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누굴 위한 무대인가 - (8)
‘또 싸셨군.’
2루 땅볼을 유도한 다카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높은 공을 저렇게 찍어 치다니 결과는 뻔했다.
‘하필 이런 때!!’
1루 주자 고토부키는 잠시 가라앉았던 통증에 발목이 잡혔다.
슬라이딩은커녕 발이 꼬이면서 2루 앞에 주저앉았고, 그 사이 사토는 유격수 토스 없이 1루 송구를 마쳤다.
“아웃!!”
“아웃!!”
오늘만 2번 째 병살타(공수교대), 자존심도 투지도 모두 짓밟힌 이마이가 벤치에서 고개를 떨구는 동안, 의료진은 쓰러진 고토부키를 부축했다.
‘왜 우리가 이런 결과를 받아야 하지?’
훈련이라면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저런 C급 팀을 상대로 이런 경기를 하고 있는 건가.
노력만큼 따라주지 않는 결과에 고토부키는 처절한 울음을 쏟아냈다.
‘더는 안 되겠다.’
이어지는 다이이치의 9회 초 공격,
아라이 감독은 주전들을 모두 벤치로 불러들였다. 감독이 경기를 포기했다며 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히라타니에 이어 고토부키까지 부상으로 실려 나갔다.
욕은 먹더라도 무리한 플레이로 쓰러져 나가는 제자들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계속 둬야 하나.’
후루타 감독도 나름 고민에 빠졌다.
주전들을 불러들이는 건 어렵지 않지만 다카기는 아직 힛 포 더 사이클에 도전하고 있다. 지역예선이라도 의미 있는 기록, 일단 본인의 뜻을 물었다.
“당연히 해야죠.”
피도 눈물도 없는 기록 도전, 마운드에 선 하마다(2학년)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는 내가 잡는다.’
생각해보면 오늘 경기는 저 자식의 홈런을 시작으로 꼬여버렸다. 4안타를 내주는 것도 치욕인데 의미 있는 기록까지 안겨주다니, 그렇다고 볼넷으로 거를 생각도 없었다.
‘그냥 넘겨버려?’
다카기는 우중간을 응시했다.
대기록에 필요한 안타는 3루타, 저 곳을 갈라야 승산이 있는데 타구가 너무 빨라도 안 된다.
상대 팀도 바보가 아니니 그만한 대비는 하겠지. 대기록도 좋지만 9대 0은 뭔가 아쉬운 스코어, 10대 0을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피하지 말고 놀아주시죠. 물론 그쪽도 도망칠 생각은 없겠지만’
바깥쪽으로 온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예상했던 공이 날아오자 다카기는 앞발을 2루로 내딛었다.
가장 효과적으로 힘을 실을 수 있는 방향, 여기에 긴 팔이 더해지면서 질 좋은 타구를 만들어 냈다.
‘왜 저기로 오는 건데?!’
우중간을 예상하고 있던 중견수는 서둘러 좌측으로 자리를 옮겼다.
뜬공이라 다행이지 드라이브가 걸렸다면 꼼짝없이 2루타, 아웃은 됐지만 펜스 근처에서 잡힐 만큼 큰 타구였다.
‘우리 다음에 또 놀아봅시다.’
욕심을 내려놓은 다카기는 천천히 벤치로 향했다.
경기가 이대로 끝난다고 해도 히라카시는 다시 일어날 전력이다. 고시엔 우승이라는 목표를 공유한다면 또 만날 날이 있겠지, 오늘 승리는 인사 정도로 받아들였다.
“와아아 ~ !!”
“우리가 이겼다!!”
이어지는 9회 말, 히라카시의 공격이 삼자범퇴로 끝나면서 지역예선 1라운드가 끝났다.
결과는 9대 0 다이이치의 완승, 학생들은 마지막 절차가 남았다는 것도 잊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일단 정렬부터 해라.”
다나카 코치도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상대 팀에 예를 표하기도 전에 과도한 세리머니를 하는 건 스포츠 정신에 어긋난다는 게 이 세계의 규칙, 그제야 이시다 캡틴은 여기저기 흩어진 선수들을 재정비했다.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고!!’
마음 같아선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히라나티의 그늘에서 기어 나온 역사적인 순간, 이 기세를 타 도내 최고 선발, 고시엔 출전, 청소년 대표 선발, 프로 진출을 모두 거머쥐겠다는 야심을 불태웠다.
“자 정렬이다.”
그에 비해 히라카시 벤치는 초상집 분위기,
병살타만 2개를 기록한 이마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부여잡았다. 코치가 정렬이라고 계속 말했지만, 녀석은 끝내 벤치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여름대회가 끝나면 추계대회가 이어지지만, 졸업을 앞둔 3학년이 그 자리에 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추계대회는 세대교체를 위한 초석, 이마이는 이게 마지막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나눈 학생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고, 대기실에 입성한 다이이치 선수단은 미처 풀지 못한 감정을 뿜어냈다.
“키타마치도 덤비라고 해!!”
“그래!! 이번 기회에 우리가 도내 최강으로 올라가는 거야!!”
최근 고시엔 우승을 2번이나 한 명문고를 상대로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하지만 히라카시는 키타마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교, 망언이라고 폄하할 이유는 없었다.
‘창피하게 왜 이러는 거야.’
이 와중에도 매니저 사나에는 눈물을 훔쳤다.
팀원들 앞에서 내색은 안 했지만, 오늘 경기가 매니저 생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각오를 세우고 왔다. 그런데 이런 대승을 거둘 줄이야,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긴장이 풀리면서 눈물이 새어나왔다.
“선배, 지금 우시는 거예요?”
“아니야.”
