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누굴 위한 무대인가 - (7)
‘이런 경기를 계속 봐야 되는 거야?’
경기가 기울자 특별석에 앉은 히라카시 OB 3인방의 얼굴은 굳어졌다.
모교의 명성이 짓밟히는 꼴이나 보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지 않은가, 고교 3년 동안 2번이나 고시엔 우승 깃발을 들어 올린 시대의 잔당들은 졸전을 펼치는 후배들을 이해할 만한 그릇이 못 됐다.
‘기자들이 또 성가시게 굴겠군.’
히라카시의 4대 0 승리를 점쳤던 테라카도 아츠시는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만 열면 모든 일이 반대로 흘러가니 기자들이 물고 늘어지기 딱 좋은 사건, 패배를 예감한 테라카도가 자리를 뜨자 킨타 아유무, 사카키 료지도 그 뒤를 이었다.
‘벌써 가는 거야?’
아직 6회 초, 관중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OB라는 사람들이 경기를 포기했다니, 4회 말부터 특별석을 예의주시하던 카메라맨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태도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까앙 ~ !!
그 사이 터진 다카기의 안타, 벌써 3안타를 적립한 초신성은 이제 힛 포더 사이클을 정조준했다.
‘재미없어.’
3안타를 쳤지만 다카기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얼마 전 연습경기에서 붙었던 도우묘 고교는 몇 점을 내주든 악착같이 달려드는 맛이 있었다. 그런데 야구 명문이라는 팀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연습경기보다 못한 긴장감에 의욕을 상실해 버렸다.
상대가 강하게 나올수록 불타오르는 게 승부사의 본성,
이빨 발톱 다 빠지고 잡아먹으라며 배까지 내주는 사냥감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더 몰아붙이자.’
한편, 후루타 감독은 다카기의 활약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8대 0이라니, 경기 시작 전엔 감히 상상도 못한 리드다. 그리고 그 계기는 히라타니의 부상, 여기서 이겨도 여론은 우리의 승리를 인정해 줄까.
기자들은 분명 팽팽하게 흘러가던 경기가 히라타니의 부상으로 기울었다는 기사를 쓰겠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히라타니가 없으면 히라키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주면 돼’
8대 0도 큰 점수 차라며 학생들에게 적당히 하라는 사인을 보냈지만, 다시 생각하니 조금 애매했다.
기왕 이긴다면 10대 0이 좋겠지, 쉴 새 없이 몰아치라며 학생들을 독려했다.
* * *
‘정말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 시각, 부상으로 교체 된 히라타니는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오로지 야구 뿐, 나 없이도 녀석들은 잘 할 수 있을까.
아니, 캡틴으로서 제 역할도 못한 놈이 이런 걱정을 하는 건 주제 넘는 짓이겠지. 결과가 두려워 뒷일은 떠올리지도 못하고 과거에 얽매였다.
‘모두가 너처럼 야구를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재능이 부족하면 노력을 해야 한다고!!’
이마이의 괴성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너는 천재니까 알아서 잘 하겠지만 다른 녀석들은 연습이 더 필요하다던 그 말, 그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되새겨보니 칼날처럼 가슴에 박혔다.
“모든 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이마이가 훈련에서 무단이탈하자, 히라타니는 감독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 녀석이 빠져도 내가 팀을 지탱하면 그만이라는 건방진 생각이 아닌가.
오늘 일어난 비극은 불의의 사고일까. 아니면 어설픈 실력으로 건방을 떤 결과일까, 그 답은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아직 늦지 않았어.’
히라타니는 고등학교를 마치면 바로 프로에 진출할 생각이었다.
실제로 대회전에 프로구단 관계자들이 찾아와 프로 의사 진출을 묻기도 했고, 본인의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강했던 다이이치 고교, 제구가 안 돼서 당했다?
히라타니는 구위를 앞세운 거친 투구가 주무기, 그런 어설픈 변명은 앞날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내 공이 그렇게 치기 쉬웠나?’
그 다카기라는 녀석은 생각할수록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지간한 녀석은 구속에 눌려 몸을 움츠리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오는 스윙, 결과는 모두 장타였다.
첫 대결은 방심해서 그런 거라고 쳐도 두 번째 대결은 변명할 거리도 없는 완패, 빠른 볼이 안 먹히는데 변화구를 던져봤자 무슨 소용인가. 다음 타석은 거르라는 감독의 지시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나는 그 자식 빈자리를 채울 수 없는 건가.’
한편, 이마이는 무너지는 집 기둥을 끌어안고 있었다.
히라타니가 부상으로 물러났을 때도, 내가 중심을 잡아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벌어지는 점수,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민심을 잃은 3학년의 말에 귀를 기울일 녀석은 없었다.
결과를 냈다면 모를까, 1회에 보여준 호수비를 제외하면 병살타로 찬물을 끼얹으며 민폐 짓이나 하고 있다.
‘노력이라면 누구보다 열심히 했어. 그래도 난 안 되는 건가?’
패배가 점차 현실로 다가오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무엇을 위한 3년이었는지, 선배의 괴롭힘도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며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그 결과가 겨우 이런 거라니, 인정하기엔 너무 비참했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게 더 비참하군.’
아라이 감독도 깊은 상심에 빠졌다.
