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이상한 군단 - (3)
‘뭐야?!!’
쿄우마 고교의 투수 에가노는 뒤늦게 홈 스틸을 눈치 챘다.
포수는 투수에게 과녁 같은 존재다. 저렇게 허둥대는데 제대로 송구를 할 수 있을까. 거기다 이제 막 와인드업을 마친 상황, 다카기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미끄러지는 것도 우아하게’
군더더기 없는 슬라이딩, 홈 플레이트를 찍은 다카기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관중석은 이미 충격과 열광의 도가니, 그에 반해 한방 먹은 쿄우마 고교 벤치는 차갑게 식어버렸다.
“야!! 너 제정신이냐?!!”
“이런 발칙한 자식!!”
다이이치 선수단은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다카기를 거친 환영으로 맞이했다. 홈으로 뛰는 순간 숨이 멎을 뻔 했지만 살아 돌아 왔으니 영웅 대접을 해줬다.
‘정말이지 심장에 안 좋군.’
후루타 감독도 놀란 가슴을 다스렸다.
이런 단독행위는 고교야구에서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실전에서 감을 발휘하는 건 선수의 몫, 뭔가 확신이 있었으니 뛴 거 아니겠나. 거기다 결과도 좋았으니 질책은 잠시 뒤로 미뤘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냐.’
선취점을 냈지만 타석에 선 쿠로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무사 주자 2, 3루에서 홈스틸이라니, 거기다 아직 1회다. 왜 저렇게 무리한 플레이를 한 건지, 날 믿지 못하는 것 같아 서운했다.
‘번트를 갈까.’
쿠로다 감독은 번트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주자가 2루에 있으니 번트가 나오면 3루수는 움직이기 어렵다. 번트가 성공하면 추가점을 낼 가능성은 높아지지만, 쿠로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진 않았다.
‘다 저 녀석이 멋대로 벌인 일이다. 난 널 믿는다.’
무사 주자 2, 3루에서 홈 스틸이 나왔는데 번트까지 지시하는 건 3번 타자를 무시하는 일, 그냥 지켜봤다.
‘내 영역을 벗어난 일이다.’
쿄우마 고교의 감독 야마카지도 손을 놔 버렸다.
무사 주자 2루에서 상대가 택할 작전은 얼마든지 있다. 그걸 다 따져가며 대책을 세우는 건 불가능, 착실하게 아웃카운트를 늘려가겠다는 마음으로 대처하는 게 최선이었다.
‘일단 하나만 잡자.’
에가노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이번 대회에서 다이이치는 1회 타율이 무려 0.450에 이른다.
다카기 - 이시다 - 쿠로다 - 이시이로 이어지는 타선은 탄탄하지만 나머지는 그럭저럭, 초반 공세가 매서울 거란 건 예상했던 일 아닌가.
연속 안타를 맞으며 흔들렸지만 아웃 하나 잡으면 분위기도 바뀌겠지, 2루 주자는 잊고 마음을 비웠다.
‘느린 땅볼 굴려서 주자를 3루로 보내자.’
쿠로다도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쿠로다 뿐만 아니라 많은 고등학생들은 스윙이 어깨 위에서 내려오는 다운스윙을 한다.
히팅 포인트가 뒤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헛스윙을 줄일 수 있고, 까다로운 몸 쪽 공도 커트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장타는 거의 포기하는 타입, 깎여 맞으면 플라이 볼도 나오지만 타구 속도가 받쳐주지 않으면 거의 다 아웃이다.
결국 많은 학생들이 땅볼 양산에 집중하는데, 일본 프로야구에 거포가 부족한 현상도 이런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작품은 하루 이틀 사이에 나오는 게 아니지. 좀 더 도전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 ’
후루타 감독은 쿠로다를 거포로 키우기 위해 나름대로 애정을 줬지만, 안타깝게도 발전은 없었다.
다운스윙은 비교적 빨리 써먹을 수 있어 지도자들이 선호하는 기술, 하지만 그만큼 선수들의 특징이 획일화 돼 버린다.
이게 정말 학생의 미래와 프로야구 발전을 위하는 길인가? 하지만 지도자의 방식만 탓 할 수도 없다.
애정을 줘도 크지 못하는 싹이 있다. 쿠로다는 소심해서 잘 안 되면 어깨가 위축되는 성격, 헛스윙을 해도 병살을 쳐도 달려드는 도전 정신을 발휘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지켜보는 입장에선 안타까웠다.
