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30화 (30/361)

30화. 이상한 군단 - (4)

[자, 여기서 발을 풀어보는군요. 흥미로운 승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슴은 승부를 원하고 있는데 머리로는 그게 안 되는 상황이거든요. 그래도 저는 에가노 선수가 한 번 부딪쳐 봤으면 좋겠네요.]

인터벌이 길어졌지만 주심은 아무 제제도 가하지 않았다.

투수가 시간을 끌면 규정에 따라 경고를 줘도 되지만 이 상황에서 그게 웬 말인가. 달아오르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뿐, 그 정도 눈치는 발휘했다.

‘뭐해, 어서 거르라고’

야마카지 감독의 생각은 확고했다.

살다보면 목적을 위해 머리를 숙여야 할 때도 있다. 어떻게 올라온 결승전인데, 자존심 때문에 위험을 무릅쓸 순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기서 물러나면 다시는 야구를 못 할 것 같습니다.’

에가노는 승부를 택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감독의 지시를 어긴 적이 없지만, 오늘 만큼은 고집을 부렸다.

[몸 쪽!! 주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습니다!!]

[이제 카운트는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 승부를 걸긴 어려워졌네요.]

다카기는 투수와 눈빛을 교환했다.

스트라이크를 얻어내기엔 깊숙했던 타구, 몰리면 위험하다는 두려움이 발목을 잡은 모양인데, 방망이를 어깨에 맨 채 대충 자세를 잡았다.

‘거를 테면 걸러라, 도망치는 놈 따라가서 두들겨 팰 생각은 없어.’

스트라이크를 던져보라는 도발, 승부를 재촉하는 관중, 성난 감독의 질책에 둘러싸인 에가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왜 승부를 못 하게 하는 거야?’

그 모습을 바라보던 쿄우마 고교의 캡틴 바바 신이치로는 불만을 중얼거렸다.

팀을 결승전까지 이끈 감독님의 지도력은 의심할 이유가 없다. 선수 개인보다 팀플레이를 강조하는 스타일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닌데, 때로는 선수 한 명이 경기의 흐름을 바꾸지 않는가?

지금 다이이치의 기세를 이끌고 있는 건 다카기, 저 녀석의 콧대를 꺾어놔야 어떻게든 될 거 아닌가. 신이치로는 승부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내가 너 못 잡으면 야구 그만둔다.’

마음을 정한 에가노는 스트라이크를 우겨넣었다.

이제 풀 카운트, 그제야 다카기는 제대로 된 자세를 잡았다.

‘이런 변태 자식 ··· ’

더그아웃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이이치의 주전 2루수 사토는 고개를 저었다. 투구를 할 때 주자가 도루를 하든 말든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지나가라며 길을 내주는 상대 멱살까지 잡아야 되나? 정말 한 방 날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건지, 숨 쉬는 것도 잊고 결과를 지켜봤다.

‘나 숨 안 쉬고 있었던 거야?’

한편, 관중석에 앉은 모토즈미 스즈에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태어나서 뭔가에 이렇게 열중해 본 건 처음, 야구를 좋아하게 된 걸까? 그게 아니면 좋아하는 남자를 응원하고 싶은 것뿐일까.

잠깐 딴 생각을 했지만 이어지는 다카기의 활약에 시선을 돌렸다.

[떨어지는 볼! 따라 나오지 않습니다!! 다카기 선수가 세 번째 타석도 출루합니다!!]

[이렇게 되면 에가노 선수가 심리적으로 많이 흔들리겠네요.]

방망이를 내던진 다카기는 1루로 천천히 걸어갔다.

마지막까지 투수의 도전을 기다렸던 승부사의 모습, 그에 비해 고개를 숙인 에가노의 모습은 얼마나 초라한가. 방송국은 두 선수의 얼굴을 교차시켜 극적 연출을 끌어올렸다.

“우우 ~ 우 ~ ”

“와아아 ~ !!”

투수를 질책하는 야유와 타자를 환호하는 함성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한껏 기대했는데 겨우 볼넷이라니, 영화를 보는 관객 입장으로 비유하면 하이라이트 순간에 흐름을 끊어버린 감독의 횡포에 놀아난 꼴 아닌가.

재미없는 야구를 하는 팀은 응원 받을 자격이 없는 법. 홈 스틸에 홈런, 여기에 극적 연출까지 좋았던 선수가 환호를 독차지하는 건 당연했다.

