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31화 (31/361)

31화. 이상한 군단 - (5)

‘걸러라.’

쿄우마 고교의 야마카지 감독은 마지막까지 한결 같았다.

다카기는 좋은 공을 주면 안 되는 선수, 1사 주자 만루 위기에 몰리더라도 승부를 피했다.

‘굴욕이다 ··· ’

캡틴 바바 신이치로는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 스코어는 2대 0, 마지막 9회에 희망을 걸어보자는 감독님의 뜻은 머리로 이해했다.

하지만 저 애송이에게 한방도 먹여주지 못한 이 분함은 어떻게 씻어내야 하는가. 승리로 덮으면 그만? 하지만 이 경기를 기적적으로 뒤집어도 다카기를 막아내지 못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공부 잘 하는 학생이 운동도 잘 하는 시대 아닌가요?”

생각할수록 열 받는 말, 궁지에 몰렸지만 반드시 이기겠다는 집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음 ··· 볼입니다. 역시 거르는 건가요?]

[글쎄요. 거를 거면 확실하게 하는 게 좋습니다.]

해설위원 하마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서우면 확실히 도망칠 것이지 저 애매한 코스로 들어가는 공은 뭔가. 대놓고 거르는 건 자존심 상하니 포장이라도 하겠다는 건지, 아니나 다를까 야마카지 감독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확실하게 빠지라고’

감독의 사인을 받은 포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팔을 옆으로 뺐다.

고의사구를 직감한 다카기도 경계를 풀었지만, 다음 공이 애매한 코스로 들어오자 풀었던 자세를 단단히 조였다.

까앙 ~ !!

[때렸고!! 이 타구는 좌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홈으로!! 들어옵니다!! 스코어 3대 0!! 다이이치가 고시엔 진출에 한발 더 다가섭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도망치려면 확실하게 했어야 하는데 ··· 쿄우마 고교 입장에선 아쉬운 흐름이네요.]

고의사구 안타라니,

추가 실점의 원흉을 제공한 마이타 코스케는 마운드 위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완벽한 정신 붕괴, 다른 선수들도 망연자실이라 위로를 건넬 여유가 없었다.

“이런 바보!! 바보!!”

야마카지 감독은 자기도 모르게 괴성을 내질렀다.

2대 0도 멀게 느껴지는데 3대 0이라니, 후보 선수들이 옆에 앉아 있지만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이렇게 지려고 그렇게 힘들게 훈련했어?!!”

“감독님 ··· 진정하십시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너무 분해서 눈물까지 찔끔 새어나왔다.

패배를 직감한 선수들이 눈물바다를 이룬 경우는 많이 봤지만, 감독이 이런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역대 처음, 눈치 없는 카메라맨들은 이 광경을 전파로 흘려보냈다.

“됐어!! 이제 됐어!!”

그에 비해 다이이치 벤치는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승리를 확신한 후루타 감독은 다나카 코치와 승리의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고, 사나에가 이끄는 매니저 군단도 후보 선수들과 어떻게 이 승리를 자축할지 논의를 이어갔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꽃 한 송이를 피워냈지.’

1루에 안착한 다카기는 환호에 휩싸인 벤치에 V사인을 날렸다.

3점 중 2점을 책임졌으니 이 정도면 잘난 척 해도 되지 않을까? 은근슬쩍 다카기의 아웃을 바랐던 선배들도 백기를 들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타율 0.718, 홈런 4개, 10타점으로 지역예선을 마무리 하는데,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베스트 9에 선정되는 건 당연하고, 이시다 캡틴을 제치고 MVP까지 노려볼 수 있는 활약이다.

아니,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9회는 제가 막을까요?”

8회 말이 끝나자 다카기는 등판을 자처했다.

요시다 선배가 안정적인 투구를 하고 있지만 지난 3경기 동안 132개를 던졌다. 150개를 채우면 본선 첫 경기는 등판 불가, 아직 여유가 있는 내가 나서는 게 낫지 않겠냐며 코치를 설득했다.

“웃기지 마. 마무리는 내가 한다.”

하지만 요시다는 그 제안을 뿌리쳤다.

지금까지 충분히 빛을 받은 녀석이 마지막까지 욕심을 부리다니, 15개 안으로 막아내겠다며 9회 초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이건 도대체 무슨 관계야?’