‘아 ··· ’
결과는 투수 앞 땅볼, 2루 주자를 묶은 에가노가 1루 송구를 하면서 첫 번째 아웃카운트가 올라갔다.
지금까지 10타점이나 기록한 내가 이 중요한 순간에 진루타를 만들지 못하다니, 쿠로다는 우중충한 분위기를 뿜어내며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다음 타자 이시이도 땅볼 아웃,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다카기의 모험은 중계진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네다 씨, 만약 이대로 이닝이 끝난다면 다카기 선수의 홈 스틸은 1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죠?]
[글쎄요. 그 답은 일단 보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캐스터의 질문에 하네다 해설위원은 말을 아꼈다.
프로야구중계라면 몰라도 고교야구에서 선수의 플레이를 평가하는 건 어렵다. 프로선수가 1루에서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는 건 욕 먹을 일이지만 고교야구에선 당연한 일, 무사 주자 3루에서 홈 스틸을 한 걸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는 무모했다고 봤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큰 거 하나 노려보자.’
경기는 흘러 2회 말 다이이치의 공격, 다카기는 침체에 빠진 공세를 열기 위해 타석에 섰다.
방망이가 투수 쪽으로 향하는 타격 폼이라 스윙이 어깨에서 내려오는 건 다른 선수들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뒤에서 큰 원을 그리며 어퍼컷으로 돌아 나오는 스윙은 정석과 거리가 멀다. 여기에 넓은 스트라이드는 덤, 개성을 이해해주는 감독을 만나지 못했다면 사장 됐겠지만 임자를 만난 덕분에 마음껏 날뛰었다.
까아앙 ~ !!
[높게 쏘아올린 타구!! 어디까지 가는 건가요?!! 백스크린 뒤로 넘어갑니다!!!! 다카기 선수의 이번 대회 4번 째 홈런!! 다이이치가 3대 0으로 달아납니다!!]
[지금은 낮은 공이었는데, 와아 ~ 이걸 장외로 날리나요?]
홈런을 허용한 에가노는 충격에 휩싸였다.
분명 낮게 던졌는데 이게 넘어가다니, 하지만 어퍼 스윙에 익숙한 선수에겐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내 야구 인생 역사상 최고의 물건이다.’
1루를 지나 2루로 가는 제자의 등을 바라보던 후루타 감독은 전율에 휩싸였다.
지난 4월 때만 해도, 다카기는 저렇게 큰 스윙을 하는 녀석은 아니었다.
앞발을 닫아놓고 짧게 끊어 치는 스타일, 손목 힘이 강해 심심찮게 장타를 했지만 전형적인 거포와는 거리가 멀었다.
후루타 감독이 처방한 건 약간의 자세 수정 뿐, 그때도 괴물이었지만 지금은 상상을 초월하는 돌연변이로 진화해버렸다.
스트라이드가 크다는 건 단점이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장점으로 승화해버렸다. 밸런스가 좋아서 무게 중심이 낮아지고 그만큼 자세도 안정적, 지금 저 녀석에게 낮은 공을 던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거기다 원래 짧게 치던 녀석이라 상황에 맞는 타격을 할 줄 안다는 것도 장점, 내 품에 있는 선수라 감싸고도는 게 아니라 아무리 봐도 약점을 찾기 어려웠다.
타격기술은 이미 완성형, 아직 어려서 파워도 더 붙을 텐데 도대체 어디까지 성장할까, 어쨌든 일본을 대표할 선수가 될 거라는 건 분명했다.
‘저런 괴물 자식, 천재는 천재라는 건가.’
홈런을 맞은 건 쿄우마 고교지만, 다이이치 선수단이 받은 충격도 그에 못지않았다.
좀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고교야구 생태계를 파괴하는 돌연변이, 8할 타자가 홈런까지 치는 건 반칙 아닌가. 우리 팀에 들어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녀석도 있었다.
“꺄아아아 ~ !!”
“다카기!! 다카기!! 다카기!!”
다이이치를 응원하는 소녀군단의 기세는 홈런만큼 하늘 높이 치솟았다.
용돈도 받는데 이런 편안한 자리에서 멋진 남자의 활약을 볼 수 있다니, 이 기세가 고시엔 결승전까지 이어지길 바랐다.