“다카기!! 다카기!!”

다이이치를 응원하는 소녀군단의 기세도 덩달아 높아졌다.

오늘 따라 두르러지는 다카기의 활약, 얼핏 들으면 팬클럽으로 오해 될 정도, 소녀군단 주위를 에워싼 관중들도 다카기를 연호하면서 분위기는 다이이치 쪽으로 기울었다.

‘여기서 끝낸다.’

후속타자 이시다는 흥분한 어깨를 다스리며 타석에 들어섰다.

무너진 에가노의 자존심, 불타오르는 분위기, 여기가 승부처라는 건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알고 있다.

‘우리 정말 본선 가는 거냐?’

타석에 들어서기 전에 1루에 진출한 다카기를 힐끗 쳐다봤다.

예전엔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이제는 후배들이 내 자리를 채울 만큼 성장해버렸다. 본선 진출이라는 물음의 답은 이제 저 녀석들이 쥐고 있고 차분하게 그 답을 기다렸다.

‘아차!!’

낮은 공을 들어 올렸는데 너무 앞에서 맞으면서 땅볼이 되고 말았다.

분위기 반전의 기회, 쿄우마 고교의 2루수 사카모토는 달려오는 1루 주자에 글러브를 휘둘렀다.

‘헛스윙?!’

하지만 닿지 않은 태그, 그래도 사카모토는 태연하게 1루 송구를 했고 2루심이 아웃을 선언하면서 병살타가 돼 버렸다.

‘이게 아웃이라고?’

2루심과 잠시 눈을 마주친 다카기는 그대로 벤치로 향했다.

불합리한 판정에 삼진을 당해도 항의 없이 벤치로 향하는 게 고교야구, 아니, 심판 항의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경기가 끝난 뒤 본부 심판위원장과 지역 심판위원장이 만나 뭐가 잘못됐는지 토론하는 게 고작, 싸워도 얻을 게 없는데 핏대 올려봤자 얻을 게 없었다.

‘난 더 높은 곳으로 가야한다고’

높은 곳을 향하면 손해와 불합리함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하는 법, 이시다도 말없이 돌아서는 후배를 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라.”

다나카 코치도 성과 없이 돌아온 제자들을 다독였다.

내 속도 쓰리지만 가장 마음이 상한 건 제자들, 다른 선수들도 가라앉은 분위기는 애써 외면했다.

‘면목이 없네. 어떻게 여기서 병살을 치냐.’

벤치에 앉은 이시다는 본인의 형편없는 플레이를 질책했다.

타격을 하다 보면 병살도 나오는 건데, 2대 0에서 점수 차를 벌릴 수 있던 상황이라 아쉬움은 더했다.

“선배, 냄새나요.”

이때, 근처에 있던 다카기가 거한 한방을 날렸다.

병살을 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다이이치 선수단이 모를 리가 없다. 장난처럼 하던 말을 캡틴에게 하다니, 부원들은 순간 뭔 일 터지는 게 아닌가 마른 침을 삼켰다.

“야!! 너라고 병살 안 칠 것 같냐?!!”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캡틴의 호통에 다카기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리드오프라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타석을 맞이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거기다 타격도 땅볼보다 플라이에 초점을 맞췄으니, 병살이 나올 확률은 희박했다.

‘어휴 ~ 저걸 그냥’

부끄러움에서 허우적거리던 이시다는 분노에 휩싸였다.

축 늘어진 것보다는 화를 내는 게 낫겠지. 저 녀석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이해했지만, 너무 무례해서 속이 쓰렸다.

‘냄새난다고? 그래, 치워줄게’

이시다는 보란 듯이 마운드에서 위력투를 펼쳤다.

내가 싼 뭐는 내가 치우는 게 맞겠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후루타 감독은 일찌감치 고시엔 본선 진출이라는 파도에 올라탔다.

‘무리할 이유가 없지.’

이시다의 투구는 70개에서 끊었다.

95개 이상을 던지면 하루 쉬어야 하는 게 대회 규정, 3일 동안 던진 투구가 150개가 넘어도 마찬가지다.

이시다는 지난 3년 동안 팀의 암흑기를 이끌어 준 기둥, 본선 무대 선발로 세워주기 위해 무리시키지 않았다.

‘주먹 들어간다. 이 꽉 깨물어라.’

마운드를 이어받은 요시다는 강속구를 던져댔다.

