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누굴 위한 무대인가 - (6)
“방심하지 마라.”
이어지는 히라카시의 3회 말 반격,
마운드로 향하던 이시다는 코치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상대를 펼치는 히라타니는 1회부터 실점을 했지만 그 다음은 어떻게든 버텨내며 마운드를 지키고 있다. 여기서 내가 흔들리면 경기 흐름은 달라지겠지, 정신을 재정비하고 성난 맹수들을 맞이했다.
‘힘으로 밀어붙인다.’
이시다는 시노자키 포수와 신중하게 사인을 주고받았다.
7번부터 시작되는 타순, 히라카시의 하위타선도 짧게 치는 타격에 특화 돼 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여름 동안 구속을 끌어올렸는가. 쉬어가는 구간에선 이빨을 드러냈다.
“스트라이크!!”
당당하게 우겨 넣은 빠른 볼, 전광판에 146km가 찍히자 관중석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1 ~ 2회까지 130km 후반을 유지하던 선수가 이런 공을 던지다니, 이시다가 여름 동안 구속을 끌어올렸다는 기사는 허풍이 아니었단 말인가.
머리싸움을 생각하고 들어온 이시카와는 정면승부에 당황했다.
‘그래도 못 칠 정도는 아니다.’
분명 빠르지만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는 수준, 다음 공이 가운데 약간 낮은 곳으로 몰리자 이시카와는 거침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2루!! 2루!!”
우중간에 떨어지는 타구, 다이이치의 중견수 시오다니(2학년)는 2루수 사토의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설마 했던 2루 대시, 다카기가 급히 2루 백업을 들어갔지만 송구가 늦으면서 추가 진루를 허용하고 말았다.
‘아 ~ 너무 마음을 놨네.’
시오다니는 손을 들어 동료들에게 미안함을 표했다.
설마 이 정도 타구에 2루로 돌진하다니, 다 내가 방심한 탓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2대 1이면 조금 위험하다.’
2루타를 허용한 이시다의 어깨는 쪼그라들었다.
바깥쪽 제구에 신경쓰다보니 카운트가 불리해졌고, 결국 볼넷을 내주면서 무사 주자 1, 2루 위기에 몰렸다.
‘지금은 한 점 따라가는 게 우선이다.’
히라카시의 아라이 감독은 보내기 번트 사인를 지시했다.
좋은 기회지만 여기서 병살타가 나오면 곤란, 대량득점보다는 한 점이라도 따라가는 작전을 구사했다.
2루 주자를 3루로 보내려면 푸시 번트가 좋겠지, 기본기가 좋은 히라카시 선수들은 감독의 요구를 완벽히 수행해 냈다(1사 주자 2, 3루).
이제 안타 하나만 나오면 2대 2 동점, 잠시나마 앞서가는 기쁨을 누렸던 다이이치 선수들은 가슴을 옥죄는 압박에 시달렸다.
‘좀 더 붙어라.’
다이이치의 다나카 코치는 3루수 쿠로다를 파울라인 쪽으로 붙였다.
여기서 라인을 타고 흐르는 타구가 나오면 동점에 타자 주자까지 2루로 보내게 된다. 동점은 몰라도 역전은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 물론 히라카시 벤치도 그 의도를 파악했다.
“2루 쪽을 노려라.”
“알겠습니다.”
대기타석에 선 고토부키는 코치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2루 도루가 나올 상황도 아니고, 다이이치의 2루수 사토는 밀어치는 타격에 대비해 1루로 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3루수와 유격수 위치도 좌측으로 기울었으니 2루로 땅볼을 굴리면 안타가 나올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졌다.
‘젠장, 간발의 차이였는데’
초구가 볼 판정을 받자 이시다는 아쉬움을 삼켰다.
자신감 넘치는 대장부는 어디가고 지금은 심판 판정에 매달리는 잔챙이만 남았으니, 하지만 그동안 흘린 땀의 가치를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었다.
“와아아 ~ !!”
하지만 열정이 늘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 법,
설마 했던 연속 볼넷이 나오면서 1사에 주자는 만루, 히라카시 응원단의 기세가 오르자 후루타 감독은 직접 마운드에 올랐다.
“도망친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승부해라.”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천하는 게 쉬운 일인가. 3학년 마지막 대회라 경험이 많은 이시다도 분명 잔뜩 긴장하고 있겠지, 하지만 이 이상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선배, 똥도 먹을 게 있어야 나오는 거예요. 주자가 있으니까 병살도 나오겠지, 이렇게 생각하세요.”
이때 다카기가 긴장감을 다스리는 자신만의 비법을 공개했다.
무슨 비유를 이렇게 더럽게 하는 건지, 이시다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고 개그 코드를 저격당한 후루타 감독도 잠시나마 위기 상황을 잊어버렸다.
‘참지 말고 얼른 싸 버리라고’
자리로 돌아온 다카기는 병살타를 이끌어내는 주문을 읊었고, 그 사이 이시다는 과감한 몸 쪽 승부를 택했다(볼 판정).
결정구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 몸에 맞는 볼이 나오면 바로 실점이지만 대어를 낚기 위해 그만한 밑밥은 뿌려둬야 했다.
‘또?!’
설마 했던 연속 몸 쪽, 이마이는 배트를 내지 않았다(스트라이크 판정).
몸 쪽 공은 대응하기 어려워 찍어 치는 경우가 많은데, 당연히 타구 질은 형편없다. 여기서 땅볼이 나오면 바로 병살, 이마이의 속마음을 간파한 이시다는 승부구를 던졌다.