‘아무것도 안 들려’
하지만 다카기는 응원단에 별 다른 눈길은 주지 않았다.
하는 일에 비해 매니저 군단이 푸대접을 받고 있는 건 사실, 좀 예쁜 소녀들이 추파를 보낸다고 지조를 잃진 않았다.
“아 ~ 머리스타일 구겨져요.”
더그아웃에 입성한 다카기는 동료들의 애정 섞인 구타를 심란한 얼굴로 받아넘겼다.
말총머리는 이제 내 상징인데 다들 머리만 집중 공략하고 있으니, 더그아웃 입구에 달린 거울을 보며 스타일을 재정비했다.
‘그 자식 참 잘났네.’
공부만 좀 더 신경 쓰면 나무랄 게 없는 거울 속의 남자, 사방에 깔린 방송카메라도 자신감 넘치는 옆모습을 집중 조명했다.
그 순간 오사카 지역방송 시청률은 49%까지 상승, 요동치는 시청률에 방송국 관계자들은 미소를 지었다.
오사카를 대표하는 히라카시, 키타마치 고교가 모두 충격의 패배를 당하면서 시청률이 한때 22%까지 떨어졌는데, 이렇게 구세주가 나타날 줄이야. 확실하게 밀어주기 위해 잠시 동안 다른 곳은 비추지 않았다.
‘여기 좀 봐주세요.’
더그아웃 옆에 진을 친 카메라 기자들도 바쁘긴 마찬가지, 잠깐 눈이 마주치기도 했지만 다카기는 이내 시선을 돌려버렸다.
확실히 중학교 대회와 고등학교 대회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 아직 카메라의 관심이 익숙지 않았지만 즐겁게 받아들였다.
‘쟤 진짜 한다면 하네.’
매니저 사나에는 그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지난 4월 초, 다카기는 사나에 앞에서 내 가치는 100억 엔 정도 된다는 농담을 던졌다.
그때는 허풍에 불과했지만 조금씩 현실이 되기 시작한 다짐, 더 비싸지기 전에 투자를 서두르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날 여자로 본다는 확신이 없어 제자리걸음에 머물고 있다.
“선배, 3점 차는 좀 불안하죠?”
요즘은 친한 척도 잘 안 하는데 갑자기 말을 걸어오다니, 사나에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뭐 ··· 뭐가?”
“2점 차는 좀 불안하냐고 물었잖아요. 그래서 선배 얼굴이 그렇게 굳은 거 아니에요?”
“ ··· 그건 그렇지.”
“걱정 마세요. 제가 또 한 방 날리고 올게요.”
끝을 모르는 자신감에 사나에는 피식 웃고 말았다. 허풍 그만 떨라고 타박을 주고 싶지만 왠지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 입은 다물었다.
“다카기는 무조건 걸러라.”
한편, 쿄우마 고교의 야마카지 감독은 결단을 내렸다.
데뷔 첫 타석부터 히라타니에게 홈런을 빼앗은 녀석, 150km가 넘는 강속구도 낮게 제구 된 공도 넘겨버리면 도대체 뭘 던져야 한단 말인가.
뭣보다 고등학교 1학년 주제에 백스크린을 넘겨버리다니, 저런 늘씬한 몸에서 어떻게 저런 파워를 뿜어내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우 ~ 우 ~ ”
“도망치지 마라!!”
“승부하라고!!”
경기는 흘러 5회 말, 다카기는 3번 째 타석을 맞이했다.
하지만 배터리는 정면대결을 피했고 관중석에선 승부를 재촉하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정말 나는 도망쳐야 하는 건가.’
에가노는 공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2번 모두 패했지만 이번에도 질 거란 보장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거르라는 건 감독의 엄명, 승부를 걸 용기는 있었지만 감독의 지시는 어쩌지 못했다.
‘또 치고 온다고 약속했는데’
계속되는 볼질에 다카기의 얼굴은 굳어졌다.
남자에게 한입으로 두말을 한 것만큼 치욕적인 일이 또 있을까. 도망치지 말라는 뜻으로 다음 공은 헛스윙을 해버렸다.
‘여기서 도망치면 나는 ··· ’
에가노의 자존심은 철저히 짓밟혔다.
얌전히 보내주겠다는데 헛스윙이라니, 내심 감독이 마음을 바꾸길 기대했지만 사인은 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