일부 여론은 우리가 운이 좋았다고 떠들어 대고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여기까지 올라오지도 못한 히라카시와 키타마치는 뭐가 되나?

포수 미트는 익명이라는 그림자에 숨은 머저리들의 주둥이, 어디 또 지껄여 보라며 강속구를 박아 넣었다.

깡 ~ !

[파울, 이번에는 148km가 나왔습니다.]

[다이이치의 약진이 올해로 끝날 거 같지는 않습니다. 이시다 선수가 은퇴해도 요시다 선수를 필두로 한 2학년은 건재할 테고, 뭣보다 다카기 선수의 존재감이 너무 크네요.]

요시다도 다카기의 존재를 은근 의식하며 마운드에 올랐다.

이시다 캡틴과 알고 지낸지 2년이 넘었고 서로 많이 친해졌지만, 본인이 정한 선은 절대 넘지 않았다.

그런데 다카기 저 녀석은 입부한지 몇 달 밖에 안 된 놈이 선배들 영역을 훅 치고 들어온다. 거기다 방금 전 일도 이시다 캡틴이 웃어넘기지 않았다면 분위기가 어색해 질 뻔 했다.

‘저 자식, 감독님 총애 믿고 까부는 건가.’

정말 그렇다면 무슨 조치를 취해야겠지, 하지만 야구부 여론은 저 녀석에게 호의적이다.

거기다 실력도 받쳐주는데 내가 뭐라고 해봤자 효과가 있을까? 여기서 뭔가 보여주지 않으면 선배의 위엄은 바닥으로 떨어질 뿐, 실력이 없으면 차기 캡틴의 위엄도 없었다.

‘네 도움 따윈 필요 없어.’

요시다는 계속 강속구로 승부를 봤다.

캡틴은 제구를 앞세우는 스타일이라 내야진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나는 구위를 앞세우는 유형, 저 자식의 도움 따윈 받지 않겠다며 오기를 부렸다.

‘왜 거기로 가는 건데?!’

유격수 강습, 백핸드로 타구를 막아낸 다카기는 차분하게 1루 송구를 마무리 했다.

별 반응 없이 쿨 하게 돌아서는 녀석, 쓸데없이 멋진 플레이에 요시다의 가슴은 질투가 휘몰아 쳤다.

“너희들 너무 다카기만 응원하는 거 아니니?”

한편, 응원단을 이끄는 타카코 선생님은 제자들을 다독였다.

누가 보면 다이이치 응원단이 아니라 다카기 팬클럽으로 오해될 정도, 저 아이가 빼어난 활약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다른 선수들도 가끔 언급하라며 주의를 줬다.

“삼진 당한 선수한테 환호하는 건 아니잖아요.”

“잘 하는 선수 응원하는 건 당연하죠. 뭣보다 잘생겼어요.”

하지만 소녀군단의 취향은 확고했다.

우리는 편애가 아니라 정당한 응원을 하고 있을 뿐, 제자들의 반격에 타카코 선생님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들 왜 쟤가 좋다고 하는 거지?’

다카기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여자들은 원래 저런 불량함에 끌리는 건가. 외모도 몸가짐도 단정한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는 타카코 선생님은 제자들의 취향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너도 망신 한 번 당해봐라.’

경기는 흘러 다이이치의 8회 말 공격, 선두 타자 사토는 출루를 다짐하며 타석에 섰다.

장난이라도 그렇지 병살을 친 캡틴에게 냄새난다는 말이 할 소린가? 그동안 너무 오냐 오냐 한 것 같은데, 버릇을 고쳐주겠다며 이를 갈았다.

그건 다른 3학년들도 마찬가지, 오늘 다카기 앞에 주자를 차려주지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망신당할 기회를 제공하기로 했다.

까앙 ~ !!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사토 선수가 오늘 경기 첫 안타를 만들어냅니다!!]

[이건 위험하네요. 여기서 한 점 더 내준다면 쿄우마 고교의 역전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선배들이 분발해주면서 다카기는 1사 주자 1, 2루 기회를 맞이했다.

냄새 풍기기 딱 좋은 상황, 하지만 날개를 펼친 애송이에게 두려울 건 없었다.

‘사방이 적이네. 뭐, 이것도 나쁘지 않지’

내가 병살을 치기 바라는 건 선배들도 마찬가지겠지, 눈치는 100단이라 이미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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