“그대로 계세요. 여자의 눈물은 남자가 닦아주는 거예요.”
다카기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면서 흥분했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설마 여기서? 예전부터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던 두 사람이라 부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자, 여기 여자의 눈물을 닦아주실 분은 없습니까?”
“네가 닦아주지 그러냐?”
“전 후배지 남자가 아니잖아요.”
다카기의 말에 부원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사나에는 야구부의 마돈나 같은 존재, 공부 - 운동 - 미모 - 성격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으니, 수컷들이 사심을 안 품었을 리가 없다.
문제는 드러낼 기회가 없었다는 것, 지금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사나에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그 기회도 날아가 버렸다.
“이게 잘 해주니까!!”
“아!! 왜 때리세요?”
사나에는 뾰로통한 얼굴로 돌아섰다. 솔직히 조금 기대했는데 장난이나 치는 바보 후배, 감정이 식으면서 흘러내리던 눈물도 말라버렸다.
“이제 1승 했을 뿐이야!! 고시엔 진출까지 긴장 늦추지 마!! 다들 알아들었어?!!”
본 모습으로 돌아온 무서운 매니저, 군기가 바짝 든 학생들은 그 앞에서 필승을 다짐했다.
“이제 인터뷰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예, 그러시죠.”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 든 손님들, 첫 호명을 받은 이시다는 대기실 밖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응했다.
“이시다 선수 오늘 경기 승리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히라카시를 9대 0으로 꺾었는데 이런 결과를 처음부터 예상했습니까?”
“스코어는 몰라도 저희가 이긴다는 확신은 있었습니다.”
이시다는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긴장이 돼 대기실에서 물도 제대로 못 마셨다는 말을 하면 내 꼴이 우습지 않은가. 어쨌든 결과는 우리의 승리, 이 정도 허풍은 떨어도 된다며 자신을 납득시켰다.
“히라타니 선수가 불의의 부상을 당했는데, 그게 경기에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이어지는 질문은 다소 민감했다. 히라타니가 계속 남아 있었다면 너희들은 이기기 어려웠을 거라는 뉘앙스, 이시다는 바로 반격에 나섰다.
“글쎄요. 히라타니가 부상으로 물러나기 전까지 우리는 2대 0으로 이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수 한명 빠졌다고 무너질 전력이라면 야구명문이라 불릴 자격도 없겠지요.”
생각보다 강력한 한 방, 질문을 던진 기자는 슬쩍 꼬리를 내렸다.
“앞으로의 목표와 각오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죠.”
“고시엔 진출입니다. 이것 외엔 달리 말씀 드릴 게 없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난 캡틴 인터뷰, 기자들은 다음 타깃으로 다카기를 지목했다. 투타 모두 만점에 가까운 활약, 여기에 튀는 머리 스타일과 그라운드에서 보여준 여유까지, 실력에 스타성까지 갖춘 초신성에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다카기 선수, 고교 데뷔전 승리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 그 머리스타일은 처음부터 의도된 겁니까?”
고등학생이 지역예선에서 말총머리를 하고 나오다니, 꽉 막힌 원로들은 분명 인상을 찌푸렸을 거다. 이겼으니 다행이지 졌다면 만인의 비웃음을 샀을 패션, 하지만 다카기는 당당했다.
“의도한 건 아니고 그냥 길러보고 싶었습니다.”
“야구를 하는데 불편하진 않습니까?”
“글쎄요. 보는 사람마다 다 그런 말을 하는데, 짧은 머리가 야구를 잘 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기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죠?”
“지금은 야구가 잘 되고 있으니까요. 훗날 슬럼프가 올 때를 대비해 보험은 들어 놔야죠.”
기자들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괜한 참견처럼 들릴 수 있는 질문을 이렇게 맞받아치다니, 다소 진지했던 이시다에 비해 편안한 분위기에서 인터뷰를 이어갔다.
“하라타니 선수의 부상이 승패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십니까?”
“영향이 없다고 할 순 없겠죠.”
캡틴 이시다와는 전혀 다른 답, 기자는 그 이유를 물었다.
“야구는 놀이입니다. 즐겁게 놀고 있는데 한 사람이 다쳐서 집에 가버리면 분위기가 어떻겠습니까?”
히라타니가 부상으로 실려 갔을 때, 히라카시 선수단은 충격에 휩싸였지만 그건 다카기도 마찬가지였다.
불안했지만 히라타니는 무너지지 않고 3회까지 버텨냈다. 그런 상대가 불의의 부상으로 실려 갔으니, 놀이판에 흥이 살겠는가.
다카기는 언젠가 다시 만나 놀아보고 싶다는 뜻을 표했다.
“오늘 히라타니 선수를 상대로 인상적인 타격을 보여주셨는데, 혹시 상대의 약점을 간파하신 겁니까?”
히라타니는 그동안 도내에서 당할 선수가 없었다.
고시엔에서 부진한 적은 있지만, 많은 경기를 소화한 일정을 고려하면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런 선수의 공을 외야로 뻥뻥 쳐내다니, 기자들은 그 비결이 알고 싶었다.
“글쎄요. 저는 감독님의 믿음에 따랐을 뿐입니다.”
“믿음이요?”
“제가 뭘 안다고 상대의 약점을 간파했겠습니까. 하지만 감독님이 너라면 뭔가 해낼 거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전략은 감독이 세우지만 그걸 실행하는 건 선수들의 몫, 1번 타자로 나선 다카기는 초구 홈런으로 히라카시의 기를 꺾어버렸다.
어찌 보면 시작부터 승패가 갈린 셈, 감독의 작전도 훌륭했지만 그걸 현실로 이뤄낸 다카기의 능력도 높이 평가받을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