다나카 코치는 요시다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다들 너무 튀는 후배가 못 마땅한 것 같은데, 결과만 보면 그게 녀석들을 자극하고 팀의 승리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게 애증의 관계일까. 팀 분위기에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라 그냥 지켜봤다.

‘절대 올라오게 하지 않겠다.’

힘이 떨어질 만도 한데, 요시다는 더 강한 공을 던지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여기서 흔들리면 감독님은 다카기를 올리겠지, 메인 요리는 몰라도 디저트는 내줄 수 없었다.

[스윙!! 카운트는 1볼 2스트라이크가 됩니다. 지금도 151km가 나왔네요]

[계속 빠른 볼로 승부를 보고 있는데, 이게 바깥 쪽 제구가 되고 있거든요. 요시다 선수가 이런 기량을 계속 보여준다면 ··· ]

[말씀드리는 사이!! 높은 볼에 따라 나옵니다!! 삼진!! 이제 본선 진출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2개뿐입니다!!]

첫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요시다는 다카기와 눈을 마주쳤다.

네가 올라올 필요도 없다는 건데, 솔선수범하는 선배 덕분에 수고를 덜게 된 후배는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마음이 아주 넓으시군요.’

이시다 캡틴이 마운드에 오르면 솔직히 조금 피곤하다.

하지만 요시다 선배는 삼진과 플라이 볼이 많은 편, 내 덕 보지 않겠다는데 이것만큼 고마운 일이 어디에 있나. 알아서 하시라고 지켜봤다.

까앙 ~ !

“와아아 ~ !!”

다음 타자는 플라이 볼 아웃,

패배를 앞에 둔 쿄우마 고교 선수들이 슬픔에 잠긴 사이, 다이이치 선수단은 서로의 손을 붙잡고 그라운드로 튀어나갈 준비를 마쳤다.

[2구 타격!! 2루수 잡아서 1루에 ~ !! 경기 종료!! 168개 고교가 경쟁을 펼친 오사카 지역 예선은 다이이치의 승리로 막을 내립니다!!]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순간이네요. 9경기에서 62득점을 올리는 동안 실점은 겨우 15점 ··· 말 그대로 완벽한 여정이었습니다.]

야구부 창립 역사상 첫 본선 진출,

그 매듭을 지은 요시다는 시노자키 포수와 격하게 몸을 부딪쳤다. 곧이어 사방에서 날아드는 기쁨의 몸부림, 하지만 다카기는 격동의 현장과 조금 거리를 뒀다.

선배들이야 그동안 본선 진출 문턱에서 몇 번이나 넘어졌지만, 다카기는 이제 막 고교야구에 발을 들인 신예다.

9연승을 달리며 이렇다 할 어려움도 없었으니, 기쁨을 표해야 할 기준도 애매했다.

‘히라카시, 키타마치가 이 자리에 있었어도 이랬을까?’

두 학교는 그동안 돌아가면서 지역예선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들의 최종 목표는 고시엔 우승, 고시엔 4강이니 8강이니 이런 타이틀은 큰 의미가 없다.

여기서 기쁨을 표한다는 건 다이이치가 그늘 밑에 가려진 존재였다는 걸 인정하는 것 뿐, 더 높은 곳에서 만세삼창을 부르기 위해 감정은 잠시 접어뒀다.

“좀 웃어라.”

다나카 코치는 그런 제자를 툭 건드렸다.

경기를 치를 땐 여유가 넘치던 녀석이 기쁨을 표할 자리에서 겉돌 줄이야, 하지만 다카기는 씩 웃을 뿐 별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한편, 울음 섞인 목소리를 내지른 쿄우마 고교 야구부는 하나 둘 더그아웃으로 퇴장했다. 준우승자도 시상식을 치르지만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감독의 정신이 붕괴됐으니 그런 걸 치를 분위기가 아니었다.

[지금부터 시상식이 있겠습니다. 양 팀은 그라운드에 정렬해 주십시오]

눈치 없는 안내 방송,

겨우 감정을 다스린 쿄우마 고교의 캡틴 바바 신이치로는 부원들을 그라운드로 이끌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완벽한 패배, 내 여름은 이대로 끝나지만 후배들이 반드시 복수해 줄 거라며 이를 갈았다.

‘나도 죄 많은 놈이군.’

물론 다카기도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챘다.

