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27화 (27/361)

27화. 이상한 군단 - (1)

“허허 ~ 고 녀석 참 신통하군.”

고영길은 지역예선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손자의 활약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야구협회 교토본부 회장을 지냈으니 그 무대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잘 알고 있다. 중학교와 고교 레벨은 엄연한 차이가 있는데 1학년부터 이런 성과를 낼 줄이야,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하긴, 우리 집안이 운동신경은 있는 편이지. 아니 ··· 외가 쪽 영향인가?”

고영길의 친형은 한때 고시엔에서 뛰었고 프로 구단의 구애도 받았지만 결국 가업을 이었다.

그 이후 운동과 관련된 낭보는 없었는데, 외부에서 엄청난 사람이 들어왔다.

며느리(다카기의 어머니)는 얌전한 성격이라 운동과 거리가 먼 줄 알았는데, 중학교 전국 수영대회에서 2위까지 입상한 경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빙산의 일각, 집안이 운동에 재능이 있는지 그 쪽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많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까지 배출했다.

‘씨가 좋아도 밭이 기름져야 잘 자라는 법이지. 내가 투자를 잘 했어.’

태생부터 기업가인 고영길은 손자 사랑도 투자로 해석했다.

대학교도 졸업 안 한 아들이 결혼을 하겠다고 까불거릴 땐 피가 거꾸로 솟는 줄 알았지만, 며느리를 본 뒤엔 생각이 바뀌었다.

‘이 녀석이 여자 보는 눈은 있군.’

색안경을 껴도 흠 잡을 곳이 없던 며느리, 집사람은 마지막까지 반대했지만 고영길은 결국 결혼을 허락했다.

그 투자가 이렇게 빛을 볼 줄이야, 역시 내 감은 틀리지 않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좀 더 살다 가야겠소. 그래야 당신한테 해 줄 말도 있지 않겠소?’

4년 전, 집사람을 잃고 삶의 의지가 흔들렸지만 조금 더 살아도 나쁘지 않겠지, 마침 돌아오는 9월은 그 사람의 기일 아닌가. 아내의 위패 앞에서 조금 더 기다려 달라는 말을 전하기로 했다.

‘어이쿠 ~ 이게 누구신가.’

마침 걸려온 반가운 전화, 미국으로 이민 간 장녀의 호출이었다.

“그래 ~ 은숙아. 나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래, 나야 늘 잘 지내지. 좀 있으면 엄마 기일인데 올 거냐?”

[그러려고 전화 드렸어요]

평범한 부녀의 대화는 어느덧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지금 집안의 최대 관심사는 다카기, 이국만리에 있지만 고은숙은 조카의 미래에 관심을 표했다.

[여기로 유학을 보내지 그러셨어요. 저도 여기 있는데 ··· ]

“또 그 소리냐. 며느리가 절대 안 된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냐?”

[올케는 그게 문제에요. 아들을 늘 곁에 품으려고만 하니 ··· ]

고은숙은 3년 전부터 조카에게 유학을 권했다.

똘똘한 녀석이니 가업을 이을 사람으로 키워야겠지. 미국에 자리를 잡은 친지들도 있으니 걱정할 거 없다고 말했지만, 다카기의 어머니는 절대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오사카로 보낸 것도 탐탁지 않은데 아예 다른 나라로 보내라니, 내 아들은 여기서 키울 거라며 선을 그었다.

[이번에 가면 대학교는 미국으로 오라고 권해봐야겠네요.]

“그만 해라. 며느리가 그것 때문에 너 싫어하는 거 알잖냐”

[저도 하루가 싫다면 강권할 생각은 없어요.]

싫다면 싫다고 할 것이지 묘한 미소로 흘려버리던 조카,

핏줄이라면 끔찍이 여기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인지, 고은숙도 그런 면을 진하게 이어받았다.

마침 엄마 품을 떠나 오사카로 유학을 떠난 조카, 기왕 떠난 여행이라면 세계최고의 무대에서 꿈을 펼쳐보겠다는 야망도 품지 않을까? 이번만큼은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 * *

‘너무 순조로운데, 이래도 되는 건가?’

히라카시라는 고비를 넘긴 다이이치는 파죽의 7연승을 달리며 고시엔 진출까지 2승만을 남겨뒀다.