내 목 하나 날아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날 믿고 여기까지 와 준 학생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가.
미안하다는 말로 웃어넘기기엔 너무 힘들었던 나날, 녀석들을 생각하면 교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감독이 승부를 포기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 그렇게 감독은 망가져 가는 제자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윽 ··· ”
8회 말 히라카시의 반격, 3번 째 타석에서 안타를 쳐낸 고토부키 세이치는 발목을 붙잡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엄살을 피우는 몸뚱이, 하지만 이런 작은 부상은 운동을 시작하면서 달고 다니지 않았는가. 별 것 아니라며 웃어 넘겼다.
‘이시다는 여기까지군.’
후루타 감독은 여기서 투수 교체를 지시했다.
6회까지 던지게 할 예정이었지만 생각보다 길어진 투구, 다음 경기 선발로 낙점된 요시다를 대신해 다카기가 마운드를 이어받았다.
“캡틴, 수고 했어.”
“응”
이시다는 매니저가 건넨 수건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받아들었다.
스코어는 9대 0, 마운드를 지키는 수문장은 다카기, 절대 뒤집힐 리가 없다며 승리 분위기를 만끽했다.
‘지금 나 무시하는 거냐?’
고토부키 세이치는 다이이치의 투수교체에 발끈했다.
사이드 암 투수를 내보내다니, 도루 따윈 신경 안 쓰겠다는 거 아닌가. 내 빠른 발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며 이를 갈았다.
‘이거 뭐야, 생각보다 빠르잖아.’
하지만 여름 동안 투구 폼을 조정한 다카기는 틈을 내주지 않았다.
타자의 타이밍을 뺏기 위해 멈칫 하는 투수들이 많은데, 다카기는 바로 중심이 앞으로 넘어오는 투구 폼을 지녔다.
구위에 자신이 없다면 할 수 없는 투구, 여기에 빠른 팔 스윙까지, 타자 입장에선 공을 보는 것도 어려웠다.
‘이건 또 뭐냐?’
존으로 들어오다 밖으로 흘러가는 궤적, 잠시 멈칫하던 주심은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렸다.
고교야구에서 이런 공을 볼 줄이야. 심판 경력 15년에 접어든 주심도 이런데, 타자의 반응이야 말 할 것도 없었다.
‘너무 먼데’
예상과 너무 다른 궤적이라 스윙을 해도 배트에 걸리질 않았다.
옆으로 휘는 공이 떨어지는 공보다 치기 어렵다고 느껴진 건 이번이 처음, 조금씩 익숙해지던 이시다와 전혀 다른 유형이라 혼란은 가중됐다.
‘넌 또 뭐야?!!’
결정구는 체인지업, 떨어지는 공에 헛스윙을 돌린 타자는 고개를 숙인 채 벤치로 돌아왔다.
‘이건 좌우타를 가릴 문제가 아니군.’
아라이 감독은 다카기의 투구에 할 말을 잃었다.
삼진을 당한 하나가타는 좌타, 이론만 따지면 사이드 암 우투에게 밀리지 않는다. 그러나 결과는 삼구 삼진, 저런 구위에 떨어지는 볼까지 갖췄다면 좌우놀이는 의미가 없다.
히라타니를 두들긴 타격도 경악할 수준이었는데 투구에서 이런 재능을 뽐내다니, 점수는 이미 충분히 내줬고 훌륭하다는 말 외엔 내놓을 것이 없었다.
‘이게 마지막 기회다.’
이제 타석에는 이마이, 영봉패만은 면하자는 각오로 타석에 섰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1루에 자리 잡은 고토부키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도루 사인은 나지 않았지만 타구가 내야를 빠져나가면 3루까지 뛸 기세, 다카기는 무시하고 타자에 집중했다.
‘출발점으로 돌아가시죠.’
초구부터 떨어지는 공, 이마이가 헛스윙을 돌리자 스타트를 끊었던 고토부키는 1루로 돌아왔다.
한 점이라도 내겠다는 의지는 알겠는데 너무 속 보이는 행동, 거기에 어울려 줄 만큼 애송이는 너그럽지 못했다.
“삼진!! 삼진!! 삼진!!”
카운트는 어느덧 1볼 2스트라이크, 다이이치 벤치는 삼진을 연호하는 목소리로 달아올랐다.
정말 히라카시라는 대어를 낚아 올리는 건가, 흥분에 사로잡힌 건 도우묘 고교 야구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저런 팀을 상대로 1점을 냈다고’
히라카시도 9대 0으로 끌려가는데, 우리는 1점을 내지 않았는가. 14점이나 내줬다는 게 함정이지만 잊어버렸다.
“와아아 ~ !!”
“멋지다!! 멋져!!”
이마이까지 삼진 처리한 다카기는 벤치에서 쏟아지는 동료들의 환호에 덤덤한 얼굴을 유지했다.
2회 전 진출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4개, 목표에 멀지 않았지만 방심하지 않았다.
“늘 노력해라. 노력한다고 원하는 걸 얻을 순 없지만, 적어도 네가 가야 할 길은 찾을 수 있을 거다.”
평소 할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뭘까. 아직 그 답은 찾지 못했지만 계속 가다보면 언젠간 깨달을 날이 오겠지, 답을 찾기 위해 공 하나도 가볍게 던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