를 잡아낼 수 있을까?’

가나가와 고교는 본선무대 선발을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다이이치의 핵심 타선은 다카기 - 이시다 - 쿠로다 - 이시이 - 사토 - 시노자키, 이 중 4명이 좌타자다. 그렇다면 좌투수를 앞세우는 게 맞겠지만, 상성을 따져보면 다카기는 마이키의 천적이다.

마이키 요시토모(3학년)의 투구 폼은 발이 1루로 향하는 전형적인 크로스 파이어, 좌투수가 좌타자를 잡아내는데 최적화 됐지만, 우타자를 상대할 땐 투구 궤적이 노출된다는 단점이 있다.

물론 우타자 몸 쪽으로 파고드는 커터나 슬라이더가 있다면 약점을 보완할 수 있지만, 고등학생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할 순 없지 않은가.

한창 물이 오른 타자에게 어정쩡한 슬라이더가 뭘 의미하는 지, 무라사메 감독은 잘 알고 있었다.

“다이이치는 지역 예선에서 7번이나 1회 득점을 만들어 냈습니다. 다카기를 막지 못하면 말려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 코치도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하지만 다카기 한 명 때문에 마이키를 올리지 않겠다니, 그렇게 민감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마이키의 슬라이더라면 다카기를 잡아낼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이키로 밀고 가시죠.”

코치들의 의견이 쏟아졌지만 무라사메 감독은 결정을 망설였다.

여론은 다카기의 공격력만 집중조명하고 있는데 그 이면엔 무서울 정도로 정확한 선구안이 숨어있다.

가나가와 고교 분석 팀은 지역예선에서 다카기가 상대한 126구를 철저히 분석, 그 중 70개가 볼이었다는 걸 밝혀냈다.

볼에 방망이가 따라 나온 건 9번 뿐, 이 와중에도 안타 3개를 만들어 냈다. 결국 투수는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밖에 없었고 다카기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타격이 늘 좋을 순 없지. 지역예선에서 7할을 쳤으니 본선에선 기세가 꺾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데이터를 따져보면 본선에서 다카기의 기세가 꺾일 거란 예측은 위험했다.

다카기는 피해가야 할 상대, 무라사메 감독은 고심 끝에 마이키를 선발로 내세우기로 했지만 찝찝한 뒷맛을 남겼다.

* * *

“잘 잤냐?”

“아니 ··· 긴장돼서 잠이 안 와.”

드디어 찾아온 고시엔 개막전,

다이이치 야구부는 기숙사 앞에 하나 둘 모여들었다.

다른 야구부처럼 원정을 오는 건 아니지만 다이이치는 전국에서 수재들이 모여드는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이 많은 건 당연하다.

물론 집에서 통학하거나 학교 근처의 집을 구한 녀석도 있지만, 오늘만큼은 방학을 맞아 텅 빈 기숙사를 야구부 숙소로 활용했다.

“잘 잤어?”

“잠자리가 바뀌어서 몸이 좀 뻐근하네요.”

늦잠을 잔 다카기는 사나에 선배의 관심에 너스레를 떨었다.

할아버지가 집도 학교 근처에 잡아줬겠다. 굳이 여기서 잘 이유는 없었지만, 기숙사 생활이라는 것도 한번 즐겨보고 싶었다.

“경기하는데 지장 없는 거지?”

“훗 ~ 걱정하지 마세요.”

홈에서 경기를 치르는 우리도 이런데 다른 야구부는 오죽하겠나. 이 정도 변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어넘겼다.

“그건 그렇고 선배는 잘 잘았어요?”

“못 잤어. 내 눈 많이 부었지?”

“음 ··· 그러네요. 앞으로 계속 카메라에 잡힐 텐데 신경 좀 쓰세요.”

다이이치 고교가 고시엔에 진출하면서 사나에가 이끄는 매니저 군단도 제법 많은 조명을 받았다.

본선에서도 승승장구하면 카메라에 잡힐 일도 많을 텐데, 팀 얼굴 마담이 이래서야 되겠나? 하지만 약이 오른 사나에는 후배 어깨를 찰지게 내리쳤다.

“꼭 그렇게 장난처럼 말을 해야 돼?”

“그럼 뭐라고 말을 해요?”

“몰라 이 바보야.”

사나에는 뚱한 얼굴로 돌아섰다.

우리의 여름은 더 길어질 거라고 의젓하게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전혀 진지하지 않은 녀석,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어색해 질 것 같아 그만뒀다.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화 낸 거 아니야.”

“그냥 웃으세요. 이러다 제가 안타 치면 웃을 거잖아요.”

후배의 반격에 사나에는 얼굴을 붉혔다.

다카기가 안타를 쳤을 때 누구보다 열렬한 반응을 보였던 사람이 누군가. 뭣보다 오늘도 그렇게 될 것 같아 괜히 짜증이 났다.

“너 상대가 누군지 알고서 하는 말이야?”

“알아요. 마이키 요시토모잖아요.”

가나가와를 대표하는 투수를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다카기는 상대가 누구든 자신이 있었다. 근거 없는 허풍이 아니라 상대의 장단점을 간파했기에 할 수 있는 말, 마이키가 승부를 피하지 않는다면 성과는 있을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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