‘낚였다!!’
따라 나온 방망이,
2루수 손에서 출발한 송구는 유격수를 거쳐 1루에 도착하는 여정을 병살타로 마무리 했다.
“으아악 ~ !!”
거하게 싸지른 이마이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괴성을 질러댔고, 다카기와 사토는 글러브를 맞부딪치며 그 곁을 지나쳤다.
‘어휴 ~ 많이도 쌌구나.’
다카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코에 부채질을 하는 세리머니를 펼쳤다. 물론 그 뜻을 아는 자들은 다이이치 선수단 뿐, 다른 녀석들도 코에 부채질을 해댔고 이 광경은 카메라를 통해 오사카 일대로 번져나갔다.
“자, 우리는 깔끔하고 고귀하게 야구하자고요.
다카기의 제안에 선수들은 긴장의 끈을 조였다.
오늘 병살을 쳤다간 평생 입에 오르내릴 놀림감, 땅볼을 쳐도 죽기 살기로 뛰겠다고 다짐했다.
‘실수 만회하자.’
4회 초 다이이치의 반격,
앞선 이닝에서 어중간한 대처로 주자를 2루로 보낸 이시이가 타석에 들어섰다. 병살로 끝나서 다행이지만 두루뭉술 넘어가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쳇!!’
초구 타격, 공이 투수 앞으로 향하자 이시이는 배트를 집어던졌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송구는 문제가 없었지만 1루수가 글러브 입을 닫을 타이밍을 잘못 잡으면서 공이 글러브를 맞고 튀어버린 것, 1루수가 실수를 수습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히라타니는 서둘러 베이스 커버를 들어갔다.
‘저리 비켜!!’
이 과정에서 투수는 의도치 않게 주자의 진로를 방해, 전력 질주하던 주자는 속도를 죽이지 못했다.
“으악!!”
“억!!”
덩치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거인들의 충돌,
옆구리를 강타당한 히라타니는 그대로 쓰러졌고 이시이도 그 위를 허들처럼 넘어가는 아찔한 장면이 연출됐다.
‘반창고로 해결 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한 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 의료진이 그라운드로 뛰어들자 사나에는 구급상자를 등 뒤로 감췄다.
전문 트레이너도 아니고 저길 가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3년 동안 매니저를 했지만 부원이 아찔한 사고에 휘말린 건 처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다가왔다.
“제 말이 들립니까? 설 수 있겠어요?”
의료진에 물음에 히라타니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경기속행은 무리, 의료진의 뜻에 아라이 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저 아직 할 수 있어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히라타니는 격하게 반발했다.
3학년 마지막 대회를 이렇게 꼴사납게 흘려보내다니, 뼈를 묻어도 여기서 묻겠다며 발악했다.
“흥분하지 마세요!!”
의료진은 코에서 피를 쏟아내는 환자를 보고 경악했다. 외상뿐이라면 다행인데 내상이 의심되는 증상, 아라이 감독은 주심에게 교체의사를 밝혔다.
“나 아직 할 수 있다고!! 이거 놔!! 놔!!”
히라타니는 피와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그라운드에서 퇴장했다. 발악해봤지만 그것도 잠시 뿐, 사방에서 달려드는 코치와 동료들의 손에 붙들렸다.
“너 괜찮냐?”
“네, 그런대로요.”
그에 비해 이시이는 가벼운 찰과상으로 끝났다.
하지만 히라타니를 병원으로 보낸 후폭풍은 생각보다 거셌고, 흥분한 히라카시 응원단은 고의가 분명하다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원망과 오물 투척, 결국 주심이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진정해주십시오. 지금부터 경기 진행에 방해되는 분은 퇴장 조치하겠습니다.”
“넌 뭐야?!! 판정이나 제대로 하라고!!”
“이시이도 퇴장 시켜!!”
히라카시 응원단은 주심에게도 불만을 쏟아냈다.
오늘 따라 유독 히라타니에게 엄격했던 주심,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3회만 살펴봐도 이시다는 연속 볼넷을 내주며 위기에 몰렸다. 누가 뭐라 해도 판정은 공정했고, 소란이 진정되지 않자 주심은 칼을 뽑아들었다.
일단 눈에 띄는 관중은 바로 퇴장 조치, 그리고 진루방해에 따라 1루 주자 이시이는 2루까지 진출했다.
‘이건 다 내 탓이야.’
히라카시의 1루수 타치바나 유우는 자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송구만 잘 잡았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팀의 기둥인 캡틴이 부상으로 실려 갔으니 여기서 이겨봤자 뒷수습이 되질 않는다.
정신이 무너져 내린 건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 기둥을 잃은 집처럼 야구명문 히라카시는 걷잡을 수 없이 주저앉았다.
‘다들 적당히 해라.’
6회 초, 스코어가 8대 0까지 벌어지자 후루타 감독은 선수들에게 그만 치라는 사인을 보냈다.
캡틴을 잃고 전의까지 상실한 팀을 더 몰아붙여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다카기는 감독의 사인을 무시했다.
‘상대가 정말 그걸 바랄까요.’
어설픈 동정은 패자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길 뿐, 전쟁은 한쪽이 백기를 들면 끝나지만 야구는 그렇지가 않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게 상대를 향한 배려, 어설픈 스윙으로 적선이나 해줄 생각은 없었다.