높은 곳을 향한다는 건 누군가를 밟고 간다는 것, 이제 많은 학교들이 다이이치 고교를 타도 대상으로 삼을 거다.

적들에 둘러싸였으니 정신 차리지 않으면 높은 곳에서 끌어내려지겠지, 아랫것들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실력을 더 키우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두고 봐라. 너희들이 기어오를 틈은 없을 거다.’

캡틴이 트로피를 받아들자 웃음기 빠진 얼굴로 박수만 쳤다.

베스트 9은 확정적이고 대회 MVP도 노려볼 만한 성적인데 저 표정은 뭔가. 그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동료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그럼, 지금부터 MVP를 발표하겠습니다.”

그 사이 대회 집행위원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 영광은 4승을 책임진 이시다 캡틴에게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발칙한 신인인가, 관중석에 고요함이 내려앉자 부원들도 마른 침을 삼키며 결과를 기다렸다.

“오사카 지역예선 MVP는 ··· 타카모토 선수입니다.”

“어?!!”

이시다는 자기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너무도 두드러졌던 후배의 활약, 기대를 안 했다면 거짓말이지만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결과가 나오자 정신이 멍해졌다.

부원들은 그런 캡틴을 시상대로 밀어냈고, 트로피를 받은 이시다는 관중석을 향해 거듭 고개를 숙였다. 모자를 벗고 싶어도 눈물로 얼룩진 눈이 드러날까 두려웠다.

“야, 미안하게 됐다.”

“괜찮아요. 본선 MVP는 제가 받으면 되죠.”

마음에도 없는 캡틴의 위로에 다카기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지역예선 MVP는 하계의 왕에 불과, 정상에서 쥔 MVP 외엔 관심 없다며 선배의 속을 긁어댔다.

이제 남은 건 기념사진 촬영과 인터뷰, 사나에가 이끄는 매니저 군단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우리도 여름동안 선수들 뒤치다꺼리하며 고생했으니 좋은 자리를 차지할 권리는 있겠지, 과감하게 가운데 자리를 요구했다.

“너희들 불만 없지?”

“예”

불만이라는 게 있을 수 있겠나.

표면적인 캡틴은 이시다지만 실권자는 매니저, 요시다는 겁도 없이 그 뒤에서 손가락으로 악마의 뿔을 재현해 냈다.

평소 감독님보다 더 많이 부원들을 다그쳤던 군기반장, 근처에 있던 부원들도 시치미를 떼고 범죄를 묵인했다.

“지금 찍는 사진 내일 신문 1면에 올라가는 거죠?”

“예”

“편집 없이 그대로 올려주세요.”

눈치 없이 입을 놀리는 다카기, 요시다는 순간 뜨끔 했지만 사나에는 눈치 채지 못했고, 그렇게 기념촬영이 끝났다.

이어지는 주요 선수들의 인터뷰, MVP를 수상한 이시다가 많은 관심을 차지했지만 다카기의 인기도 그에 못지않았다.

“다카기 선수, 우승이 확정됐을 때 별로 기뻐하지 않은 것 같은데 ···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는 내년도 그 다음에도 계속 이 자리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 승자가 됐다는 건 적이 많아졌다는 뜻이죠, 그렇게 기뻐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질문을 던진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선수가 대활약을 펼치면 자만할 법도 한데, 자기 목을 노리는 적을 경계하고 있었을 줄이야.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다시 확인했다.

“그럼, 지금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 노력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앞으로 많은 도전을 받게 될 텐데,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하도록 해줄 생각입니다.”

뭐 이런 학생이 다 있는지, 살기를 느낀 기자들은 인터뷰가 끝나자 후루타 감독에게 달려갔다.

“다카기 선수가 이런 각오를 내비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녀석이 경기 중 가벼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건 허세가 아니라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바탕이 된 행동입니다. 그리고 욕심도 대단한 녀석이라 여기서 만족하진 않을 겁니다.”

“감독님은 다카기 선수가 어디까지 성장 할 거라고 보십니까?”

“글쎄요. 제가 약간 다듬어 준 부분은 있지만, 다카기는 입부했을 때 손 볼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기본이 잡혀 있었습니다. 다만, 이른 성공이 자만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됐는데 ··· 그런 정신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앞으로 더욱 성장하겠죠. 저도 그 녀석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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