이 기간 동안 다카기는 22타수(28타석) 16안타(타율 0.727), 2홈런이라는 정신 나간 성적을 기록, 마운드에서도 9과 1/3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존재감을 뽐냈다.

내 실력이 그만큼 뛰어난 건가?

자만은 경계했지만, 찾아오지도 않은 불행에 몸을 사리진 않았다.

‘건방도 실력이 있는 놈이 떨면 자신감이지. 세상이 그런 거 아니겠어?’

쉴 땐 쉬더라도 연습은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런 후배를 지켜보는 선배들도 긴장의 끈을 조였다.

‘따라잡히기 전에 얼른 도망치자.’

그중에서 캡틴 이시다는 필사적이었다.

선후배의 관계란 무엇인가, 앞에서 끌어주고 처지면 뒤에서 밀어주는 게 선배인가? 하지만 넓게 보면 선후배도 경쟁하는 관계다.

선배가 앞서가면 후배는 따라잡기 위해 발악하고, 그렇게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하는 게 아닐까? 다카기의 활약에 이시다는 위협을 느꼈고, 녀석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아니지, 내가 따라가는 입장인가.’

인정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저 녀석은 천재다.

내가 3년 동안 갈고 닦아 쌓은 명성을 저 녀석은 몇 달 만에 누리고 있으니, 천재가 아니면 뭔가. 그렇다고 내가 따라가는 입장이라고 인정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놈으로 타협을 봤다.

‘내 입지가 위험하다.’

요시다(2학년)도 어깨에 걸린 긴장을 풀지 않았다.

이시다 캡틴이 은퇴하면 이 팀은 당연히 내가 이끌어 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전에서 성적을 낸 다카기가 입지를 끌어올리면서 게으른 천재도 자극을 받았다.

‘좋은 약이 됐군.’

내색은 안 했지만 후루타 감독도 요시다를 눈여겨봤다.

구위만 따지면 캡틴보다 나은 녀석, 지난 3월 센바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탓인지 약간 자만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다카기의 활약이 좋은 약이 될 줄이야, 예상외의 소득에 넉넉한 미소를 지었다.

“다이이치 파이팅!!”

“이번엔 고시엔 가자!!”

부원들을 지켜보는 시선은 감독이나 코치뿐만이 아니었다.

고시엔 진출은 학교에도 큰 영광, 방학동안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던 재학생들도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들 저리 가!! 훈련에 방해된다고!!”

“우우 ~ 우 ~ ”

요시다는 유독 응원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정말 훈련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유독 눈에 띄는 여학생들이 눈에 거슬렸다.

날 응원하러 왔다면 미소라도 지어주겠는데, 응원을 받는 녀석이 내 자리를 위협하는 놈이라 좋게 봐 줄 수가 없었다.

‘이번 기회에 어떻게 해 볼까?’

한편, 다카기와 같은 반에 있는 이나바 키리코는 기회를 살폈다.

학교 가는 길도 겹치는 사이라 경쟁자들에 비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게 사실, 주변을 살피다 목소리를 높였다.

“다카기 파이팅!!”

그냥 질러봤는데 눈이 마주칠 줄이야, 키리코는 순간 당황했지만 다카기는 손을 들어 환호에 답했다. 이렇게 또 한 점 얻은 건가, 차근차근 쌓여가는 포인트에 소녀의 마음은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저 자식, 여자한테 상처주기 쉬운 유형이야.’

그에 비해 매니저 사나에의 얼굴은 딱딱했다.

처음 만났을 때 이성이 꼬일 녀석이라는 건 눈치 챘지만, 문제는 저 성격이다.

지금은 꿈이 우선이라 연애에 관심은 없는 것 같은데, 또 다가오는 사람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상대 입장에선 1차 방어선을 넘었으니 기대를 품겠지, 사나에도 순간 그런 착각이 들었지만 헛물만 들이켰다.

그런 행위에 악의가 없다는 것도 문제, 여자를 가지고 놀 생각으로 그랬다면 나쁜 놈이라며 욕이라도 해주겠는데, 저 녀석은 아무 생각이 없다.

일단 남자든 여자든 다 친해지겠다는 자세, 공은 잘 보는데 상대가 무슨 생각으로 내게 접근하는지 가려내는 선구안은 형편없다.

