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누굴 위한 무대인가 - (9)
[다이이치, 파죽의 3연승]
[키타마치마저 충격의 탈락]
[오사카 지역예선 혼돈 속으로]
지역예선 막이 오르고 사흘이 지났다.
오사카의 쌍두마차라 불리던 키타마치와 히라카시의 몰락, 새 시대를 맞이하는 여명인가 아니면 일시적인 현상인가.
여론의 관심은 다이이치의 진격에 집중됐지만, 탈락의 고배를 마신 히라카시도 관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테라카도 위원, 경기 끝나기도 전에 그라운드 떠나]
여론은 테라카도의 태도를 꼬집었다.
지역예선이 시작되기 전엔 4대 0으로 이길 거라며 큰소리를 치더니, 잘 하면 내 후배고 못 하면 남이라는 건가. 재학생들은 저런 인간은 모교를 방문할 자격이 없다며 격분했다.
“몸이 좋지 않아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입니다.”
어설픈 변명을 앞세우다 여론은 더욱 악화, 하지만 야구부는 이렇다 할 입장을 표하지 않았다.
9대 0으로 패했는데 무슨 낯짝으로 고개를 들겠는가. 지역예선이 끝나자마자 아라이 감독은 이사회에 사표를 제출, 제자들을 마주할 면목이 없어 이별의 말도 전하지 않았다.
“선배, 정말 은퇴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됐다.”
야구를 덮친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팀을 지탱했던 히라타니 역시, 이번 대회를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명예회복이라면 추계대회에서도 가능하잖아요.”
“그래요. 요즘 누가 여름 끝났다고 은퇴를 해요?”
부원들은 은퇴를 말렸지만 히라타니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동안 난 실력에 비해 과분한 평가를 받았어. 그리고 추계대회는 너희들을 위한 자리지 내가 나설 곳이 아니다.”
이시다의 인터뷰도 히라타니의 은퇴에 영향을 미쳤다.
내가 없다고 졌다면 A급 고교라 칭할 자격이 없다니, 그 자식 말대로 이 팀은 내가 이끌어 왔던 걸까? 한때 그런 건방진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후배들이 보란 듯이 치욕을 갚아주길 바랐다.
“떠나는 사람에게 미련두지 마라. 이제부터 팀을 이끌어 가는 건 너희들이야. 그것만은 명심해줬으면 좋겠다.”
PTA를 움직여 야구부를 좌우하고 감독이 눈치까지 보던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깨달았다.
옳고 그름을 떠나 내 독단이 이마이의 불만을 초래했고 팀 분위기가 엉망이 됐다는 것, 후배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바랐다.
‘앗!!’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이때 익숙한 그림자가 부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역예선 이후 며칠 동안 소식이 없던 이마이의 등장. 여기서 또 무슨 불꽃이 튀는 건 아닌지, 부원들은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이마이는 부원들을 못 본 척 했고 그동안의 추억과 노력이 깃든 라커룸으로 향했다.
놔두고 온 짐이나 챙겨갈 생각이었는데 지금 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은 후회인가 아니면 새로운 도전을 앞둔 두려움인가. 야구를 그만둘 생각도 했지만 고심 끝에 대학진학을 결정했다.
‘두고 보라고, 난 여기서 포기할 남자가 아니야.’
이미 나락까지 떨어진 체면, 이젠 내세울 자존심도 없다.
다시 시작할 시회와 시간은 충분, 눈물을 흘리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를 다졌다.
“잠깐 실례한다.”
마침 등장한 방해꾼, 이마이는 눈에 남은 부끄러운 흔적을 치워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화해의 말이라면 됐어.”
여전히 굽힐 줄 모르는 녀석,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히라타니는 대화를 요구했다.
“풀건 풀자. 우리 둘 다 망가졌는데 내세울 체면이 뭐가 있냐?”
“분위기에 휩쓸려 화해하는 건 사양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해두자.”
예전엔 벽과 대화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좀 누그러진 느낌, 히라타니는 다음 말을 재촉했다.
“말해 봐.”
“솔직히 난 지금도 네가 마음에 안 들어. 그건 너도 피차일반이겠지, 하지만 그걸 부원들 앞에서 내색한 건 내 잘못이다. 무리하게 친해질 이유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싸울 이유도 없었어.”
잠시 말이 없던 히라타니는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마지막까지 한결같은 녀석, 마음에 안 들지만 그런 점은 인정해 줄 만 했다.
“너도 은퇴할 거냐?”
“그래, 대학에 진학해서 반드시 재기할 거야.”
“실은 나도 그럴 생각이다.”
아닌 척 했지만 이마이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난 경기에서 망가지긴 했지만, 히라타니는 그동안 쌓은 업적이 있다. 한 경기 망쳤다고 프로구단의 관심이 끊어지겠는가.
키타마치의 나이토 젠스케도 무너졌으니 입장은 동등, 지금 프로에 진출해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데뷔전을 치를 수 있는 녀석이 대학 진학을 택한 건 의외였다.
“너와 나중에 어떤 식으로 얼굴을 마주할 진 모르겠지만, 적이든 아군이든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말자. 네 말대로 친해질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얼굴 붉힐 이유도 없잖아.”
히라타니가 나름대로 성의를 표하자 꺾일 줄 몰랐던 이마이의 고집도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그래, 적으로 만나면 내가 한 방 먹여줄 테니까 각오하고 있어.”
“훗 ~ 내가 너한테 질 것 같냐.”
“애송이한테 홈런 맞은 주제에 잘난 척은 ··· ”
“병살타나 쳐대는 놈이 그런 말 해봤자 안 무섭다.”
말싸움이 시작되면서 다시 험악해진 분위기, 하지만 예전처럼 서로를 증오하는 마음은 없었다.
“눈엣가시는 이만 사라져 준다. 다들 알아서 잘 해봐라.”
이마이는 이 말을 남기고 야구부를 등졌다. 떠난다고 환영받긴 어려운 신세, 도망치듯 부원들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3학년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분위기는 더욱 울적해졌고, 지난 경기에서 발목 부상을 입은 고토부키는 히라타니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선배 ··· ”
“이제부턴 네가 캡틴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발목을 다쳐 거동도 불편한데 선배가 은퇴한다고 여기까지 나온 녀석. 위로의 말이라도 전해주고 싶었지만, 히라타니는 대학 시험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을 거라며 선을 그었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하지.’
이렇게 히라카시 야구부엔 1, 2학년만 남게 됐다.
감독님은 책임을 지고 은퇴했고 코치진도 대거 물갈이 될 건 당연하다. 거기다 대패를 당했으니 이사회의 간섭은 더욱 심해지겠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팀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서로를 바라보는 눈은 불안에 휩싸였다.
* * *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지금 전력으론 내년도 어렵습니다.”
지역예선 1라운드에서 미끄러진 히라카시 고교는 바쁘게 움직였다.
야구부장은 이사회에 스카우터 규모와 특채 범위를 넓혀 전력을 보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이미 하고 있는 일이잖아.’
누가 들으면 우리가 특채를 활용 안 하는 줄 알겠지, 뭣보다 이번 참극은 야구부장의 책임도 적지 않았다.
“특채 범위를 넓히자는 사람이 스카우트는 왜 반대한 건가?”
“예?”
“이번에 다이이치에 입학한 다카기 말이네. 아라이 감독이 반드시 영입해 달라고 요청한 걸로 알고 있는데 ··· 다 된 일을 자네 독단으로 뒤집었다지?”
이사회의 질책에 야구부장은 마른 침을 삼켰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일러바친 건지, 제 발등을 찍었으니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도 못했다.
“그리고 감독한테 가야 할 자료를 왜 검토한 건가? 우리가 감독 머리 위에서 상관 노릇이나 하라고 자네를 그 자리에 앉힌 줄 아나?”
“저기 ··· 그 일은 ··· ”
“이번은 넘어가겠지만 다음은 없을 거네. 그리고 당분간 성적에 신경 쓰지 말게, 장기적으로 보고 가자고”
이사회는 결단을 내렸다.
지역예선 탈락도 충격이지만, OB들의 행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결과를 떠나 후배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경기 도중 그라운드를 떠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다니, 학부모 협회는 결과만 보는 어른들 때문에 학생들이 즐겁게 운동을 못하고 있다며 반발했다.
“야구는 놀이잖아요. 놀이도 상대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히라타니 선수의 부상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다이이치 야구부가 잘 나가고 있는 이유가 뭘까.
야구부는 학교의 명예나 어른들의 체면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오로지 학생들을 위한 공간, 야구를 놀이처럼 대했던 다카기의 인터뷰에 학부모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회는 그 의견을 받아들였고, 앞으로 학생들의 공간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을 세웠다.
“다시 말하지만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야구부를 지원하는 거야. 그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라고, 당분간 지켜볼 테니 명심하게.”
“예 ··· ”
직원실에서 나온 야구부장은 이를 갈았다.
어떤 놈이 고자질을 했는지 눈치 챘지만 지금 날뛰면 내 목을 조르는 꼴, 당분간 조용히 지내면서 이사회의 개혁에 동조해주기로 했다.
첫 번째 과제는 감독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 하지만 히라카시라는 이름에 걸린 무게와 부담을 짊어질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최근 10년 동안 4번이나 감독이 바뀌었으니 당연한 일, 당장의 성적에 급급해 모가지를 쳐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 하나?”
“정중하게 거절하겠답니다.”
또 퇴짜라니, 건방을 떨던 야구부장이 골탕 먹는 꼴이 재미있었는지 측근들은 속을 더 긁어댔다.
“아라이 감독을 재신임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미 사표 낸 사람 아닌가.”
“결과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거 아닙니까. 사실은 재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죠. 뭣보다 감독이 바뀌면 학생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합니다. 저는 재신임이 답이라고 봅니다.”
정예병이라도 장수가 계속 바뀌면 군대는 갈피를 못 잡고 혼란에 빠지기 마련, 고심하던 야구부장은 아라이 감독을 설득하고 나섰다.
“돌아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양하겠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역전된 입장, 감독을 못 구하면 새출발도 못하는 상황이라 야구부장은 거듭 고개를 숙였다.
“지난날은 제가 머리 숙여 사죄드리겠습니다. 앞으로 감독님이 하는 말씀은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저는 패장입니다. 학생들 앞에 얼굴을 마주할 면목이 없습니다.]
“그럼, 학생들이 감독님을 원한다면 돌아오시겠습니까?”
잠시 망설이던 아라이 감독은 생각해 보겠다는 중의적인 답을 표했다.
우리만 OK하면 감독님이 돌아온다니, 주도권을 쥔 학생들은 바로 논의를 정했다.
‘제자들이 준 두 번 째 기회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 ’
야구부로 돌아온 아라이 감독은 학생들 앞에 사죄와 감사의 뜻이 담긴 머리를 숙였다.
책임을 지고 떠났지만 풀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던 게 사실, 하지만 감독이라는 자리는 내 체면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제자들이 준 두 번 째 기회, 다음에는 모두가 후회 없는 경기를 치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