이성으로 보고 덤벼드는 입장에선 절망적인 난이도를 자랑하는 상대, 아무 생각 없이 상대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다나카 코치는 조금 일찍 훈련을 끝냈다.

내일 열리는 4강전을 대비해 선수들도 휴식을 취해야겠지, 하지만 가장 급한 건 본인의 일이다.

요즘 바쁜 대회 일정 때문에 조금 소원해진 연인 관계, 오늘 밤 사랑을 재확인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코치님, 오늘 좋은 결과 있길 기원하겠습니다.”

짓궂은 제자들은 코치의 약점을 들춰냈다. 이 녀석들이 뭘 안다고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당황한 다나카는 말까지 더듬었다.

“너희들 내 뒷조사 하고 다니냐?”

“표정만 봐도 알아요. 저희들이 코치님하고 보낸 세월이 있는데요.”

다나카 코치는 애인과 냉전을 치르면 얼굴로 말을 하는 유형이다.

제자들 앞에선 강한 탈을 쓰지만 속마음은 영락없는 순정남, 마음 넓은 제자들은 코치님이 결별의 아픔을 고시엔 진출로 덮길 원치 않았다.

“두 마리 토끼 다 잡으세요. 이번에 고시엔 진출하고 겸사겸사 결혼도 하면 좋잖아요.”

“경기장에서 프러포즈하는 건 어떤가?”

한 술 더 떠 후루타 감독까지 장난에 끼어들었다. 협공을 당한 다나카 코치는 서둘러 도주, 등 뒤에서 응원의 목소리가 쏟아졌지만 무시했다.

* * *

“미안해. 그동안 내가 무심했지?”

“아니야.”

응원의 효과가 있었는지 다나카 코치는 타카코 선생님과 훈훈한 분위기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학교 일도 바쁜데 부활동까지 책임지다니, 그렇게 바쁘게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 물론 타카코도 부활동을 운영하지만 방학 중에는 여유가 있다.

하지만 애인이 책임지는 야구부는 평소보다 방학 때 더 분주하게 움직인다. 세 번 만날 기회가 1 ~ 2회로 줄어드는 건 당연, 사이가 약간 소원해졌지만 여느 때처럼 위기를 잘 넘어갔다.

“이제 2번만 이기면 고시엔 진출이네?”

“여기서 그 얘긴 하지 말자.”

아무리 야구가 좋아도 사랑보다 앞세울 순 없는 법, 다나카 코치는 이번에 고시엔 진출하면 야구부 코치는 그만두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정말 그만 둬도 괜찮아?”

“어, 그동안 야구에 미련이 남아 있었는데 ··· 고시엔 진출하면 다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대학생까지 야구 선수로 활약하며 프로의 꿈을 키웠지만 결국 넘을 수 없던 벽, 교사가 된 다나카는 이후 사회인 야구에 나가거나 학생들을 가르치며 대리 만족을 느꼈지만,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깨달았다.

바로 내 앞에 있는 소중한 인연, 교사 되지 않았다면 이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까? 사랑은 프로에 진출하지 못한 아쉬움을 만회하고도 남았다.

“괜히 나 때문에 무리하게 그만두는 거 아냐?”

“괜찮다니까.”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해 봐. 이해해 줄게.”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그래.”

겨우 화해했는데 어째 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 눈치를 보던 타카코가 제안을 했다.

“그럼 나도 올 여름은 야구부 응원에 투자할게.”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가르치는 부원들 있잖아. 미소녀 군단이 관중석에 나타나면 볼만 할걸?”

타카코 선생님은 여학생들과 화장법을 연구하는 부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부원만 93명, 일본에 이런 미소녀 응원군단을 보유한 야구부가 있을까? 제자들과 아직 상의는 해보지 않았지만, 학교 역사상 첫 고시엔 진출에 도전하는 야구부, 분명 응해 줄 거라고 믿었다.

“아니야 오지 마.”

“왜?”

“우리는 지금까지 조용한 분위기에서 경기 치렀어. 그렇게 눈에 띄는 응원단이 나타나면 페이스가 흔들릴 지도 몰라.”

“학생들한테 미리 말 해주면 되지. 그리고 응원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힘이 더 나는 거 아냐?”

애인의 제안에 다나카 코치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고집이 센 사람은 아닌데 일단 마음을 정하면 실행하는 스타일, 눈빛을 보니 말려봤자 소용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